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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우장춘(禹長春) 박사, 유전학의 석학, 농생물학자, 씨없는 수박

구름에 달

by 碧巖 2020. 6. 24. 22: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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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적인 육종학자 우장춘(禹長春) 박사

경기도 수원시 권선구 서둔동 256-1, (여기산麗岐山)

수원 여기산 선사유적지(水原 麗妓山 先史遺蹟址)

경기도 기념물 제201

경기도 수원시 권선구 서둔동, 여기산에 있는 청동기시대의 유적지이다 .

여기산 묘역안내 麗妓山 墓域案內

경기도 수원시 권선구 서둔동 256-1

이곳에는 녹색혁명을 이루어 농촌진흥청을 빛낸 분들의 묘가 있습니다.

우리나라 채소 육종 및 원예 산업 발전에 공헌한 우장춘(禹長春)박사,

농촌진흥청 초대 청장으로 한국형 농업 기술을 개발하고

기술의 보급 체계를 정비한  동호 정남규(東湖 鄭南圭)박사,

농촌진흥청 5대 청장으로 통일벼 개발 및 보급을 통해 쌀 자급자족 달성을 실현하여

우리나라 경제성장을 뒷받침한 송암 김인환(松岩 金寅煥)박사 등이 잠들어 계신 곳입니다.

 

세계적인 육종학자

우장춘(禹長春) 박사 묘

우장춘(禹長春, 1898.4.8.~1959.8.10)

한국농업과학연구소장 농생물학자. 세계적 유전학의 석학

본관은 단양(丹陽).

일본 도쿄에서 우범선(禹範善)과 사카이 나카[酒井仲]의 두 아들 가운데 장남으로 태어났다.

우범선(禹範善)은 대한제국 말기에 별기군 2대장 출신으로,

1895년 을미사변에서 명성 황후의 살해에 주도적으로 참여하였다.

이 때문에 1896년 아관 파천으로 친일 내각이 붕괴하자 일본으로 망명하였다.

우범선(禹範善)은 1903년 히로시마[廣島] 현 구레시에서

경상좌도 병마절도사와 장단군수를 지내고 만민공동회 회장을 역임한

영원한 고종의 능참봉 고영근(高永根,1853~1923)에 의해 살해되었다.

우장춘(禹長春)[1898~1959]은 아버지가 살해된 뒤

한동안 도쿄의 사찰인 희운사(喜運寺)에서 성장하였다.

희운사의 주지 아라이[新井慈剛]가

우범선이 결혼할 때 중매를 섰던 인연으로 우장춘의 양육을 자청하고 나섰기 때문이다.

얼마 뒤 어머니를 따라 구레시로 돌아간 뒤 구레중학교에 입학하여 1916년 3월 19일 졸업하였다.

부인은 일본인 와타나베 고하루(渡邊小春)[한국 이름 우소춘(禹小春)]와 결혼하여 6명의 자녀를 두었다.

 

명성왕후 시해사건에 가담한 우범선의 아들로,

평생 아버지의 매국을 속죄하는 마음을 품고 조국의 발전을 위해 노력을 게을리하지 않았다.

일본 도쿄제국대 부설 농학실과를 나와, 종간의 인공적인 교잡으로

새로운 종의 발생을 가능하게 한다는 내용의 <종의 합성> 이론을 제창, 전 세계적인 명성을 얻었다.

해방 후 귀국하여 식량 사정 개선을 위하여 배추와 감자의 종자를 개량하고,

기후에 맞는 작물을 도입하여 재배를 권장하는 등 농업 발전에 힘썼다.

 

일본에서 출생하여 초등학교와 중학교를 히로시마[廣島]에서 마치고,

1916년 도쿄제국대학실과[東京帝國大學實科: 전문대학]에 들어가

1919년 졸업과 동시에 일본 농림성 농업시험장에 취직하여

1937년 퇴직할 때까지 18년간 육종연구에 몰두하였다.

 

1936년 동경제국대학에서 농학박사학위를 받았으나

한국인이라는 것과 정규 대학을 나오지 않았다는 이유로 승진이 되지 않다가,

퇴임 직전에 기사(技師)로 승진하면서 퇴임하였다.

1945년에 「채소의 육종기술」을 발표하여 현재는 대부분 실용화되어 쓰여지고 있다.

1950년 정부의 초청으로 귀국하여,

그 당시 거의 일본에 의존하던 채소 종자를 국내에서 완전히 자급할 수 있도록 하였으며,

우리나라 육종학도와 종묘기술자를 양성하는 데 전력을 기울였다.

1951년 우장춘 박사는 채소 종자를 생산하기 알맞은 땅을 찾아 제주도를 방문했다.

제주도는 기후가 온화하고 장마가 일러  

꽃이 피고 열매 맺는 시기가 겹치니 좋은 종자의 생산이 어려웠다.

