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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인-문간공 십청헌 김세필(文簡公 十淸軒 金世弼), 지비옹(知非翁)

구름에 달

by 碧巖 2020. 8. 13. 23: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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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간공 십청헌 김세필(文簡公 十淸軒 金世弼), 지비옹(知非翁)

경기도 문화재자료 제92호

경기도 용인시 수지구 죽전동 산 23

 

묘역 전체전경

 

문간공 십청헌 김세필(文簡公 十淸軒 金世弼), 지비옹(知非翁)

 

 

김세필金世弼 (1473년성종4~1533년중종28)

본관은 경주(慶州). 字는 공석(公碩), 號는 십청헌(十淸軒), 지비옹(知非翁).

두문동충신 상촌 김자수(桑村 金自粹)의 현손이며,

할아버지는 원종공신 공평공 퇴재 김영유(恭平公 退齊 金永濡)이고,

아버지는 충주목사 김훈(金薰), 어머니는 진천송씨로 군수 송학(宋翯)의 따님이다.

부인은 고성이씨로 부사 이탁(李鐸)의 따님이며,

아들은 김숙(金䃤), 김구(+), 충민공 김저(金䃴)이다. 고손은 김정현(金鼎鉉)이다.

 

십청헌 김세필(十淸軒 金世弼)[1473~1533]은

서울 명례방에 살면서 젊어서부터 독서를 부지런히 하여 닭이 울어도 그칠 줄 몰랐으며,

할아버지인 공평공 퇴재 김영유(恭平公 退齊 金永濡)의 옛집이라서

야간 순찰 군졸들이 매일 글소리를 엿듣고

“우리들이 멀지 않아 이 댁에 야순을 보고하게 될 것이다”하였다고 한다.

1490년(성종21)에 유생 시험을 볼 때

18세로 수석으로 합격하자 기특하여 낙하(落霞) 운자를 부르자 즉석에서 시를 지어,

성종이 “그 재주가 노성함을 기다려 크게 쓰리라”하고 많은 상품을 주고,

또 관학 유생에게 제술 시험 보일 때

19세로 으뜸을 하여 쌀과 호초등을 내려 주어 한때 젊은 선비들이 흠모하였다.

 

1495년(연산군1) 생원시에 합격하고, 1496년 식년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였다.

1498년(연산군4) 홍문관정자겸경연전경(弘文館正字兼經筵典經)에 임명된 후,

『성종실록(成宗實錄)』 편찬에 기사관으로 참여하고,

홍문관박사(弘文館博士)·부수찬(副修撰)·지평(持平)을 지냈다.

1504년 갑자사화에 연루되어 청풍(淸風)으로 귀양 갔다가,

다시 거제도로 옮겨 「나그네의 회포」를 읊었다.

1506년 중종반정으로 복직되어 부교리, 교리를 역임하였고,

1507년(중종2) 이조정랑으로 유자광(柳子光)의 극형을 논핵하고,

1508년(중종 3) 검상(檢詳)·사인(舍人)·응교(應敎)를 지내고,

1509년(중종4) 대마도경차관(對馬島敬差官)이 되었으나 어머니가 늙어 사양하였다.

1510년(중종5) 동부승지(同副承旨)와 부제학(副提學),

1511년(중종6) 우부승지, 예조참의, 사간원대사간을

1512년(중종7)이후에 병조참지,우승지,전라도관찰사,대사성,사간원대사간·,광주목사를 거쳤다.

1519년(중종14) 장례원판결사(掌隸院判決事),이조,형조,예조참판을 지내고

사은사로 명나라를 다녀왔다. 그 해 겨울 정암 조광조(靜庵 趙光祖)

사사(賜死: 극형에 처할 죄인을 왕명으로 독약을 마셔서 죽게 하는 일)되며,

충암 김정(冲菴 金淨), 사서 김식(沙西 金湜) 등의 신진사류가

지정 남곤(止亭 南袞), 소용정 심정(逍遙亭 沈貞), 도열공 홍경주(度烈公 洪景舟) 등의

훈구 재상에 의해 화를 입은 기묘사화가 발생하였다.

