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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산-심재 강징(心齋 姜澂), 소재 강징(少齋 姜澂),강징 신도비

구름에 달

by 碧巖 2020. 6. 10. 00: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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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재 강징선생(心齋 姜澂先生)

경기도 안산시 상록구 양상동 산 16-3

안산시 향토유적 제3

 

 

심재 강징선생(心齋 姜澂先生)

강징(姜澂) 1466(세조12)∼1536(중종31). 조선 전기의 문신·서예가.

본관은 진주(晉州). 조선 전기의 문신이자 서예가이다.

字는 언심(彦深). 號는 소재(少齋), 심재(心齋)이다.

보문각 대제학 강회중(姜淮仲)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강안복(姜安福),

아버지는 증 이조판서 강이행(姜利行), 어머니는 양천허씨로 증 영의정 허손(許蓀)의 딸이다.

1486년(성종17) 진사시에 합격하고,

1494년(성종25) 별시문과에 병과급제. 그 해에 승문원권지(承文院權知)를 거쳐,

예문관검열, 홍문관저작이 되었으며, 이어서 부수찬 등을 거쳐 부응교로 승진되었다.

연산군 때 경연관(經筵官)으로 8년 동안 재직했다.

강학시에 뜻이 깊은말로 유창하게 강학하여 좌우 신하들이 모두 경청하였다고 한다..

경연관으로 있을 때 충청도에 있는 요승(妖僧)이 스스로 사람들의 마비된 수족을 요술로 고친다 하면서

백성들을 현혹하므로, 왕명에 따라 그 요승을 문초해 요망스러운 실정을 밝힌 바 있다.

돌아와서 장령이 되었다가 다시 직제학·부제학 등을 거쳐 좌부승지가 되었다.

1504년(연산군10) 왕에게 수렵을 삼가도록 간했다가,

연산군의 노여움을 사서 낙안(樂安)에 유배되기도 했다.

1506년 유배지에서 복세암(福世庵)을 뜯어 옮기는 것을 반대하는 소를 올렸다가 잡혀와 옥에 갇혔다.

그러나 그 해 발생한 중종반정으로 풀려나서 강원도관찰사가 되었다.

1507년 동지중추부사가 되었으며, 성절사(聖節使)로 임명되어 명나라에 다녀왔다.

부모 봉양을 위해 전주부윤을 자청해 나가 선정을 베풀었다.

1521년(중종16) 진하사(進賀使)로 명나라에 갔을 때 뛰어난 글씨 솜씨로 황제의 특별한 대우를 받았다.

명나라에서 돌아와 지중추부사와 경주부윤을 거쳐 예조참판이 되었다.

글씨를 잘 써서 중종의 총애를 받았는데

중종은 심재 강징(心齋 姜澂)에게 옛 명현들의 명언과 시문(詩文)을 쓰게 하여 홍문관에 걸어놓고 

선비들과 백관(百官)들이 처신의 거울로 삼도록 했다. 필법이 당대 으뜸이었다 한다.

심재 강징의 글씨로는

동래군 익혜공 허백당 정난종(東萊君 翼惠公 虛白堂 鄭蘭宗,1433~1489) 신도비명

화순인 자경 ‘예조참의최한정비(和順人 子慶 ‘禮曹參議崔漢禎碑)’가 있다.

묘는 1536년(중종 31), 신도비는 그 후 111년이 지난 1647년(인조 25) 건립되었다.

신도비는 비신 높이 136, 너비 75, 두께 20이다. 비좌는 자연석을 이용하였다.

강징의 신도비 상단에 ‘예조참판강공신도비명(禮曹參判姜公神道碑銘)’이라고 새겨져 있다.

동래인 호음 정사룡(湖陰 鄭士龍,1491~1570)이 찬하고

풍양인 효헌공 동강 조상우(孝憲公 東岡 趙相愚,1640~1718)가 글을 썼으며

남원인 효정공 일암 윤덕준(孝靖公 逸庵 尹德駿,1658~1717)이 전액하였다.

강징의 묘와 신도비는 1991년 11월 2일 안산시 향토유적 제3호로 지정되었다.

 

 

 

嘉善大夫禮曹參判姜公諱徵之墓 配貞夫人延日鄭氏祔

가선대부예조참판강공휘징지묘 배정부인연일정씨부

 

 

예조참판 심재 강징선생(心齋 姜澂) 신도비

 

 

 

 

비좌는 자연석을 그대로 이용하였다.

