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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창-덕천서원(德泉書院), 금성대군 정민공 이유(錦城大君 貞愍公 李瑜), 충장공 대전 이보흠(忠莊公 大田 李甫欽)

구름에 달

by 碧巖 2022. 8. 22. 22: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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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창 덕천서원(德泉書院)

경남 거창군 거창읍 장팔길 594

 

덕천서원 유래

본 서원은 조선 단종조(端宗朝) 충신인 금성대군 정민공 이유(錦城大君 貞愍公 李瑜, 1426~1457)와,

영천이씨 충장공 대전 이보흠(忠莊公 大田 李甫欽, ? ~1457) 선생의 봉안지소(奉安之所)이다.

금성대군은 세종의 6남으로 단종이 폐위되어 영월에 안치(安置)되고 대군은 순흥에 안치되었을 때

순흥부사인 대전 이보흠(大田 李甫欽)과 단종의 복위를 논의하다가 체포되어

1457년 세조2년 10월 21일에 사사되었다.

1738년 영조14년에 금성대군과 함께

대전 이보흠(大田 李甫欽) 선생도 복권되어 자헌대부 이조판서겸 오위도총부도총관으로 증직되었다.

1791년 정조15년에 이보흠은 충장(忠莊)의 시호를 받고,

순흥신단(順興神壇), 금성단(錦城壇), 청안 죽계서원(淸安 竹溪書院), 장릉(莊陵),

충신단(忠臣壇),공주 숙모전(肅慕殿)에  금성대군 이유(錦城大君 李瑜)와 같이 봉안되었으며,

이보흠 대전실기 목판 및 교지(李甫欽 大田實記 木版 및 敎旨)는

경상남도 유형문화재 제246호로 지정되어 거창박물관에 전시되고 있다.

충장공 대전 이보흠(忠莊公 大田 李甫欽)선생의 후손인

영천이씨 호산 이학두(湖山 李學斗)가

선조를 기리려 1만여평의 넓은 당에 사비를 들여 건립하여 유지하고 있다.

 

貞愍公錦城大君紀念塔                                     忠莊公大田李先生紀念塔

정민공금성대군기념탑                                      충장공대전이선생기념탑

 

대앙정(大仰亭)

금성대군정민공사적비(錦城大君貞愍公事蹟碑)

 

금성대군 정민공 승은정 이유(錦城大君 貞愍公 承恩亭 李瑜, 1426.5.5.~1457.11.7.)

조선 전기의 왕자이자 왕족 종실이며 문신, 무신, 군인, 정치가이다.

휘는 유(瑜), 호는 승은정(承恩亭), 본관은 전주(全州), 시호는 정민(貞愍)이다.

세종의 여섯째 아들로, 어머니는 소헌왕후(昭憲王后) 심씨이며, 단종(端宗)의 숙부이다.

1433년(세종15) 금성대군(錦城大君)에 봉해지고,

1437년 태조의 여덟번째 아들인 방석(芳碩)의 후사가 되었다.

 

1452년 어린 조카인 단종(端宗)이 즉위하자

형인 수양대군 이유(首陽大君 李瑈)와 함께 좌우에서 보필할 것을 약속했다.

그러나 수양대군이 정권탈취의 야심을 가지고 절제 김종서(節齋 金宗瑞, 1383~1453)등을 제거하자,

금성대군(錦城大君)은 형 수양대군(首陽大君)의 행동에 반대했다.

1455년(단종3) 모반혐의로 삭녕에 유배되었고, 다시 광주로 옮겨졌다.

1456년(세조2) 사육신의 단종복위운동이 실패하자,

이에 연루되어 경상도 순흥으로 유배지가 옮겨졌다.

순흥에서 순흥부사 이보흠(李甫欽)과 함께 고을 군사와 향리를 모으고

도내의 사족들에게 격문을 돌려서 의병을 일으켜 단종복위를 계획했으나,

거사 전에 관노의 고발로 실패하여 반역죄로 유배되었고 결국 세조는 사약을 보내 그를 사사한다.

그 때가 1457년(세조 3년) 음력 10월 21일로, 당시 그의 나이 32세였다.

