충민공 김저(忠愍公 金䃴)
경기도 용인시 수지구 죽전동 산 23
충민공 김저(忠愍公 金䃴)
1512년(중종7)~1547년(명종2)
본관은 경주(慶州). 字는 학광(學光).
할아버지는 김훈(金薰)이고,
아버지는 문강공 십청헌 김세필(文簡公 十淸軒 金世弼)이며, 어머니는 고성이씨로 부사 이탁(李鐸)의 딸이다.
1539년(중종 34) 28세에 유학으로서 별시 문과에 을과로 급제하고 그 뒤 검열(檢閱)이 되었다.
1542년에 심한 흉년이 들자 경상도와 충청도에 어사로 파견되어 이를 진휼하였고,
인종 초년에는 시독관으로서 경연에 참여하였으며, 곧 교리(校理)·지평(持平)이 되었다.
1545년(명종 즉위년) 을사사화에 관련되어 관직을 삭탈당하고 삼수에 유배되었으며
1546년 사사되고 가산과 처자도 적몰되었다.
1567년 선조 즉위 후 복권문제가 논의되다가
1570년(선조3)에 다른 10여 명과 함께 복권되었다.
정조 때 이조판서에 추증되었다. 시호는 충민(忠愍)이다
贈資憲大夫吏曹判書 兼知經筵義禁府事弘文館大提學藝文館大提學 知春秋館成均館事 五衛都摠府都摠管
증자헌대부이조판서 겸지경연의금부사홍문관대제학예문관대제학 지춘추관성균관사 오위도총부도총관
世子左賓客 行通訓大夫司憲府持平 贈諡忠愍金公䃴之墓 配淑人高靈申氏 贈貞夫人合祔
세자좌빈객 행통훈대부사헌부지평 증시충민김공저지묘 배숙인고령신씨 증정부인합부
贈資憲大夫吏曹判書 兼知經筵義禁府事弘文館大提學藝文館大提學 知春秋館成均館事 五衛都摠府都摠管
증자헌대부이조판서 겸지경연의금부사홍문관대제학예문관대제학 지춘추관성균관사 오위도총부도총관
世子左賓客 行通訓大夫司憲府持平 贈諡忠愍慶州金公䃴之墓 配贈貞夫人高靈申氏 淑人合祔
세자좌빈객 행통훈대부사헌부지평 증시충민경주김공저지묘 배증정부인고령신씨 숙인합부
丙午八月初十日 (병오팔월초십일) 병오년 팔월십일에
舍弟遠與家兄別 (사제원여가형별) 이 아우가 멀리 형과 작별하였오
西南千里兩無因 (서남천리양무인) 서쪽남쪽 먼 길에 만날 수 없고
死生後事宜有托 (사생후사의유탁) 마지막으로 저의 뒷일 부탁하오
成人卄有二年來 (성인입유이년래) 저는 성인이 된지 이이년 동안
旣無男女身孑孑 (기무남녀신혈혈) 자녀도 없이 너무 외로와
兄家四子皆可人 (형가사자개가인) 형의 네 아들 모두 훌륭한 중에
第二旣長計當決 (제이기장계당결) 둘째를 저의 후사로 정해주시오
但以遷延尙未定 (단이천연상미정) 다만 미루다가 정하지 못하기도 했지만
又有一念待後日 (우유일렴대후일) 또 한가지 생각이 있어 기다렸다오
同壻成公有子女 (동서성공유자녀) 저의 동서 성공이 좋은 자녀 두었기에
兩家相合尤有益 (양가상합우유익) 양가의 결합이 더욱 좋다고 여겼지요
成之長女生己亥 (성지장녀생기해) 성공의 큰딸 기해년에 태어났고
兄胤弟三年相若 (형윤제삼년상약) 형의 셋째도 나이 서로 비슷하기에
幸得成婚爲一家 (행득성혼위일가) 다행이 성혼 시켜 한 집안이 되면
乃定継後依禮法 (내정계후의예법) 절차 따라 후사로 삼으려했다오
夫妻所託俱可恃 (부처소탁구가시) 제 부부의 이 소원 이루어지면
死生庶免爲窮獨 (사생서면위궁독) 사생 간에 쓰라린 고독 위로되겠지만
萬一子女或不幸 (만일자녀혹불행) 혹 이들 자녀가 불행해지거나
兩家情志或乖刺 (양가정지혹괴자) 양가의 정의가 어기어지면
末遂吾計尤罔極 (말수오계우망극) 저의 이 뜻 어긋나면 더욱 망극해
若此罔極復何言 (약차망극복하언) 이런 망극이야 어찌 다시 말하겠오
當以第二爲我續 (저차제이위아속) 아예 둘째를 저의 후사로 정해주오
臨分情緖非亂投 (임분정서비난투) 사별에 인 했다고 광언이 아니요
此志已定非今日 (차지이정비금일) 이 뜻은 정한지 이미 오래라오
見我死生長與短 (견아사생장여단) 이 생명 장단을 점칠 수 없어
用此一律爲面目 (용차일율위면목) 이러한 방식으로 인사를 대신하오
行忙不得告緖般 (행망불득고서반) 길 바빠 낱낱이 말씀드릴 수 없으니
文不成章信禿筆 (문불성장신독필) 되지 못한 글 졸작이 틀림없구려
行人弟䃴 (행인제저) 떠나는 아우 저
1545(명종 1)년에 일어난 사화(士禍).
