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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성-시종원시어 김연방(侍從院侍御 金然昉),독립유공자, 형조판서 김영(金煐),

구름에 달

by 碧巖 2021. 5. 19. 22: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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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종원시어 김연방(侍從院侍御 金然昉), 독립유공자

경기도 화성시 우정읍 화산리 96-1

 

雙槐齋쌍괴재

三一獨立運動殉國志士追慕碑

삼일독립운동순국지사추모비

 

資憲大夫刑曹判書 兼五衛都摠府都摠管訓鍊院事 海豊金公諱煐之墓 貞夫人密陽朴氏祔左

자헌대부형조판서  겸오위도총부도총관훈련원사  해풍김공휘영지묘  정부인밀양박씨부좌

 

2019년 11월 5일 제166대 통제사 김영 각암비 복원기념 제막식

焦爛殘氓 賴公尊安   불에 다친 쇠약한 백성들이 공에게 힘입어서 편안하게 되었다.

憂殷減撤 惠周飢寒   근심 걱정을 감해주고 골고루 미친 은혜로 굶주림과 추위를 면했도다.

千間大庇 一時肯搆   천 칸의 큰 집들이 일시에 지어지니

已經劫燼 按堵如舊   이미 큰 화재를 지나 안도하기 옛날과 같도다.

 

純祖二十九年己丑公爲統制使

松亭洞民失火延燒海送亭抗北瓦洞人家數百戶盡成焦土

公許給南北山之松新造家屋矣

以松木濫伐事直指使啓請罷職

四洞之民刻公之功德於巖石

在曙町貞梁里之界海濱也此巖卽

公之杖劍立於其上指揮軍民而

屢日鎭火之巖也

翌年庚寅刻

순조 29년 기축년(1829)에 공이 통제사가 되었으나

송정동민의 실수로 불이나 해송정, 항복, 와동의 인가 수백호가 초토화 되었다.

공이 남쪽과 북쪽의 산에 소나무 벌채를 허락, 집을 새로 짓게 해주었다.

하지만 이 소나무를 남벌한 일 때문에 직지사가 임금님께 아뢰어 파직을 당했다.

이에 4개동의 백성들이 공의 은덕을 암석에 새겼다.

이 암석은 서정과 정량리의 경계 바닷가에 있었다.

이 바위는 공이 칼을 집고 그 위에 서서 군민을 지휘하여

여러 날 화재를 진화하던 바위다.

다음해인 경인년(1930)에 새겼다.

<통제사 김영 각암비문 統制使 金煐 刻巖碑文 전문>

 

 

 

출처 : 한산신문(http://www.hansannews.com)

김영화 기자 | 입력 2019.07.12 09:48|

 

국법을 어기고 남망산 소나무를 베어다 백성들 집을 짓게 한

166대 통제사 김영(1772-1850)의

통제사 김영 각암비석(統制使 金煐 角巖碑文)이 주민들의 힘으로 다시 세워졌다.

 

김영각암비복원사업추진위원회(위원장 백현백)가 주최하고

해풍김씨대종회(회장 김진우)가 후원한 제166대 통제사 김영 각암비 복원기념 제막식이

지난 2019년 7월 5일 정량동 1339 일원에서 개최됐다.

 

이 자리에는 강석주 통영시장, 김미옥·김용안 시의원, 김영 통제사 후손 김진우 해풍김씨대종회장 및

종친회 회원, 정동배 한산대첩기념사업회 이사장, 양문석 더불어민주당 통영고성지역위원장,

허도명 한산신문 대표이사, 정량동 주민 50여 명이 참석, 제막식을 축하했다.

 

166대 김영 통제사는

1829년 지금의 정량동과 동호동의 경계인 덤바우골 인근 민가 수백호에 화재가 발생했을 때,

화재로 집을 잃은 주민들을 위해 남망산의 소나무를 베어 집을 지을 수 있게 했다.

하지만 김영 통제사는 금송령을 어긴 죄로 이듬해 파직을 당했다.

이에 주민들은 김영 통제사의 은덕을 기리기 위해 덤바우골 근처 바위에 새겼으나

세월이 흘러 이 각암비는 1970년대 동문고개 도로개설공사로 인해 멸실됐다.

通訓大夫侍從院侍御 海豊金公諱然昉之墓 淑人韓山李氏祔左

통훈대부시종원시어 해풍김공휘연방지묘 숙인한산이씨부좌

 

김연방(金然昉)은 화성시 우정면 화산리 일원동에서 태어났으며

고종 39년(1902)에 시종원 시어(侍御)로서 고종을 측근에서 보좌하였다.

1905년(고종42년) 을사늑약 때 낙향하여 교육 운동에 참여하고 3.1만세운동을 지원하였다.

김연방은 1919년 4월 13일 일본 헌병의 총탄에 순국하였고, 가옥은 모두 불탔다.

그의 묘역에는 ‘삼일독립운동순국추모비’를 세워져 있으며, 

정부는 2015년 건국 훈장 애국장을 수여하였다.

 

김연방 선생은 오백여년 간 화성에서 거주해 온

무반(武班) 명가(名家) 해풍김씨 남양쌍부파의 종손으로

일제의 우정·장안 독립만세운동에 대한 보복과정에서 배후자로 지목되어

일본인 상인으로 제암리 학살사건 당시 일본군대 안내 역할을 했던

사사카에 의해 4월13일 피살됐으며 그들의 만행으로 종가 99칸도 전소됐었다.

海豊金公諱昶圭之墓 孺人平康蔡氏祔左

해풍김공휘창규지묘 유인평강채씨부좌

 

石河海豊金公準圭頌功碑

석하해풍김공준규송공비

 

//해풍김씨 독립유공자 시종원시어 김연방(侍從院侍御 金然昉) 가계//

    7대조 병사 김수(金洙)

    6대조 함경도 병마절도사 김상옥(金相玉)

    5대조 형조판서 김영(金煐)

   고조부 삼도수군통제사 김한철(金翰喆)

   증조부 김현(金鉉)

할아버지 청어방어사 김태인(金泰麟)

   아버지 김능모(金能模)

            독립유공자 김연방(金然昉)

                  아들 김창규(金昶圭)

                         손자 김진세(金鎭世)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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