1457년 11월 18일 그의 자손들은

단종과 단종복위운동에 가담했던 세종의 왕자 한남군 정도공 이어(漢南君 貞悼公 李𤥽)

영풍군 이전(永豊君 李瑔) 등의 자손들과 함께 종친록, 유부록 등에서 모두 삭제되었다.

 

금성대군의 묘소를 찾던 순흥부의 주민들은 금성대군이 사약을 받고 사사된 곳에서

그의 혈흔이 묻은 돌을 발견하고 주변에 단을 쌓고 제사를 지냈다. 이를 금성단(錦城壇)이라 한다.

그가 한때 머물렀던 충청북도 진천군 초평면 용기리 416번지에도 그의 사당이 세워졌다.

충청북도 청원군 미원면 대신리에는 증손자 홍양부정 이의(洪陽副正 李義)가

증조모인 완산부부인 전주최씨의 묘소를 이장한 뒤,

그 옆에 그의 가묘를 만들고, 근처에 그의 신도비가 세워졌다.

 

1519년(중종 14)

금성대군 승은정 이유(錦城大君 承恩亭 李瑜)의 증손자 홍양부정 이의(洪陽副正 李義)가

대궐 문앞에 짚자리를 깔고 3개월간 궐문 주변에서 금성대군의 억울함을 큰소리로 부르짖었다.

이때 중종에게 경전을 강의하던 모재 김안국(慕齋 金安國)이 중종에게 아뢰기를

"금성대군은 왕조의 가까운 친척인데

사죄(赦罪)하지 않아서 그 자손들이 아직도 그 죄목에 묶여있으니

너그럽게 용서하여 주십시요”라고 청하여 중종의 마음을 움직여 노비에서 해방시켰다.

이때 작위를 박탈당한 장자 화원군 이맹한(花原君 李孟漢)은

1519년(중종14년)에 특명으로 함종군(咸種君)에 봉작되고

손자 이연장(李連長)은 동평군(東平君)에 추증되었으며,

증손자인 이인(李仁), 이의(李義), 이례(李禮) 3형제에게는

덕양부정, 홍양부정, 청리부정의 작위가 하사되었다.

이후 금성대군의 관작이 숙종조에 들어 복구되고

1738년(영조 14)에 정민(貞愍)의 시호가 내려지며 신원되었다.

정조 때에는 그의 자손들이 종친으로써 대접을 받아 제사를 지낼 수 있게 되었다.

진천 청당사(靑塘祠), 순흥 도계서원(道溪書院), 영월 창절사, 순흥 성인단, 청안 향사 등에 제향되었다.

//금성대군 정민공 승은정 이유(錦城大君 貞愍公 承恩亭 李瑜) 가계//

    조부 3대국왕 태종 이방원(太宗 李芳遠, 1367~1422)

    조모 원경왕후 민씨(元敬王后 閔氏, 1365~1420)

아버지 4대국왕 세종 이도(世宗 李祹 , 1397~1450)

어머니 소헌왕후 심씨(昭憲王后 沈氏, 1395~1446), 청천부원군 심온(沈溫)의 따님

             큰누나 정소공주(貞昭公主, 1412~1424)

             형님 5대국왕 문종 이향(文宗 李珦, 1414~1452)

                            조카 6대국왕 단종 이홍위(端宗 李弘暐, 1441~1457)

             작은누나 정의공주(貞懿公主, 1415~1477)

             형님 7대국왕 세조 수양대군 이유(世祖 首陽大君 李瑈), 1417~1468)

                            조카 추존왕 덕종 이숭 (德宗 李崇, 1438~1457)

                            조카 8대국왕 예종(睿宗 李晄, 1450~1469)

             형님 안평대군 이용(安平大君 李瑢, 1418~1453)

             형님 처조카사위 임영대군 이구(臨瀛大君 李璆, 1419~1469)

             형님 광평대군 장의공 이여(廣平大君 章懿公 李 璵, 1425~1444)

             동생 평원대군 이임(平原大君 李琳, 1427~ 1445)

             동생 영응대군 이염(永膺大君 李琰, 1434~ 1467)

             금성대군 정민공 승은정 이유(錦城大君 貞愍公 承恩亭 李瑜, 1426~1457)

