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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인-무숙공 오백당 이주국장군 武肅公 梧栢堂 李柱國將軍

구름에 달

by 碧巖 2020. 8. 26. 22: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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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숙공 오백당 이주국장군 武肅公 梧栢堂 李柱國將軍

용인시 향토유적 제4

경기도 용인시 처인구 원삼면 문촌리 산35-1

무숙공 오백당 이주국장군 武肅公 梧栢堂 李柱國將軍

1721년~1798년

충청도수군절제사, 함경북도절도사, 황해도 병마절도사, 어영대장, 훈련대장

본관은 전주(全州). 字는 군언(君彦), 號는 오백당(梧栢堂).

정종의 서자인 덕천군(德泉君)의 후손으로,

아버지는 증 호조참판 이함(李)이며, 어머니는 능성구씨로 증 찬성 구상정(具尙禎)의 딸이다.

 

1740년(영조16) 무과에 급제, 이듬 해 선전관에 임명된 뒤 훈련원주부·판관 등을 지냈다.

1748년 통신사를 따라 일본에 갔다온 뒤 호조좌랑에 임명되니 이 때 처음 호조에 무랑(武郎)이 설치되었다.

1754년 충청도수군절제사, 이듬 해 경상우도병마절도사,

1759년 함경북도절도사가 되었다.

1762년 장헌세자(莊獻世子) 장례 때 여사대장(輿士大將)을 역임하고,

1773년 황해도·평안도 병마절도사가 되었다.

이 때 남당(南塘)에 성을 쌓는데 모두가 흙으로 쌓자고 했으나, 이곳은 땅이 습지보다 낮으므로 돌로 쌓아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1776년 총융사에 임명되었으며, 이 해 영조의 장례식이 있자 훈련원도정으로 여사대장이 되었다.

그러나 여사군이 소란을 피워 기율을 바로잡지 못한 죄로 파직되고,

다시 총융사에 보직되었다가 군량미를 비축하지 못한 죄로 파직되었다.

1778년(정조 2) 다시 복직되어 평안도병마절도사가 되고,

1780년 어영대장을 거쳐 이듬 해 좌·우포도대장을 역임하였다.

1782년 북한평창(北漢平倉)의 군량미 보관 소홀로 총융사에서 삭직되었으나, 곧 복직해 형조판서를 지냈다.

 

1796년 훈련대장을 사직하면서 군제삼사(軍制三事)를 올렸다.

내용은

첫째 번상(番上)으로 인한 경비의 낭비와 폐단을 고려해 어영청·금위영의 군자(軍資)로써 경군민(京軍民)을 모병해 충원할 것,

둘째 궁궐 순찰을 위해 50칸에 1군포(軍鋪), 1군포에 군 4인을 두어 수직(守直)할 것,

셋째 수군과 육군의 지역 배치를 고려할 것 등이다.

 

성품은 강직해서 아첨하지 않아 남과 반목한 때가 많았고, 여러 번 문신의 횡포를 감수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홍국영(洪國榮)이 실세한 뒤 정조의 두터운 신임을 받고, 성도·궁성 호위의 임무가 주어졌다.

춘당대(春塘臺)에서 활쏘기할 때의 모습이 마치 추운 겨울철에도 잎이 푸른 소나무와 측백나무 같다고 하여

정조가 오백이라는 당호를 하사하였다. 시호는 무숙(武肅)이다.

 

 

꿩 덕에 출세한 이주국李柱國

오백당 이주국(梧栢堂 李柱國)은 용인 태생으로 일찍이 무과에 급제했으나,

내외종간이던 당시의 세도가 구선복의 미움을 받아 벼슬길이 막혀 있었다.

영조 말년에 이주국은 서울 삼청동 뒷산에서 벌터질(활에 살을 먹이지 않고 시위만 잡아당겨 쏘는 연습을 하는 것)을 하고 있었다.

이때 장끼 한 마리가 푸드덕 치솟아 오르므로 잽싸게 살을 먹여 쏘았더니 어느 대갓집 후원으로 떨어졌다.

           그 집은 바로 영조의 사돈이며 장헌세자의 장인이 되는 익익재 홍봉한(翼翼齋 洪鳳漢)의 집이었다.