禮曹參判姜公神道碑銘

예조참판강공신도비명

 

有明朝鮮國 嘉義大夫禮曹參判兼五衛都摠府副摠管姜公神道碑銘 幷序

유명조선국 가의대부예조참판겸오위도총부부총관강공신도비명 병서

資憲大夫知中樞府事兼 弘文館大提學藝文館大提學鄭士龍 撰

자헌대부지중추부사겸 홍문관대제학예문관대제학정사룡 찬

嘉義大夫吏曹參判兼知經筵世子右賓客趙相愚 書

가의대부이조참판겸지경연세자우빈객조상우 서

通政大夫吏曹參議知製敎尹德駿 篆

통정대부이조참의지제교윤덕준 전

 

 

銘曰                   다음과 같이 명()을 쓴다.

姜自晉出啓慶太傅  강씨는 진주에서 시작되어 태부 강민첨(太傅 姜民瞻) 때에 상경(祥慶)이 열려,

蕩掃遼氛以紓國步  거란[]의 침입을 소탕하여 나라의 운명을 편안하게 하였는데,

遙遙緖業贊成恢之 아득한 선대 사업 찬성공 강시(贊成公 姜蓍)에 이르러 넓혀졌네.

四傳有公丕振羽儀  4대를 내려와서 공이 태어나 우의(羽儀)를 크게 떨쳤도다.

盛之玉堂動目論思  옥당(玉堂)에서 명성 떨쳤고 경연(經筵)에서 매우 활동했으며,

密勿中臺旬宣外寄  중추부(中樞府)에서 힘쓰고 외직에 나가 왕명을 널리 펼치었네.

擧有績效簡其勞勩  큰 공적 많이 있었으나 그 수고로움 대범히 여겼도다.

宜長卿曹俾陪國論  판서(判書)의 직위에 제수되어 국론에 보탬이 되었어야 할 터인데,

晩貳春省豈乏推輓  뒤늦게 예조 참판에 그쳤으니 어찌 끌어주고 밀어 줌이 없었단 말인가?

園闢迂叟樽開靖節  사마광(司馬光)처럼 정원 꾸미어 도연명(陶淵明)처럼 술통 열고서,

我持恬默與世用拙  나는 안온하고 조용하게 지내며 세상에 쓰임 졸렬하였도다.

竟不滿德乃裕于嗣  끝내 벼슬 덕()에 차지 못했으나 후손에게 복 넉넉히 전했기에,

百世祚孝其尙不匱  백세 동안 번창한 효손들 오래도록 다하지 않을 걸세.

我銘終始惟後之遺  내 그 시말을 명으로 써서 후세에 영원히 남기노라.

 

 

심재 강징(心齋 姜澂, 14661536) 선생의 신도비문 말미에

崇禎紀元後 丁亥十月 日立은 1647년 10월에 건립하였다고 하는데,

자는 호음 정사룡(湖陰 鄭士龍, 1491~1570)이며,

자인 효헌공 동강 조상우(孝憲公 東岡 趙相愚.1640~1717, 豊壤人)

전액의 자인 효정공 일암 윤덕준(孝靖公 逸庵 尹德駿,1658~1717,南原人)의 생졸년을 보면

신도비의 찬은 1570년 이전에 찬한 것으로 보아야 하며

신도비의 건립은 1707년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

崇禎紀元後再丁亥十月 日立

 

//진주강씨 예조참판 소재 강징(少齋 姜澂) 가계 //

고조부 공목공 강저(恭穆公 姜著)

증조부 보문각대제학 통계공 강회중(通溪公 姜淮仲)

   조부 참판 강안복(姜安福)

아버지 충무위부사맹 증 이조판서 강이행(姜利行) 

어머니 증 정부인 양천허씨, 증 영의정 허손(許蓀)의 따님

          예조참판 재 강징(心齋 姜澂)

          배위 정부인 연일정씨, 정미(鄭湄)의 따님, 정자숙(鄭自淑)의 손녀

                    장남 사헌부감찰 신창현감 강희(姜僖) 

                    차남 적성현감 강의(姜儀) 

                    삼남 왕자사부(王子師傅)  강억(姜億) 

                    사남 병절교위 강엄(姜儼) 

                    오남 병조좌랑 해주목사 강위(姜偉) 

                    측실 강준(姜俊), 강임(姜任)

          동생 군수 강린(姜潾)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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