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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인-충간공 추탄 오윤겸(忠簡公 楸灘 吳允謙), 경기도기념물 제104호

구름에 달

by 碧巖 2020. 7. 16. 23: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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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주오씨 충간공 추탄 오윤겸(忠簡公 楸灘 吳允謙)

경기도 기념물 제104

경기도 용인시 처인구 모현읍 오산리 산 5

 

추탄 오윤겸(楸灘 吳允謙)의 사적비  왼쪽편 가운데 묘역이 추탄공의 묘소

 

추탄 오윤겸(楸灘 吳允謙)의 사적비 오른쪽편 능선에  부친  비연 오희문(斐然 吳希文)의 묘소

 

충간공 추탄 사적비

 

領議政諡忠貞公楸灘吳先生允謙史蹟

영의정시충정공추탄오선생윤겸사적

海州吳氏 楸灘公派 宗中 墓域案內圖

해주오씨 추탄공파 종중 묘역안내도

충간공 추탄 오윤겸(忠簡公 楸灘 吳允謙) 1559(명종 14)~1636(인조14)

본관은 해주(海州). 는 여익(汝益), 는 추탄(楸灘) 또는 토당(土塘).

사섬시주부(司贍寺主簿) 오옥정(吳玉貞)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감찰 오경민(吳景閔)이고,

아버지는 선공감역 오희문(吳希文)이며,

어머니는 연안이씨(延安李氏)로  군수 이정수(李廷秀)의 따님이다.

성혼(成渾)의 문인이다.

 

1582(선조 15) 사마시에 합격한 뒤

1589년 전강에서 장원해 영릉참봉(英陵參奉봉선전참봉(奉先殿參奉) 등을 역임하였다.

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양호체찰사(兩湖體察使) 정철(鄭澈)의 종사관으로 발탁되었으며,

시직(侍直)을 거쳐 평강현감으로 5년간 봉직하면서 1597년 별시 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였다.

현감을 그만둔 뒤 한때 결성(結城)에 우거했다가

부수찬(副修撰이조좌랑·지제교(知製敎부교리(副校理)를 역임하였다.

1602년 모함을 받아 곤경에 처한 스승 성혼을 변호하다가

시론(時論)의 배척을 받아 경성판관으로 출보(黜補)되었으며,

그 뒤 7, 8년간 안주목사·동래부사 등의 외직을 전전하였다.

이러한 와중에서도 안주성의 축조를 담당했으며,

북도순안어사(北道巡按御史)로서 함경도의 민폐를 조사하기도 하였다.

1610(광해군 2) 비로소 내직으로 들어와 호조참의·우부승지·좌부승지 등을 역임하였다.

그러다가 당시의 권신인 내암 정인홍(萊菴 鄭仁弘)

회재 이언적(晦齋 李彦迪)과 퇴계 이황(退溪 李滉)문묘 종사를 반대하며

사림과 대립하자 이를 탄핵하다가 왕의 뜻에 거슬려 강원도관찰사로 좌천되었다.

1년 남짓 관찰사로 재임하는 동안 기민(饑民)을 구제하는 한편,

영월에 있는 단종의 묘를 수축하여

제례 절차와 각 고을로부터의 제수 마련 법식을 제정해 이후 이를 준용하게 하였다.

다시 중앙으로 들어와 첨지중추부사가 되었으나,

집권 세력인 북인의 발호로 계축옥사가 일어나는 등

정계가 혼란해지자 늙은 어버이의 봉양을 구실로 광주목사(廣州牧使)를 자원하였다.

1617년(광해군9) 다시 첨지중추부사가 되어 회답 겸 쇄환사(回答兼刷還使)의 정사로서

사행 400여 명을 이끌고 일본에 가서 임진왜란 때 잡혀갔던 포로 150여 명을 쇄환했으며,

이 때부터 일본과의 수교가 다시 정상화되었다.

1618년 북인들에 의해 폐모론이 제기되자 이를 반대, 정청(庭請)에 불참하였다.

이로 인해 탄핵을 받자 벼슬을 그만두고 광주 선영 아래의 토당(土塘)으로 물러나 화를 피하였다.

1622년(광해군14) 명나라 희종의 즉위를 축하하기 위한 하극사(賀極使)로 선발되어,

육로가 후금에 의해 폐쇄되었으므로 바다로 명나라를 다녀와 그 공으로 우참찬에 올랐다.

이듬해 인조반정이 일어나자 대사헌에 임명되고, 이어 이조·형조·예조의 판서를 두루 역임하였다.

