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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평-항일의병장 산남 김백선장군 山南 金伯善, 金栢先

구름에 달

by 碧巖 2020. 5. 19. 21: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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항일의병장 산남 김백선장군 山南 金伯善, 金栢先

양평군 향토유적 제42호

경기도 양평군 청운면 갈운리 산125

동학을 치고 벼슬을 얻은 것이 네게 영화가 되지 않느냐. 영화로 알거든 하여보라.

비록 네가 조양한 포군이기는 하나 내가 온 힘을 다해 모았으니 내 군사는 아니요.

당당한 충. 의. 예의 무리라.

어찌 네게 맡겨 도적을 돕게 하겠냐!

 

이런 큰 변을 당하여 나라의 신민이 된 자는 대소귀천을 막론하고

마땅히 죽음을 걸고 적을 무찔러 살아서는 옳은 사람이 되고,

죽어서는 옳은 귀신이 되어야 하겠거늘....

---위 어록은 을미사변 후 단발령이 내려지자 양평지역 감역 맹영재(孟英在)를 찿아가

의병을 일으킬 것을 권유했으나 거절하자 꾸짖으면서 한 말이라 한다.---

항일의병장 산남 김백선 山南 金伯善, 金栢先

號 산남(山南),  휘는 김도제, 일명 김백선(金百先,金伯善,金栢先 :1849~1896).

지금의 경기도 양평군 청운면 갈운리에서 태어났다.

1894년(고종31) 동학 농민 운동 당시 지평지역의 감역 맹영재(孟英在)가 조직한 포수 부대에 참여하여

농민군을 진압할 때 공을 세워 조정에까지 이름이 알려지고 절충장군의 첩지까지 받았다.

 

1895년(고종32) 단발령이 내려지자 지평군수 맹영재(孟英在)에게 의병을 일으키자고 요구하였다가

거절당하여 울분을 참지 못하고 동향의 괴은 이춘영(槐隱 李春永)과 의기투합하였다.

군사적 기반을 가진 김백선과 양반 출신으로 지역 사회의 여론을 주도할 수 있는

괴암 이춘영(槐隱 李春永)이 손을 잡은 것이다.

1896년 김백선은 포군 400여명을 이끌고 이춘영과 합세하여 원주의 안창에서 봉기하였다.

이후 김백선은 제천으로 달려가 이필희(李弼熙)를 대장으로 삼고,

자신은 선봉장으로서 제천 의병의 실질적인 전투력을 제공하여 단양의 장회(長淮) 전투에서 공을 세웠다.

의암 유인석(毅庵 柳麟錫)이 대장이 되고 나서도

좌선봉으로서 충주성 전투와 가흥 전투 등에서 공을 세워 제천 을미 의병의 중요한 전투 현장에 늘 함께하였다.

그러나 평민 장수로서 유생 중심의 지휘부와 불화가 나타났다.

1896년(고종33) 2월 가흥에서 전개된 연합 작전에 협력이 잘 이루어지지 않고,

이후 계속된 가흥 작전에서 지휘부에 병력 지원을 요청하였으나 거절당하였다.

그 일로 본진에 돌아와 중군장 하사 안승우(下沙 安承禹:1865~1896)에게 칼을 뽑아들고

요청한 원군을 보내주지 않은 항의를 하였다.

그러나 안승우는 ‘대장을 옹위해야 하는 중군의 소임 때문에 병사를 함부로 이동시킬 수 없었다고 하였다’.

이를 본 의진대장 의암 유인석(毅菴 柳麟錫)이 대노하여

‘한낱 포수에 불과했던 상민이 어찌 분수를 모른다’ 고 군령위반으로 동료의병 앞에서 공개 처형을 받았다.

대장 앞에서 칼을 빼들고 항의하다가 군령 위반죄로 처형당하는 비운을 겪었다.

 

 이같은 사실은 한말의병장과 항일투사의 행적을 현지답사를 통하여 채록한

기려자 송상도(騎驢子 宋相燾: 1871~1946)의 기려수필(騎驢隨筆)에는

1915년 산남 김백선(山南 金伯善)의 고향을 찿아 기록하고 정리한 결과가 있는데,

이를 연구한 이상찬 연구원의 기록에 의하면

첫째, 충주성 함락은 전적으로 김백선의 힘이었다고 하였다.

둘째, 김백선이 하사 안승우(下沙 安承禹)와 갈등을 일으킨 후 처형 당할 때, 김백선이 스스로 잘못을 뉘우치고 스스로 묶였던 사실(스스로 허리띠를 풀러주며 ‘이것으로 나를 묶어 죄를 다스리기를 바랍니다’. 하여 묶이게 되었다고 한다.)

셋째, 또한 다음의 이유에서 처형의 부당함을 강조하였다.

1) 마지막 기회를 한번 더 달라고 애원하였음에도 유인석이 이를 뿌리쳤다.

2) 노모를 마지막으로 보고나서 죽게 해 달라는 애원도 유인석이 뿌리쳤다.

3) 김백선 처형이후 의병의 사기가 떨러져 전투에서 계속 패배하며 제천도 도로 내주어야 했다.

4) 안승우(安承禹)를 함께 처형하지 않았다.(기려수필에 대의를 위해 군사를 일으키고 전투에 필요한 군사를 보내지

않은 안승우가 더 잘못인데, 함께 처벌 안한 것은 잘못이라고 한다.)

기려수필의 결론은 “적을 토벌하지 않고 먼저 장수를 죽였으니, 방패를 버리고 성을 무너뜨린 것” 으로서 나라 사람들이 모두 억울하다고 여긴다. 라고 결론짓고 있다. 이에 의암 유인석(毅菴 柳麟錫)이 의병대장으로서의 한계를 드러낸 것이라고 한다.

 

유인석(柳麟錫)은 자식보다 아끼는 김백선을 벨 수밖에 없다고 하였으나, 그를 따르던 포군 다수가 이탈하면서 의진이 약화되는 계기가 되었다. 따라서 그의 죽음은 신분 사이의 갈등과 관련된 전기 의병의 한계로 인식되고 있다.

1991년 건국훈장 애국장이 추서되었다.

절충장군을미의병선봉장 경주김공도제자백선지묘 배숙부인파평윤씨합부

김백선장군묘역후경

 

천비마의 묘

장군께서 타시던 말이 장군의 시신을 집으로 운구한 후 말이 제천에서 양평 본가로 돌아와

삼일동안 집을 맴돌다 쓰러져 죽어 장군의 산소앞에 매장하였음.

산남 김백선장군 부친 오위장 김국용

증통정대부절충장군 행용양위부호군겸오위장  경주김공국용  배증숙부인전주이씨지묘

산남 김백선장군 장남 김동봉

아버지 김국용 오위장

    형님 김성제

    형님 김현제

    동생 김덕제

          김도제(김백선) 의병선봉장

             장남 김동봉

                    손자 김창렬

                           증손자 김주인(김인식)

                           증손자 김주영(김중식)

                           증손자 김주식

                           증손자 김주원(김도식)

             차남 김동학

             삼남 김동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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