이를 알 까닭이 없는 이주국은 그 집 솟을대문 앞으로 가서 하인을 불러내어,

여보게 내가 뒷산에서 꿩을 쏘았는데 이 댁 후원으로 떨어졌으니 꿩일랑 자네가 갖고 화살이나 찾아주게.” 하고 점잖게 말했다.

하인은 꾀죄죄한 차림의 애송이가 와서 깎듯이 허게를 쓰니 비위가 거슬렸다.

 

감히 뉘댁 문전에 와서 누구를 오라 가라 하느냐는 생각에,

아무리 양반계층의 뼈다귀라고는 하더라도 지체 높은 대감댁 후광이 그만 못하랴는 방자스러운 생각에,

댁 같은 사람에게 맞아죽을 꿩도 있습디까? 그따위 꿩이라면 이 댁에 떨어지지도 않소!” 하고 문을 꽝 닫아 버렸다.

분통이 터진 이주국은 대문을 걷어차고 쫓아 들어가 놈을 번쩍 들어서 마당 한가운데로 던지면서,

이놈! 종놈 주제에 시키는 일이나 하면 되지 웬 놈의 잔소리가 그리 심하더냐!” 하고 꾸짖었다.

 

나가떨어진 하인은 애고 죽소.”라고 엄살을 떨었다.

그러자 그 집 하인들이 우르르 몰려나오고 왁자지껄 떠들었다. 결국 홍봉한까지 이 일을 알게 되었다.

이주국을 보니 행색은 초라했으나 듬직한 풍채며 점잖고 기품이 있어 보였다.

홍대감은 후원으로 들어가 꿩이 떨어졌는지 알아 오라고 했다.

오래지 않아 장끼 한 마리를 들고 나오는데 화살 한 대가 목을 꿰고 있었다.

이주국은 화살을 뽑으면서, “시생 화살을 찾았으니 꿩일랑 대감 식찬이나 하시지요.” 하면서 하직했다.

익익재 홍봉한(翼翼齋 洪鳳漢)은 이주국을 붙들며 한잔이나 하고 가라고 했다.

익익재 홍봉한(翼翼齋 洪鳳漢)은 이주국이 잡은 꿩으로 안주를 만들어 한 순배 돌렸다.

그동안 이주국의 됨됨이가 퍽 마음에 들자 홍대감은,

병판으로 있는 내 아우에게 단찰로 자네 초사 자리라도 알아보도록 할 테니 잠시 회답을 기다리면서 천천히 한 잔 더 하세.” 하고 권했다.

한참 후 홍대감은 녹사가 전해 온 회답을 보더니 다소 실망하는 기색으로,

여보게, 자네가 관복이 없는가 보이. 이번 도목(都目)에는 후보자 내정이 다 끝났다네.”라면서 안타까운 표정을 지었다.

 

그러자 이주국이 벌떡 일어나면서, “대감마님, 아까 잡수신 꿩값을 주셔야겠습니다.” 하였다.

홍대감이 기가 막힌 표정으로,

내가 청하지도 않은 꿩을 호의로 주고, 또 자네와 함께 먹은 것인데 지금 와서 그 값을 내라는 말인가?” 하고 묻자,

그때는 그랬지만 지금은 다릅니다. 어서 주십시오!” 한다.

화가 난 홍대감은, “꼴도 보기 싫으니 이자가 달라는 대로 줘서 보내라.”고 녹사에게 소리쳤다.

이주국은 천연덕스럽게 돈을 받으면서, “이만하면 돼지 한 마리는 사겠군.” 하면서 사라졌다.

이튿날 이주국은 아내에게, “여보, 오늘쯤은 초사가 되었을 테니 천릭을 내놓으시요.” 하였다.

아니나다를까, 이튿날 기별(奇別: 관보)가을파진권관 이주국(加乙波鎭權官 李柱國)’이라는 보직이 주어졌다.

이주국은 즉시 홍대감 댁으로 달려갔다.