특히, 북인 남이공(南以恭)의 등용 문제로 서인이 노서(老西소서(少西)로 분열될 때,

북저 김류(北渚 金瑬)와 선원 김상용(仙源 金尙容) 등과 함께

노서(老,西)의 영수가 되어 남인·북인의 고른 등용을 주장하고 민심의 수습을 꾀하였다.

1624(인조2) 이괄(李适)의 난이 일어나자 왕을 공주까지 호종하였다.

이어 예조판서·지중추부사를 거쳐 1626년 우의정에 올랐다.

이듬해 정묘호란이 발생하자 왕명을 받고 자전(慈殿)과 중전을 모시고 먼저 강화도로 피난했으며,

환도 뒤 좌의정을 거쳐 1628년(인조6) 70세로 영의정에 이르렀다.

이 때 노서·소서간의 대립과 갈등이 심해지자 이의 중재에 힘썼으며,

특히 경연에서 정치 혁신을 위한 왕의 각성과 성리학에의 전념을 촉구하였다.

이듬해 인조의 생부인 정원군(定遠君)을 원종(元宗)으로 추숭하고

또 부묘(柎廟: 상을 마친 뒤 神主太廟에 모심.)하려는 논의가 일자, 반대하여 영돈녕부사로 물러났다.

1633년 좌의정에 재임되고 기로소에 들어갔다.

인열왕후(仁烈王后: 仁祖妃)의 상에 총호사(摠護使)로서 과로한 나머지 병을 얻어 죽었다.

예론에 일가견을 가져, 특히 인조 생부의 추숭과 부묘론에 반대하는 논리적 근거를 세웠다.

요컨대, 선조의 왕통을 이어받은 인조는

선조가 비록 할아버지이기는 하나 예묘(禰廟: 아버지의 사당)에 해당되므로,

왕이 아닌 대원군(大院君: 仁祖 生父)을 예묘로 삼는 것은 예에 어긋난다는 의견이었다.

만년에 재상의 자리에 10여 년 간 있을 때 백성의 편의를 위해

연해공물(沿海貢物)의 작미(作米)와 대동법의 시행을 추진하고,

명분론의 반대를 물리치면서까지 서얼의 등용을 주장하였다.

또한 사림을 아끼고 보호해 어진 재상이라 불렸다.

그러나 전체적으로 보아 경제(經濟)의 재주가 부족하고,

시폐와 왕의 잘못을 직언하는 기개가 모자라 평소의 기대에 부응하지 못했다고 한다.

한편, 덕업의 수양에만 힘쓸 뿐 사장(詞章)에는 뜻을 두지 않았으나, 문장은 평이하면서도 조리가 있고,

시는 맑으면서도 운율에 어긋남이 없었다고 한다. 그리고 성혼 문하의 대표적인 인물로 손꼽히고 있다.

묵재 이귀(默齋 李貴)와 우복 정경세(愚伏 鄭經世)

그리고 창석 이준(蒼石 李埈)과 북저 김류(北渚 金瑬) 등과 교유하였다.

특히 묵재 이귀(默齋 李貴)와는 동문수학에 외가로 인척 사이의 정의(情誼)가 있었고,

임진왜란 중에 친교가 두터웠다.

다만, 뒤에 노서·소서의 대립에 이귀가 소서의 영수가 되어 추숭을 적극 추진하자 틈이 벌어졌다.

죽기 직전 유언으로 조정에 시호를 청하지 말고 신도비를 세우지 못하게 했으나,

1663(현종4)에 충간(忠簡)이라는 시호가 내려졌다.

광주(廣州)의 구암서원(龜巖書院)에 배향되고, 평강의 산앙재영당(山仰齋影堂)에 제향되었다.

저서로는 시문과 소차를 모은 추탄문집을 비롯해

동사일록(東槎日錄)·해사조천일록(海槎朝天日錄)등이 전하고 있다.

 

廣津亭舍偶吟(광진정사우음) : 광진정사에서 우연히 읊다.

