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예원경 이아당 이중하(掌禮院卿 二雅堂 李重夏)
양평군 향토유적 제41호
경기도 양평군 양평읍 창대리 산82
장예원경 이아당 이중하 掌禮院卿 二雅堂 李重夏
목숨건 간도 지킴이 이중하
이중하(李重夏, 1846~1917)
본관은 전주(全州). 字는 후경(厚卿), 號는 이아당(二雅堂), 규당(圭堂), 탄재(坦齋).
현감 이인식(李寅植)의 아들이다.
1882년(고종19) 증광문과에 병과로 급제, 홍문관교리가 되었다.
1885년 공조참의, 안변부사가 되었다가
토문감계사(土門勘界使)로서 청국측 대표 덕옥(德玉), 가원계(賈元桂), 진영(秦瑛) 등과
백두산에서 백두산 정계비와 토문강지계(土門江地界)를 심사하였다.
국경 문제를 놓고 담판을 벌였으나 견해차가 심한데다 청국 측이 강압적인 태도로 나와 회담은 실패하였다.
1886년 덕원항감리(德源港監理)가 되었다가
1887년 다시 토문감계사가 되어 회담을 재개하였는데,
청국 측이 조선 측의 주장을 거절하며 위협하자
“내 머리는 자를 수 있을지언정 국경은 줄일 수 없다.”며 끝내 양보하지 않았다.
1890년 이조참의가 되어 충청도 암행어사의 임무를 수행하였다.
1894년 외무부협판· 의정부도헌이 되었고,
동학운동이 일어나자 경상도선무사(慶尙道宣撫使), 영월영천안핵사(寧越永川按覈使),
경상도위무사(慶尙道慰撫使)로 진압에 앞장섰다.
이 해 말 김홍집 내각의 내무부협판이 되어 갑오농민운동 때 중요한 역할을 하였으나,
이듬해 김홍집 내각이 무너지고 지방 제도가 개편되자 대구부관찰사로 임명되었다.
관찰사 재직시 을미의병 봉기로 많은 관리가 희생되었으나 이중하는 민심을 얻어 무사하였다.
1898년 만민공동회(萬民共同會)의 요구로 성립된 중추원에서,
무기명 투표로 11명의 대신 후보자를 선출할 때, 2위로 천거되기도 하였다.
1903년 외무부협판 칙임2등(勅任二等)이 되어 문헌비고찬집당상(文獻備考纂輯堂上)을 맡았다.
그 뒤 평안남도관찰사·경상북도관찰사·궁내부특진관을 거쳐 장례원경(掌禮院卿)이 되었다.
1909년 일진회(一進會)가 합병을 주장하자,
민영소(閔泳韶), 유하 김종한(游霞 金宗漢) 등과 국시유세단(國是遊說團)을 조직하여
그 해 12월 5일 원각사(圓覺社)에서 임시 국민대연설회를 열고, 그 주장이 부당함을 공격하였다.
1910년에는 규장각제학으로 한일합방에 극렬히 반대하였으며,
지방관리 재직시 청렴하고 강직한 인품으로 이름이 높았다.
저서로 『규당문집』·『감계전말(勘界顚末)』·『감계일기(勘界日記)』 등이 있으며,
손자인 이흥종이 출간한 이아당집(二雅堂集)이 있다.
외교부 '우리 외교를 빛낸 인물'에 이중하 선정 2011.10.11
【서울=뉴시스】장진복 기자 =
외교통상부는 2011년 '우리 외교를 빛낸 인물'로 조선 말기 문신 이중하(李重夏)를 선정했다고 11일 밝혔다.
1712년 조선과 청나라는 양국간 경계를 압록과 토문을 기준으로 한다는 백두산 정계비를 세웠지만,
19세기 말 조선 농민의 간도지역 이주가 증가해 양국간 국경문제가 대두됐다.
이에 조선과 청나라는 1885년과 1887년 2차례에 걸쳐 국경획정 회담을 개최,
이중하는 국경회담에서 회담대표인 토문감계사(土門勘界使)로 활약했다.
1차 국경획정 회담에서 청측은 백두산 정계비의 토문은 두만강을 지칭한다며
두만강의 원류를 조사한 뒤 이를 국경으로 획정할 것을 주장,
이중하는 두만과 토문은 별개의 강이라며 국경획정을 위해서는 우선 정계비를 답사할 것을 주장했다.
결국 이중하(李重夏)의 주장이 받아들여져 양측은 백두산 정계비와 주변의 지형과
두만강의 원류를 모두 답사했지만 청측은 두만강을 국경으로 하자는 입장을 굽히지 않아
1차 국경획정 회담에서 양측은 별다른 합의를 보지 못했다.
2차 국경획정 회담에서 청측은 자신들이 지정하는 곳을 경계로 정할 것을 압박,
이에 이중하는 "내 머리는 자를 수 있을 것이나 나라의 영토는 줄일 수 없다"며
청측의 요구를 거부해 2차 회담 역시 결렬됐다.
외교부는 "영토주권 수호와 애민정신에 투철한 우리 외교관의 전형을 제시해
외교에 대한 국민들의 관심과 자부심을 고취할 수 있을 것"이라고 밝혔다.
有韓正憲大夫掌禮院卿 完山李公重夏之墓 配貞夫人昌寧曺氏祔左
유한정헌대부장예원경 완산이공중하지묘 배정부인창녕조씨부좌
이아당 이중하 묘역후경
규장각부제학 비서원승 치재 이범세(恥齋 李範世)
규장각부제학 비서원승 치재 이범세(恥齋 李範世)_
1874년(고종11)~1940
본관은 전주(全州). 字는 사의(士儀). 號는 치재(恥齋)
이아당 이중하(二雅堂 李重夏)의 아들이다.
1889년(고종26) 경무대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였으며,
1891년 대교권(待敎圈)을 거쳐 1894년에 홍문관부교리가 되었다.
1897년(고종34) 사례소(史禮所) 위원으로 임명되었으며,
1908년(순종2) 9월에 당시 대편찬사업의 하나로 진행된 『국조보감(國朝寶鑑)』의
찬집(纂輯), 선사(繕寫), 감인(監印) 위원으로 임명되어 2년 동안 『국조보감』의 편찬사업에 진력하였다.
1909년에 규장각부제학에 임명되었으며,
그해 9월 정만조(鄭萬朝)·김윤식(金允植)·김학진(金鶴鎭)·박제순(朴齊純)·김덕한(金德漢)·김교헌(金敎獻) 등과 함께
만 1년 동안의 노력 끝에 『국조보감』 편찬사업을 성공리에 완수하였다.
그해 10월 『국조보감』 찬집에 기울인 공을 인정받아 서훈4등 태극장(太極章)을 받았다.
아들 이흥종이 출간한 아버지 이범세의 문집인 치재집(耻齋集)이 있다.
通政大夫秘書院丞 李公範世之墓 配淑夫人東萊鄭氏祔右
통정대부비서원승 이공범세지묘 배숙부인동래정씨부우
//전주이씨 광평대군(廣平大君) 정안부정공파(定安副正公派) 이아당 이중하(二雅堂 李重夏) 가계//
아버지 현감 이인식(李寅植)
장예원경 이아당 이중하(二雅堂 李重夏, 1846~1917)
배위 정부인 창녕조씨
장남 비서원승 치재 이범세(恥齋 李範世)
손자 이흥종
증손자 이규영, 이규청
손녀 이석희
외증손녀 이인호 전 서울대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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