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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평-문정공 택당 이식 文靖公 澤堂 李植 ,양평군 향토유적 제16호, 택풍당澤風堂, 白鵶齋백아재

구름에 달

by 碧巖 2020. 5. 10. 00: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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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정공 택당 이식 文靖公 澤堂 李植, 택풍당澤風堂, 白鵶齋백아재

경기 양평군 양동면 쌍학리 산 9-1

양평군 향토유적 제16

 

 

 

澤風堂택풍당

1618년(광해군10) 폐모론이 일어나자   양평군 양동면 쌍학리로 낙향하여

1619년 택풍당(澤風堂)을 짓고 오직 학문에만 전념하였다. 호를 택당이라 한 것은 여기에 연유하였다 한다.

이식이 지은 택풍당지(澤風堂志)를 보면, 그가 이곳에 태풍당을 짓게 된 동기가 자세히 설명되어 있다.

      

택풍 이식은 이곳에서 자손과 제자들을 강학하였으며,

조선말기까지 택풍당을 거쳐간 그의 후손 들 중에는

정승 3, 판서급 10, 문과급제 22, 무과급제 17, 생원진사가 69명이나 배출될 정도(지평향교지)

덕수이씨 가문의 자제들에게 학문을 가르치는 중요한 기능을 수행하였던 곳이다.

   

 

 

 

 

 

 

 

 

 

 

 

白鵶齋백아재

 

 

 

德水李氏祗東世葬之碑덕수이씨지동세장지비

증손 이기진李箕鎭 짓고

외증손사위 김진상(金鎭商,1684~1755) 쓰다.

 

 

 

 

 

 

 

 

 

 

 

 

 

문정공 택당 이식 文靖公 澤堂 李植

1584(선조17)~1647(인조 25)   

본관은 덕수(德水). 는 여고(汝固), 는 택당(澤堂남궁외사(南宮外史택구거사(澤癯居士).

좌의정 이행(李荇)의 현손(玄孫)으로,

아버지는 증 좌찬성에 이안성(李安性)이고 어머니는 무송윤씨(茂松尹氏)로 공조참판 윤옥(尹玉)의 딸이다. 

택당 이식은 1610(광해군2) 별시문과에 급제했다.

1613년 세자에게 경사(經史)와 도의(道義)를 가르친 정7품에 해당하는 설서(設書)를 거쳐

1616년 북평사(北評事)가 되었다. 1617년 선전관을 지냈다.

1618년 폐모론이 일어나자 정계에서 은퇴하여 경기도 지평(砥平:지금의 양평군 양동면)으로 낙향했다.

그 후에 남한강변에 택풍당(澤風堂)을 짓고 오직 학문에만 전념했다. 호를 택당이라 한 것은 여기에 연유한다.

1621년 관직에 나오라는 왕명을 계속  거부하여 명령을 어겼다는 죄로 구속되기도 했다.

 

 

1623년 인조반정이 일어나 교분이 있었던 친구들이 조정의 주요직에 진출하자 이조좌랑에 등용됐다.

1624년 부수찬,응교,사간,집의 등을 역임했다. 

1625(인조3) 예조참의,동부승지,우참찬 등을 역임했고

1626년 대사간, 대사성, 좌부승지 등을 지냈고

1632년까지 대사간을 세 차례 역임했다.

임금의 종실을 사사로이 기리고 관직을 이유 없이 높이는 일이 법도에 어긋남을 논하다가

인조의 노여움을 사 간성현감으로 좌천되기도 했다. 1

633년에 부제학을 거쳐 1638년 대제학과 예조참판, 이조참판을 역임하였다.

1642년에 택당 이식(澤堂 李植)은 청음 김상헌(淸陰 金尙憲)과 함께

청나라를 배척할 것을 주장한다고 하여 중국의 심양(瀋陽)으로 잡혀갔다.

돌아올 때에 다시 의주(義州)에서 청나라 관리에게 붙잡혔으나 탈출하여 돌아왔다.

1643년 대사헌과 형조, 이조, 예조의 판서 등 조정의 주요직을 두루 역임했다.

  

 

1646년 별시관(別試官)으로 과거 시험의 문제를 출제하였는데

그가 출제한 문제에 역모의 뜻이 있다고 하여 관직이 삭탈되기도 했다.

이식은 문장이 뛰어나

상촌 신흠(象村 申欽),

월사 이정구(月沙 李廷龜),

계곡 장유(谿谷 張維)와 함께 조선문학 4대가로 꼽혔으며 그의 문하에서 많은 문인과 학자가 배출됐다.

문집으로는 택당집이 전하는데 한시의 모든 갈래에 두루 능숙했고 많은 작품을 남겼다.

대체로 정경의 묘사가 뛰어나고 감상에 치우치지 않고 있는 그대로의 풍광을 읊은 시가 많다.

고체에 뛰어나다는 평가를 받았고 오언율시에 특색을 발휘했다.

초학자훈증집(初學字訓增輯)·두시비해(杜詩批解)등을 저술했으며

수성지(水城志)·야사초본(野史初本)등을 편찬했다.

 

김택영(金澤榮)에 의하여 여한구대가(麗韓九大家)의 한 사람으로 꼽히는 그의 문장은

우리나라의 정통적인 고문으로 높이 평가받는다.

여한십가문초(麗韓十家文鈔)에는 사간원차자(司諫院箚子)등의 6편의 글이 수록되어 있다.

여주의 기천서원(沂川書院)에 제향됐으며 시호는 문정(文靖)이다. 1686년 영의정에 추증됐다.

 

吏曹判書兼大提學特  贈領議政諡文靖澤堂李公之墓  贈貞敬夫人靑松沈氏祔左

이조판서겸대제학특  증영의정시문정택당이공지묘  증정경부인청송심씨부좌

 

 

 

 

 

 

 

 

//문정공 택당 이식 文靖公 澤堂 李植 가계도//

고조부 이행李荇 좌의정

증조부 이원상李元祥 중추원도사 증 이조판서

   조부 이섭李涉 생원 증좌승지

아버지 이안성李安性 안기도찰방

어머니 정경부인 무송윤씨, 공조참판 증 좌의정 동리(東里) 윤옥(尹玉)의 딸

         택당 이식 澤堂 李植

         배위 정경부인 청송심씨, 현감 증 영의정 심엄沈俺의 딸

                 장남 이면하李冕夏, 시강원사서, 백곡白谷

                        손자 이유李留 홍산현감, 사익당四益堂

                                증손자 이태진李泰鎭 아산현감

                                      현손 이명李溟 성균진사,

                                증손자 이숭진李崇鎭 현감 현손 이정형李瀞瀅,

                                증손자 이형진李衡鎭 봉사 현손 유익문遊瀷汶

                차남 이신하李紳夏, 예빈시정禮賓寺正, 송노당松魯堂

                       손자 이적李笛

                       손자 이여李畲 좌의정, 영의정 문경공 포음 文敬公 浦陰

                       손자 이당李簹 의금부도사 양구현감

                삼남 이단하李端夏   문충공文忠公, 외재畏齋 좌의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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