                                               - 오윤겸(吳允謙)의 시 -

手把淵明集(수파연명집) : 도연명의 문집 손에 들고서

呼兒掃樹陰(호아소수음) : 아이 불러 나무그늘 아래를 쓸고

江流靑不盡(강류청불진) : 푸른 강은 한없이 흐르는데

雲出白無心(운출백무심) : 힌 구름은 무심히 솟아나네

大匡輔國崇祿大夫議政府領議政 兼領經筵弘文館藝文館春秋館觀象監事 世子師贈諡忠貞吳公允謙之墓

貞敬夫人慶州李氏之墓祔左

대광보국숭록대부의정부영의정 겸영경연홍문관예문관춘추관관상감사 세자사증시충정오공윤겸지묘

정경부인경주이씨지묘부좌

有明朝鮮國大匡輔國崇祿大夫議政府領議政 兼領經筵弘文館藝文館春秋館觀象監事 世子師

贈諡忠貞楸灘吳公墓碣銘幷序

유명조선국대광보국숭록대부의정부영의정 겸영경연홍문관예문관춘추관관상감사 세자사

증시충정추탄오공묘갈명병서

大匡輔國崇祿大夫議政府左議政兼領經筵事感春秋館事 世子府 金尙容讚

대광보국숭록대부의정부좌의정겸영경연사감춘추관사 세자부 김상용찬

正憲大夫議政府左參贊兼成均館祭酒 宋浚吉書

정헌대부의정부좌참찬겸성균관제유 송준길서

추탄 오윤겸선생 묘소후경

추탄 오선생 묘역에서 연지

 

// 해주오씨 영의정 충간공 추탄 오윤겸(忠簡公 楸灘 吳允謙)가계도//

    5대조 오중노

   고조부 오계선

   증조부 오옥정(吳玉貞) 사섬시주부

할아버지 오경민(吳景閔) 장성현감 사헌부감찰 증 의정부좌찬성

   아버지 오희문(吳希文) 선공감역 증 의정부영의정

   어머니 증 정경부인 연안이씨 문천군수 이정수(李廷秀)의 따님

      숙부 오희인(吳希仁)---오윤해(吳允諧)---오달제(吳達濟)

            동생 만운 오윤해(晩雲 吳允諧,1562명종17~) 여주목사 系 백부 오희인(吳希仁)

                   조카 충렬공 추담 오달제(忠烈公 秋潭 吳達濟) 증 영의정

            동생 월곡 오윤함(月谷 吳允諴)

                   장남 오달정吳達政 증 좌승지

                   차남 오달행 吳達行 호 한운閑雲

                   오남 오달권(吳達權) 증 호조참판

영의정 충간공 추탄 오윤겸(忠簡公 楸灘 吳允謙,1559명종14~1636인조14)

배위 정경부인 경주이씨, 첨정 이응화(李應華)의 따님, 익재 이제현(益齋 李齊賢) 후손

          장남 오달천(吳達天) 군수

          배위 증숙부인 능성구씨, 호조정랑 구곤원(具坤源)의 따님

          배위 증숙부인 한양조씨, 의빈부도사 조간(趙幹)의 따님

                 손자 오도종(吳道宗) 사헌부감찰 증 이조참의

                 배위 증숙부인 전주이씨, 지평 이시우(李時雨)의 따님

                        증손자 오수현(吳遂顯) 김천군수 증이조참판 生父오도융(吳道隆)

                              현손 오명구(吳命久) 송화현감

                                     5대손 오언서(吳彦舒)

                 손자 오도융(吳道隆) 증 좌찬성

                 배위 증 숙부인 함평이씨, 칠곡부사 이회(李澮)의 따님

                        증손자 오수량(吳遂良) 증 영의정 해흥부원군

                        배위 증 정경부인 함양여씨, 영의정 여성제(呂聖齊)의 따님

                               현손 징촌 오명준(徵村 吳命俊)

                               현손 모암 오명항(慕菴 吳命恒),영모당(永慕堂),충효공(忠孝公)

                               현손 귤은 오명신(橘隱 吳命新)

                               현손 오명집(吳命集)

                       증손자 오수현(吳遂顯) 출계 백부 사헌부감찰 오도종(吳道宗)

                손자 오도일(吳道一) 대제학 병조판서-세종시 장군면 용암리 산598-2

                배위 풍양조씨, 이조판서 조복양(趙復陽)의 따님

                배위 연일정씨, 좌랑 정엄(鄭淹)의 따님

          차남 오달주(吳達周)

  배위 정부인 덕수이씨

          삼남 오달조(吳達朝) 증 승정원좌승지

                 손자 오도립(吳道立), 오도존(吳道存), 오도규(吳道規)

                 손자 오도근吳道近 여도만호 증 병조참의

                         증손자 오수국(遂國) 통정대부 분무원종일등공신 절충장군

                                   현손 오명삼(命三) 군기시 판관

                         증손자 오수해(遂楷)

                                   현손 오명화(命和),

                         증손자 오수완(遂完)

                                   현손 오명홍(命弘)

             사남 오달원(吳達遠)

             오남 오달사(吳達士)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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