             배위 완산부부인 전주최씨, 참판 최사강(崔士康, 1388~1443)의 따님

                            장남 화원군 이맹한(花原君 李孟漢, 또는 함종군 이맹한, 1455~1529)

                                       손자 동평군 이연장(東平君 李連長)

                                                     증손자 덕천군 이인(德川君 李仁)

                                                     증손자 홍양부정 이의(洪陽副正 李義)

                                                     증손자 청리부정 이례(靑里副正 李禮)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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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충장공대전이선생신도비(忠莊公大田李先生神道碑)

 

충장공 대전 이보흠(忠莊公 大田 李甫欽, ? ~1457)

본관은 영천(永川). 자는 경부(敬夫), 호는 대전(大田).

할아버지는 보문각 대제학을 지낸 충정공 남곡 이석지(忠貞公 南谷 李釋之)이고

아버지는 부사직 이현보(李玄寶)이다.

서산인 태재 유방선(泰齋 柳方善, 1388~1443)에게서 수학하고

1429년(세종11) 식년 문과에 병과로 급제한 뒤,

1430년 동부훈도관으로서 공법(貢法)의 논의에 참여해 전제(田制)와 세법을 상론하였다.

1434년에 사정으로서

우효강(禹孝剛)과 김순(金淳) 등의 문사와 함께 『자치통감훈의(資治通鑑訓義)』 찬수에 참여하였다.

집현전박사를 거쳐서 1443년 감찰로서 사은사의 서장관으로 명나라에 다녀온 뒤 성균주부가 되었다.

1445년에는 외직을 맡을 때의 경험 등을 토대로 사창법(社倉法)에 관한 건의를 하여

사창 제도에 많은 관심을 갖고 있던 세자(뒤의 문종)의 총애를 받았다.

 

1448년 지함양군사의 외직을 맡고 있던 중 사창 제도를 시행하려는

세자의 뜻에 따라 지대구군사로 옮겨 최초로 사창법을 시험적으로 실시하였다.

1452년(문종2) 장령에 초배(超拜)되었고,

1454년(단종2) 직예문관으로서 『세종실록』 편수의 기주관이 되었다.

수양대군이 단종(端宗)을 몰아낸 이후에는 지순흥군사(知順興郡事)로 보외(補外)되었다가,

1457년(세조3) 순흥에 유배중인 금성대군 이유(錦城大君 李瑜)와 함께 영남 사인들을 규합하여

단종 복위를 모의했다는 혐의를 받고 박천에 유배된 뒤 같은 해 10월에 교살되었다.

정조 때 복관되어 이조판서에 추증되었다.

충청도 청안(淸安)의 향사(鄕祠), 광주(光州)의 대치사(大峙祠), 순흥의 성인단(成仁壇),

영천의 송곡서원(松谷書院)에 제향되었다.

시호는 충장(忠莊)이다.

이보흠 대전실기 목판 및 교지(李甫欽 大田實記 木板 및 敎旨)는

경상남도 유형문화재 제246호로 목판은 총 87매이며 크기 30×45cm로 거창 박물관에 전시되어 있다.

 

//영천이씨 충장공 대전 이보흠(忠莊公 大田 李甫欽) 가계//
 8대조 영양군 이대영(李大榮)

 

고조부 위위시 판사 이송현(李松賢)
증조부 판도판서 이흡(李洽)
    조부 보문각 대제학 충정공 남곡 이석지(忠貞公 南谷 李釋之, 1328~1397)
    백부 팔도 관찰사 집현전 제학 참판 이안우(李安愚)
    중부 직제학 이안직(李安直)
    중부 서파 이안유(西坡 李安柔, 1374~1440)
                 이종손(李終孫) 단종복위도모 용인에서 상주로 피신
    중부 군기시부정 노전 이안실(老田 李安實)
    부친 부사직 이현보(李玄寶)
                동생 풍저창 부사 이보관(李甫款)
                충장공 대전 이보흠(忠莊公 大田 李甫欽, ? ~1457)
                           아들 이간인(李肝仁)
                                      손자 이근(李根), 이지(李枝), 이식(李植)

 


                                      17세손 석천 이병희(石川 李柄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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