중종의 계비인 문정왕후의 동생인 윤원형(尹元衡)의 소윤 계열이,
인종의 외숙이며 대윤(大尹)의 거두인 중종의 비 장경왕후의 오빠인
윤임(尹任) 일파를 몰아내는 과정에서
대윤파에 가담했던 사림(士林)이 크게 화를 입었다.
1512년(중종7)~1547년(명종2)
1545년(명종 즉위년) 을사사화에 관련되어 관직을 삭탈당하고 삼수에 유배되었으며
1546년 사사되고 가산과 처자도 적몰되었다.
1567년 선조 즉위 후 복권문제가 논의되다가
1570년(선조3)에 다른 10여 명과 함께 복권되었다.
정조 때 이조판서에 추증되며, 충민(忠愍)의 시호가 내려졌다.
충민공 김저(忠愍公 金䃴) 묘소후경
충민공 김저(忠愍公 金䃴) 신도비
증 자헌대부 호조판서 행 별제 김중경(金重慶)
贈資憲大夫戶曹判書 行別提慶州金公諱重慶之墓 配貞夫人全州李氏雙墳
증자헌대부호조판서 행별제경주김공휘중경지묘 배정부인전주이씨쌍분
별제 김중경 묘소후경
//경주김씨 문간공 십청헌 김세필(文簡公 十淸軒 金世弼)가계//
고조부 상촌 김자수(桑村 金自粹),
증조부 평양소윤 추은 김근(平壤少尹 秋隱 金根)
할아버지 공평공 퇴재 김영유(恭平公 退齊 金永濡)대사헌 황해도관찰사 원종공신
아버지 충주목사 김훈(金薰) 충주목사
어머니 증 정부인 진천송씨, 군수 송학(宋翯)의 따님
형님 김원필(金元弼) ===========음성군 감곡면 주천리
문간공 십청헌 김세필(文簡公 十淸軒 金世弼), 증 이조판서
배위 정부인 고성이씨, 부사 이탁(李鐸)의 따님
장남 김숙(金䃤) 종사랑 ============= 음성군 생극면 임곡리
차남 김구(金石瞿), (金忂) 사직서참봉, 증 승정원좌승지 +
배위 증 숙부인고령박씨, 수찬 박은(朴誾)의 따님. 無后
배위 증 숙부인남원양씨, 예조좌랑 양준(楊俊)의 따님, 3남 1녀
배위 고령박씨
손자 김원경(金元慶) 종사랑
손자 김중경(金重慶), 별좌, 증 호조판서 出系 숙부 김저(金䃴)
손자 김선경(金善慶), 군자감 판관, 증 호조참판
삼남 충민공 김저(忠民公 金䃴), 사헌부 지평, 증 이조판서
배위 정부인 고령신씨, 부사 신수(申洙)의 따님, 無後
손자 김중경(金重慶), 별제 증 호조판서 생부 김구(金石+瞿)
배위 정부인 전주이씨, 보성군 이만년(寶城君 李萬年)의 따님
증손자 김물(金岉), 전한 증 판서
현손 김득곤(金得坤), 통덕랑
5대손 김정현(金鼎鉉)
현손 김정곤(金挺坤) 出系 종숙부 김윤(金崙)
현손 김장곤(金長坤) 통덕랑
증손자 김흘(金屹) 관찰사 증 참판
현손 김기곤(金起坤)
현손 김차곤(金次坤)
증손자 남곡 김의(南谷 金嶷), 공조정랑 증 참의
배위 의령남씨, 찰방 남대하(南大河)의 따님
현손 김진곤(金振坤) 지평
현손 김약곤(金躍坤) 증 대사헌
현손 김우곤(金遇坤) 증 집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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