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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항미정杭眉亭, 이탄재 효문공 박기수, 서호 구국민단 결성지

구름에 달

by 碧巖 2020. 6. 19. 23: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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杭眉亭항미정

수원시 향토유적 제1호

경기도 수원시 권선구 서둔동 251

 

杭眉亭항미정

수원시 향토유적 제1호

항미정(杭眉亭)은

1799년(정조23) 농업용 관개수원으로 축조된 것이 축만제(祝萬堤)인데 이 인공호수는

1796년 완공된 수원화성의 서쪽에 위치하고 있기에 흔히 서호로 불리워왔다.

서호는 옛부터 낙조와 잉어가 유명했고, 특히 잉어는 약용으로 쓰여 궁중에 진상되기도 하였다.

이와 함께 서호의 경관과 풍치를 한층 아름답고 돋보이게 하는 명물이 바로

축만제(祝萬堤)옆에 건립된 정자가 항미정(杭眉亭)이다. 이 정자는

1831년(순조31년) 이탄재 효문공 박기수(履坦齋 孝文公 朴綺壽,1774~1845)가 화성유수로 임명되어

1832년 윤9월 4일 대사헌으로 이임하기까지

11개월을 화성유수로 재임하면서 항미정을 건립하였으며, ‘화성지(華城誌)도 편찬하였다.

항미정(杭眉亭)이라는 이름은 중국 시인 소동파(蘇東坡)의 시구(詩句)에

“서호는 항주(杭州)의 미목(眉目) 같다”고 읊은 데서 그 이름을 따서 지었다고 한다.

그 이름은 석양에 비치는 그림자가 마치 미인의 눈썹과 같다는 데서 유래되었다.

1908년 10월 2일 순종황제가 기차를 타고 수원 능행(능행)을 하였을 때,

융건릉 참배후 서호의 임시 정거장에 도착하여

축만제(祝萬堤) 뚝방길을 지나 항미정(杭眉亭)에서 차를 마시며 잠시 쉬었던 유서 깊은 정자이기도 하다.

경기도기념물 제200호인 팔달구 화서동 436-1번지의 축만제(祝萬堤)의 경계에 있다.

 

이탄재 효문공 박기수 履坦齋 孝文公 朴綺壽(1774년영조50)~1845년헌종11)

본관은 반남(潘南), 字는 미호(眉皓), 號는 이탄재(履坦齋).

증조부는 박사복(朴師復),  할아버지는 장성부사 박좌원(朴左源)이고,

아버지는 우부승지 박종신(朴宗臣)이며, 어머니는 해주최씨로 최수일(崔粹一)의 딸이다.

1795년(정조19) 진사가 되고,

1806년(순조6) 별시 문과에 을과로 급제하였다.

이후 대사헌을 거쳐 이조판서,지중추부사,판의금부사 등을 지냈다.

1816년(순조16) 서장관이 되었고, 1817년 동래부사가 되었다.

이어 성균관대사성,홍문관부제학,전라도관찰사 등을 역임하였다.

1824(순조24)년 전라감사가 되어

부호들의 옥사(獄事)와 간범자(干犯者)들을 철저하게 조사하여 실효를 거두었다.

1825년 하의도(荷衣島)에 표류한 한인(漢人)을 문책할 때

배에 실렸던 철물 2,000여 근이 장부에서 누락된 일이 생겨 파직되었다.

1826년 직제학으로 들어간 뒤 사간원대사간,이조판서,사헌부대사헌,형조판서,공조판서 등을 역임하였다.

1831년(순조31년) 이탄재 효문공 박기수(履坦齋 孝文公 朴綺壽,1774~1845)가 화성유수로 임명되어

1832년 윤9월 4일 대사헌으로 이임하기까지 11개월을 화성유수로 재임하면서 항미정을 건립하였으며,

‘화성지(華城誌)도 편찬하였다.

1832년 광주부유수가 되었으나

1833년(순조33) 경기암행어사의 탄핵을 받아 파직당하였다.

그러나 다시 이조판서,한성부판윤,예조판서 등을 역임하고,

1842년(헌종8) 규장각제학이 되었다.

1843년 지경연(知經筵)에 임명되었으나 관직에서 물러나 기로소에 들어갔다.

시호는 효문(孝文)이다.

서호 구국민단 결성지

西湖 救國民團 結成址

경기도 수원시 권선구 서둔동 251

서호 구국민단 결성지는 독립운동 결사체인 혈복단(血復團)을

구국민단으로 개칭하여 조직하고자 비밀리에 준비모임을 하던 곳이다.

1919년 9월 수원군 동면 남창리에 거주하던 학생 박선태(朴善泰)는 같은

수원군 일형면 하광교리에 거주하던 학생 이종상(李種祥)·이득수(李得壽)등과 회합하여

조선독립사상을 고취하는 선전활동을 하며,

1920년 6월에 임순남, 최문순, 이선경 등 여학생을 규합하여 구국민단을 결성하였다.

이들은 단장에 박선태(朴善泰,1901~1938), 부단장에 이득수(李得壽), 서무부장에 임순남(林順南),

재무부장에 최문순(崔文順)·, 교제부장에 차인재(車仁載/1895∼1971),

구제부장에는 수원지역의 유관순으로 불리워지는 이선경(李善卿1902~1921)이 맡았다.

그리고 조선의 독립과 수감된 독립운동가의 가족을 구조할 것 등의 목표를 세웠다.

수원 일대에 창가집과 독립신문을 반포하는 등 독립 사상을 고취하는 선전활동을 펼쳤으며,

이득수 등은 상하이[上海]에서 발행되는 독립신문을 비롯해 창가집 등을

서울 동대문 부인병원에서 입수하여 1920년 7월경부터 수차례 수원 민가에 배포하였으며,

이후 일제에 발각되어 박선태, 이득수는 징역 2년을 언도받았고,

이선경 외에 여학생 임순만, 최문순 등은 징역 1년, 집행유예 3년을 선고받고 구류 8개월만에 석방되었다.

그러나 이선경은 일제경찰의 혹독한 고문에 몸이 망가져

집으로 석방되어 되자마자 19세의 나이로 순국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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