대신 감귤 재배에는 적당하여 우장춘 박사의 권유로 제주도의 농업관계자와 농민에게

감귤 재배를 적극 권장했고, 제주도는 우리나라 최고의 감귤 생산지가 됐다.

 

또 우장춘 박사는 맛 좋고 병에 강한 배추와 무 품종을 만드는데 성공했으며

바이러스에 쉽게 감염됐던

강원도 감자의 품종을 개량해 세계적으로 맛 좋고 튼튼한 강원도 감자도 생산했다.

1959년 8월 11일 사망하자 정부는 부산시문화상에 이어 두번째의 문화포장을 수여하였고,

전국민의 애도 속에 윤일선(尹日善)을 위원장으로 하는 사회장으로 치렀다.

유해는 수원시에 소재했던 구 농촌진흥청 구내의 여기산(麗妓山)에 안장하였으며,

매년 8월 10일이면

그가 양성한 제자들과 전국의 원예인들이 모여 그를 추모하는 행사를 올리고 있다.

 

그의 국내 업적으로는 우선 채소 종자의 국내 자급 해결 외에

무균종서(無菌種薯) 생산으로 6·25전쟁 이후의 식량난을 해결하는 데 크게 기여한 것이다.

사망 전에는 「수도이기작(水稻二期作)에 관한 연구」를 통하여 세상의 이목을 끌기도 하였다.

1959년 사망까지 만 9년 5개월간

한국농업과학연구소장·중앙원예기술원장·원예시험장장을 역임하였다.

1959년 대한민국 문화포장을 받았다.

부산광역시 동래구에 우장춘 박사의 기념관이 있으며, 그 앞의 도로명은 우장춘로이다.

연구 업적은 1926년 「종자(種子)로써 감별할 수 있는 나팔꽃 품종의 특성에 대하여」를 비롯하여

모두 19편의 논문이 있는데, 초기에는 나팔꽃이나 피튜니아에 대한 연구를 계속하다가

드디어 겹꽃이 피는 피튜니아 계통을 육성해 냈다.

이어서 유채(油菜)의 유전과 육종연구에 들어가

1931년「유채품종의 특성조사」를 비롯하여 여러 가지 논문을 발표하던 중

1935년 십자화과속의 식물에 관한 게놈분석을 시도한

박사학위 논문을 발표하여 연구의 절정을 이루었다.

 

이 논문은 종간의 인공적인 교잡으로 새로운 종의 발생을 가능하게 한다는 내용의

<종의 합성> 이론을 제창, 전 세계적인 명성을 얻으며,

세계적으로 이 방면 연구의 새 길을 터놓은 것이다.

즉, 염색체 수 10개의 일본 재래종 유채와 염색체 9개의 양배추를 교배해서

염색체 19개의 고유 유채를 만들어

우리의 주위에 이러한 종간잡종(種間雜種)이 있음을 밝힌 것이다.

 

‘씨 없는 수박’하면 대다수의 사람들이 세계적인 육종학자 우장춘 박사를 떠올릴 것이다.

1999년 부산시는 우장춘 박사 탄생 100주년을 기념해

동래구에 씨 없는 수박 모양을 한 우장춘기념관을 건립했다.

씨 없는 수박 최초 개발한 과학자는 우장춘 박사가 아니라,

일본 교토대의 기하라 히토시(木原均) 박사다.

씨 없는 수박을 최초로 만들지 않았지만

우장춘 박사는 그보다 더 중요한 씨 없는 수박을 만드는 기초 원리를 규명했다.

바로 우장춘 박사가 1935년 실험적으로 증명한 ‘종의 합성 이론’이다.

 

아버지 우범선은 훈련대 제2대대장으로

1895년 명성황후 시해사건에 연루되어

일본으로 망명해서 한의사 집안 출신의 일본인 부인을 만나 결혼하였다.

어린 나이에 아버지인 우범선이 살해되어(1903년 고영근高永根(1853~1923,에 의해 살해당함)

아들 우장춘은 극심한 가난과 주위의 차별을 받으며 성장하게 되었다.

189248일 망명정객 우범선(禹範善)공의 맏아들로

일본에서 출생 195981062세로 별세하다.

196046일 이은상은 글을 짓고

김충현은 제자하고   장남 원춘은 비명을 쓰고

윤효중은 설계 및 조각하고

우장춘박사 장의위원회에서 세우다.

 

수원농생명고등학교 본관 후면에 그려져 있는

세계 유전공학의 효시

우장춘禹長春(1898~1959)

종의 합성,   채소종자 육종의 선구자

아버지 우범선(禹範善, 1857~1903)

어머니 사카이 나카(酒井仲)

            우장춘(禹長春, 1898~1959)

            배위 와타나베 고하루(渡邊小春)[한국명 우소춘(禹小春)] 초등교사

                         장남 우원춘(禹元春)

                         차남 우계춘(禹季春)

                             딸 이코(佳子), 마사코(昌子), 요코(葉子), 아사코(朝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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