 

1520년(중종15)  48세에 경연에서 기묘사화 때 정암 조광조(靜庵 趙光祖)를 사사한

임금의 처사가 부당하다고 규탄하다가

이천의 유춘역(留春驛)으로 장배(杖配: 곤장을 치고 유배를 보내는 일)되었다.

1522년(중종17) 풀려났으나

다시는 벼슬에 나가지 않고 고향으로 내려가서 십청헌(十淸軒)을 짓고 후진을 교육하였다.

후일 이조판서에 추증되고 충주의 팔봉서원(八峰書院)에 향사되었다.

시호는 문간(文簡)이다. 저서로는 『십청헌집(十淸軒集)』 4권이 있다.

지중추부사로 충북 음성군 생극면 도신리 도관원리에 살았으며

김세필(金世弼)은 충북 음성군 생극면 팔성리 지비천(知非川)에 공당(工堂)을 지을 때

충주목사 눌재 박상(訥齋 朴祥)이 도와주었는데, 말을 매던 촌락이 ‘말마리(秣馬里)’ 마을이 되었고,

유생들이 모여들어 제방 둑에 말 매던 곳을 ‘말개뚝’이라 하였다.

 

또한 김세필이 ‘마흔아홉 살에 벼슬에서 쫓겨나고, 50살에 49년이 잘못되었음을 알았다’하여,

‘지비옹(知非翁)’이라 부르고, 집 앞에 흐르는 물을 ‘지비천(知非川)’이라 불렀으며,

공당은 이후에 ‘지천서원(知川書院)’이 되었다.

문간공 지비옹 십청헌 김세필(文簡公 知非翁 十淸軒 金世弼)선생의 신도비는

문정공 우암 송시열(文正公 尤菴 宋時烈)이 짓고,

11대족손 효헌공 주하 김도희(孝憲公 柱下 金道喜)가 썼다.

嘉善大夫守知中樞府事 兼同知成均館事 金公世弼之墓 貞夫人固城李氏祔左

가선대부수지중추부사 겸동지성균관사 김공세필지묘 정부인고성이씨부좌

 

贈資憲大夫吏曹判書 諡文簡 行吏曹參判慶州金公諱世弼之墓 貞夫人固城李氏祔左

증자헌대부이조판서 시문간 행이조참판경주김공휘세필지묘 정부인고성이씨부좌

 

십청헌 김세필 묘소후경

 

 

 

 

 

 

문간공 십청헌 김세필(文簡公 十淸軒 金世弼)모친    증 정부인 진천송씨

贈工曹判書 行僉正慶州金公諱薰之配 贈貞夫人鎭川宋氏之墓

증공조판서 행첨정경주김공휘훈지배 증정부인진천송씨지묘

 

증 정부인 진천송씨 묘역후경,  앞쪽이 둘째 아들 심청헌 김세필 묘소

 

//경주김씨 문간공 십청헌 김세필(文簡公 十淸軒 金世弼)가계//

   고조부 상촌 김자수(桑村 金自粹),

   증조부 평양소윤 추은 김근(平壤少尹 秋隱 金根)

할아버지 공평공 퇴재 김영유(恭平公 退齊 金永濡)대사헌 황해도관찰사 원종공신

   아버지 충주목사 김훈(金薰) 충주목사

   어머니 증 정부인 진천송씨, 군수 송학(宋翯)의 따님

         형님 김원필(金元弼) =========음성군 감곡면 주천리

            문간공 십청헌 김세필(文簡公 十淸軒 金世弼), 증 이조판서

            배위 정부인 고성이씨, 부사 이탁(李鐸)의 따님

                      장남 김숙(金䃤)  종사랑

                      차남 김구(金石+瞿), (忂) 사직서참봉, 증 승정원좌승지

                                손자 김원경(金元慶) 종사랑

                                손자 김중경(金重慶) 별제 증 호조판서 出系 숙부 김저(金䃴)

                                손자 김선경(金善慶) 군자감 판관, 증 호조참판

                      삼남 충민공 김저(忠民公 金䃴) 사헌부 지평, 증 이조판서

                                손자 김중경(金重慶) 별제 증 호조판서 생부 김구(金石+瞿)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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