하인들이 핑계를 대며 따돌리자 이주국은 칼을 빼들고 대감을 만나지 못하면 이곳에서 자결을 하겠다며 으름장을 놓아 홍대감을 만날 수 있었다.

홍대감은 몹시 언짢은 기색으로, “자네 어제 꿩값은 받아 가지 않았는가?”라고 말했다.

 

그러자 이주국은 눈물을 흘리면서, “소생이 염치를 모르기로 어찌 대감과 함께 먹은 꿩값을 받겠습니까?

어제 대감께서 소생을 천거하셨으나,

계씨 대감께서 듣지 않았으니 이번 기회가 아니면 벼슬길에 나아갈 수 없다는 생각에 꾀를 냈습니다.

우정 대감을 노엽게 하면 계씨 대감께 향후에라도 아까 천거했던 이주국이라는 사람을 쓰지 말라고 분부하실 것으로 생각했으며,

또 계씨 대감께서는 형님의 분부를 거역한 것이 노여워 서찰까지 보내신 것이라 생각하시게 될 테고,

필시는 시생을 기용할 것이라 짐작하여 그리하였으니 너그러이 선처를 베풀어 주십시오.”라고 말했다.

 

익익재 홍봉한(翼翼齋 洪鳳漢), 이주국의 말을 듣고 보니 자신이 그러했고, 틀림없이 그런 결과가 나타난 것에 놀랐다.

홍대감은, “그럴 테지, 그렇고 말고. 처음부터 자네의 사람됨이 소인배 같지는 않았거든. 내가 한 수 졌으니 한잔 내겠네.” 하였다.

그 후, 십 년이 지나는 동안 이주국의 벼슬은 정2품까지 올랐으며,

홍대감의 지극한 신임을 받았을 뿐만 아니라 정조로부터도 두터운 총애를 받았다.

오백당이란 당호는 대궐 춘당대에서 활쏘기를 할 때 위풍당당한 그의 풍모를 보고 정조가 친히 내려준 것이다.

낙향 후 우거했던 생가가 용인시 원삼면 문촌리에 전하고 있으며, 그의 묘역이 원삼면 문촌리에 전해 오고 있다.

<디지털용인문화대전에서>

有明朝鮮崇政大夫行刑曹判書 同知義禁府事五衛都摠府都摠管 知訓鍊院事贈諡武肅李公柱國之墓 配貞夫人南陽洪氏祔左

유명조선숭정대부행형조판서 동지의금부사오위도총부도총관 지훈련원사증시무숙이공주국지묘 배정부인남양홍씨부좌

무숙공 오백당 이주국장군(武肅公 梧栢堂 李柱國將軍) 묘소후경

 

 

 

무숙공 오백당 이주국장군 신도비

崇政大夫行刑曹判書李公神道碑銘

숭정대부행형조판서이공신도비명

崇政大夫義禁府左贊成兼世子二師 宋煥箕 撰

숭정대부의금부좌찬성겸세자이사 송환기 찬

杞溪兪漢芝 篆 기계유한지 전

曾孫 載毅 謹書 증손 재의 근서

龍仁 李柱國將軍 古宅 용인 이주국장군 고택

경기도 문화재자료 제96

경기도 용인시 처인구 원삼면 문촌리 414-4

//무숙공 오백당 이주국(武肅公 梧栢堂 李柱國) 가계//

   11대조 정종 10째왕자 덕천군 이후생(德泉君 李厚生)

   고조부 이상경(李尙敬), 통제사

   증조부 이번(李蕃), 증 좌승지

할아버지 이도명(李道明)증 좌참찬, 증 호조참판

   아버지 이함(李涵), 증 좌찬성

   어머니 증 정부인 능성구씨, 증 찬성 구상정(具尙禎)의 따님

            무숙공 오백당 이주국(武肅公 梧栢堂 李柱國)

            배위 정부인 남양홍씨, 학생 홍계상(洪繼相)의 따님

                  자 이현(李炫)

                        손자 이응오(李應五), 진사

                              증손자 이재의(李載毅) 진사,

                                        이재홍(李載弘) 수사 선전관

                                        이재관(李載寬) 통덕랑,

                                        이재형(李載亨) 병사,

                                        이재기(李載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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