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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성-양곡사(暘谷祠), 문순공 남당 한원진(文純公 南塘 韓元震)

구름에 달

by 碧巖 2022. 6. 28. 23: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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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곡사(暘谷祠), 청주한씨 문순공 남당 한원진(文純公 南塘 韓元震)

충남 홍성군 서부면 홍남서로 131-31

홍성군 향토유적 제1호

 

 

양곡사(暘谷祠)

조선 후기 유학자인 

청주인  문순공 남당 한원진(文純公 南塘 韓元震, 1682~1751)의 영정을 모셔놓은 사당이다.

1772(영조 48)에 호서지방의 유생들이 양곡영건소를 세우기로 하고,

1773년 창건된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이후 200여 년이 지난 1985~1987년에 양곡사를 신축하고,

1988327일에 영정을 모시는 의식을 거행하였다.

양곡사에는 문순공 남당 한원진(文純公 南塘 韓元震, 1682~1751) 이외에도

은진인 운평 송능상(雲坪 宋能相, 1710~1758)

경주인 한간 김한록(寒澗 金漢祿, 1722~1790)의 위패가 모셔져 있다.

 

 

문순공 남당 한원진(文純公 南塘 韓元震,1682~1751)

조선 후기의 학자로 본관은 청주(淸州),

​자는 덕소(德昭), 호는 남당(南塘)이다.

세종 때 영의정을 지낸 문강공 신재 한상경(文簡公 信齋 韓尙敬)의 후손으로

부친은 통덕랑 한유기(韓有箕)이며, 어머니는 공인 함양박씨로 도정 박숭부(朴崇阜)의 따님이다.

한원진은 재주가 뛰어나고 사리에 밝아 성리학에 대하여 정확하고 깊이있는 지식을 가졌고,

율곡 이이(栗谷 李珥). 우암 송시열(尤庵 宋時烈). 수암 권상하(遂菴 權尙夏)로 이어지는

기호학통을 계승하여 강문팔학사(江門八學士)의 대표가 되었다.

호락논쟁(湖洛論爭)에서 호론(湖論)인 인물성이론(人物性異論)을 주장한 인물이다.

정종 때 이조판서에 추증되었으며,

시호는 문순(文純)이다. 저서로는 남당집 38권이 있다.

 

//청주한씨 문순공 남당 한원진(文純公 南塘 韓元震) 가계//

  9대조 좌찬성 문정공 한계희(文靖公 韓繼禧)

  8대조 상의원별좌 한사개(韓士介

  7대조 예조참판 한윤창(韓胤昌)

  6대조 사포서별제 한극공(韓克恭)

  5대조 이조참판 한천뢰(韓天賚)

고조부 통덕랑 한효삼(韓孝參)

증조부 첨지공 청절 한필적(淸節 韓必迪)

   조부 청산현감 백탄 한여익(白灘 韓如益)

   부친 통덕랑 근수당 한유기(勤修堂 韓有箕)

   모친 공인 함양박씨, 도정 박숭부(朴崇阜)의 따님

           형님 통선랑 한태진(韓泰震)

           동생 통덕랑 한계진(韓啓震)

           문순공 남당 한원진(文純公 南塘 韓元震,1682~1751)

                       장남 우산 한후은(牛山 韓後殷)

                                   손자 한현세(韓顯世)

                       차남 한후종(韓後宗)

                       삼남 현감 두산 한후현(杜山 韓後賢)

은진송씨 운평 송능상(雲坪 宋能相, 1710~1758), 동해자 송능상(東海子 宋能相)

조선 후기의 학자로 본관은 은진(恩津), 자는 사능(士能), 호는 운평(雲坪), 또는 동해자(東海子)이다

증조부가 우암 송시열(尤庵 宋時烈)이며, 부친 감역 송한원(宋漢源)이며 모친은 윤씨로 도정 윤홍(尹泓)의 따님이다.

인물성 동이논쟁(人物性 同異論爭)에서는 스승인 남당 한원진(南塘 韓元震)의 인물성이론(人物性異論)을 지지하였다.

1739년(영조 15) 5월 송인명(宋寅明)이 왕세자를 가르칠 적합한 인물로 다섯명을 천거하였는데

그 중 한 명에 들어 시강원자의가 되었다.

1740년 3월 춘추의리를 강조하여 원수를 갚고 치욕을 씻는 의리를 논하였다.

1744년 이후 여러차례 장령에 임명되었다. 「주역」을 깊이 연구하였고, 경학. 예학에 조예가 깊었다.

1754년과 1755년 두 차례 집의에 임명되었으며,

1758년 묘향산에 들어가서 『대학』을 강론하다가 객사하였다. 자품이 고매하고 규모가 정대하였다고 한다.

경학·예학 등에 밝았다. 저서로는 『운평문집(雲坪文集)』이 있다.

 

경주김씨 한간 김한록(寒澗 金漢祿, 1722~1790)

조선 후기의 문신으로 본관은 경주(慶州), 자는 여수(汝綬), 호는 한간(寒澗)이다. ​

할아버지는 증좌찬성 김두광(金斗光)이고 아버지는 현감 김운경(金運慶)이며, ​

영조의 장인인 오흥부원군 충헌공 김한구(忠憲公 金漢耉)의 종제이다.

남당 한원진(南塘 韓元震)에게 학문을 배우고 기호학통의 상징인 주서​(朱書)와 옥척(玉尺)을 전수받았다.

산림(山林) 정치 이론가이며, 노론 벽파의 영수로 활동하였다.

1806년(순조 6) 벼슬과 품계가 없어졌다가 1864년(고종 1) 왕명으로 벼슬이 회복되었다.

 

우의정 김관주(金觀柱)의 아버지이며, 남당 한원진(南塘 韓元震)의 문인이다.

종질녀가 영조의 계비인 정순왕후(貞純王后)가 되자 그 후광을 업고 중앙의 명사들과 교유하고

노론벽파(老論僻派)의 당론을 조종하는 등 당쟁에 깊이 관여하였다.

관직은 세자익위사세마(世子翊衛司洗馬)에 그쳤으나,

종질로 공조참판을 지낸 김구주(金龜柱)와 함께

하계 김상로(霞溪 金尙魯), 담와 홍계희(淡窩 洪啓禧), 남애 정휘량(南崖 鄭翬良), 신만(申晩) 등 벽파 대신들을 조종하여 1762년(영조 38) 사도세자(思悼世子)의 허물을 들추어내어 죽게 하였다.

이어서 벽파(僻派)가 더욱 득세하자 시파(時派)의 핵심인물인

익정공 익익재 홍봉한(翼靖公 翼翼齋 洪鳳漢)을 탄핵하여 관직에서 물러나게 하고,

왕세손(뒤의 정조)까지 해치려 하였으나 뜻을 이루지 못하였다.

죽은 뒤 그의 죄에 대한 추율안(追律案)이 비등하여져,

1806년(순조 6) 영의정인 정수재 이병모(靜修齋 李秉模) 등 3대신의 소청에 따라

그의 아들, 조카에 이르기까지 유배형에 처해져 삭탈관직 되었다가

1864년(고종 1) 왕명으로 벼슬이 회복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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