절충장군 첨지중추부사 오위장 홍덕연(洪德演)
경기도 여주시 대신면 계림리 287-3
중추부사 홍덕연(洪德演, 1493년(성종24)∼1553년(명종8)
조선 중기 중종~명종 때 활동한 문신으로 자는 숙용(叔容)이다.
본관은 남양(南陽) 아버지는 성균관사성 홍이평(洪以平)이고,
어머니 광릉이씨(廣陵李氏)는 대사헌 이세필(李世弼)의 딸이다.
홍사석(洪師錫)의 현손이고, 모재(慕齋) 김안국(金安國)의 문인이다.
1524년(중종19) 32세로 별시문과 병과 급제 다음 종8품 승사랑(承仕郞)성균관 권지 학유에 보임되었다가
1525년(중종20) 실직(實職)으로 학유에 임명되었다.
성균관 유생들을 가르치는 사유(師儒)로서 강론(講論)을 잘하였으므로, 오랫동안 성균관에 봉직하였다.
1528년(중종23) 부친상을 당하여, 3년 상을 마친 다음 1530년(중종25) 성균관 학록에 임명되었다.
1532년(중종27) 성균관 학정을 거쳐, 1533년(중종28) 성균관 박사가 되었다.
1534년(중종29) 종5품상 봉직랑(奉直郞)성균관 전적으로 승진하였다가,
호조 좌랑과 병조 좌랑을 거쳐, 사간원 정언에 임명되었다.
1535년(중종30) 강원도도사(江原道都事)로 나갔는데,
이듬해 김안로(金安老)에게 빌붙어서
백성을 괴롭히는 주목(州牧) 한 사람을 파면하도록 강원도관찰사에게 권유하다가,
오히려 그 일당의 모함을 받아 파직되었다. 이후 여주(驪州)의 별장으로 돌아와 은거하였다.
김안로가 사사(賜死)된 이듬해인 1537년(중종32)에 병조 정랑에 기용되었다.
1539년(중종34) 봉상시 첨정, 사헌부 지평, 세자시강원 필선, 사헌부 장령을 역임하였다.
1540년(중종35) 성균관 사성이 되어 사헌부 장령을 겸임하였다.
이 해에 사은사(謝恩使)의 서장관(書狀官)에 임명되어 중국 명나라 북경(北京)에 다녀왔는데,
그의 행탁(行槖)에는 오직 서적뿐이었다고 한다.
1541년(중종36) 사섬시 정으로 있다가 상주목사(尙州牧使)가 되었다.
사섬시에 있을 때, 한강에서 얼음 뜨는 일을 감독하였는데,
겨울에 뜬 얼음이 여름에 녹아버려 품질(品秩)이 강등되었던 것이다.
1542년(중종37) 성균관 사예 · 사성을 역임하였고,
1543년(중종38) 사재감 정을 거쳐 삼척부사(三陟府使)로 나갔으며,
정3품하 통훈대부(通訓大夫)로 승품되었다. 그때 소갈병(消渴病)에 걸려 사임하고 여주로 돌아왔다.
1546년(명종1) 종부시정에 기용되었고, 1547년(명종2) 봉상시정으로 옮겼다.
1550년(명종5) 정3품상 통정대부(通政大夫)로 승품되어 영흥부사(永興府使)에 임명되었다.
여러 해 동안 흉년이 들어 굶주리고 있던 함경도 백성들을 구휼하기 위해
과감한 시책을 펴다가 함경도관찰사의 제지를 받고 돌아왔다. 이어 충무위상호군에 임명되었고,
1552년(명종7) 중추부 첨지사가 되었다.
1553년(명종8) 소갈병이 심해지자, 벼슬을 사임하고 가족과 여주에서 정양하다가 그 해에 졸 하였다.
홍덕연의 성품과 자질에 관해서는 다음과 같이 전한다.
그는 기억력이 뛰어났으며 의지와 기개가 너그럽고 컸다.
겉모양을 꾸미지 않았고, 시대에 따라 권력자에게 부앙(俯仰)하는 것을 좋아하지 않았다.
용문산(龍門山)에서 공부할 때에, 조광조(趙光祖)와 서로 뜻과 취향이 맞아 친밀하게 지냈다.
모재 김안국에게 “유자(儒者)는 도의(道義)를 먼저 닦아야 한다.”는 가르침을 듣고,
스스로 깨달아 학문의 목표를 수립하였다.
바깥으로 남을 흠모하여 이끌리지 않았으므로 그 학문과 인격을 인정하여 교제하는 사람은 적었다.
묘소는 경기도 여주군 고달산(高達山) 관동리(官洞里)의 언덕에 있는데,
퇴계(退溪)이황(李滉)이 지은 묘지명이 남아 있다.(『퇴계집(退溪集)』 권47)
부인 용인이씨(龍仁李氏)는 이사량(李思良)의 딸로 자녀는 5남 3녀를 두었다.
장남 홍인우(洪仁祐)는 생원으로서 퇴계이황의 문인이며,
손자 홍진(洪進)은 문과에 급제하여 이조 판서를 지냈고 당성부원군(唐城府院君)에 봉해졌다.
折衝將軍僉知中樞府事兼五衛將洪德演之墓 贈貞敬夫人龍仁李氏之墓
절충장군첨지중추부사겸오위장홍덕연지묘 증정경부인용인이씨지묘
중추부사 홍덕연(洪德演) 후경
당양부원군 명유 치재 홍인우(耻齋 洪仁祐)
贈領議政唐陽府院君 耻齋先生洪公之墓 贈情敬夫人順天金氏祔
증영의정당양부원군 치재선생홍공지묘 증정경부인순천김씨부
당양부원군 명유 치재 홍인우(耻齋 洪仁祐, 1515년(중종10)∼1554년(명종9)
조선 중기 중종~명종 때의 유일(遺逸). 자는 응길(應吉), 호는 치재(耻齋), 경재(敬齋)이다.
본관은 남양(南陽)이고, 주거지는 경기도 여주(驪州)이다.
아버지는 중추부첨지사 홍덕연(洪德演)이고, 어머니 용인이씨는 우후(虞候) 이사량(李思良)의 딸이다.
성균관사성 홍이평(洪以平)의 손자이고, 병조 참의 홍인서(洪仁恕)의 4촌이다.
동강(東岡)남언경(南彦經)의 처남이고, 화담(花潭)서경덕(徐敬德) · 퇴계(退溪)이황(李滉)의 문인이다.
1537년(중종32) 23세에사마시에 합격하였으며,
1539년(중종34) 관학(館學) 유생으로서 승(僧) 보우(普雨)의 일로 상소하는 데 참여하였다.
1540년(중종35) 아버지를 따라 개성에 갔다가 화담 서경덕(花潭 徐敬德, 1489-1546)을 방문하여 학문을 논하였고,
1542년(중종37) 노수신(盧守愼), 허충길(許忠吉), 강유선(康惟善), 권덕여(權德輿) 등과 함께
학문과 시사(時事)를 논하였다.
1544년(중종39) 삼각산(三角山)과 삼척(三陟) 등지를 유람하였고,
이듬해에는 동생 홍인지(洪仁祉)와 함께 두타산(頭陀山)을 유람하였으며,
1545년(인종1) 인종이 승하하자,
그는 초상 때에는 물만 마셨고, 성복(成服)하고 나서는 그 달 내내 소식(疏食)하였다.
1552년(명종7) 서울에서 퇴계 이황(退溪 李滉, 1501~1570)을 방문하여 학문을 논하였는데,
이듬해에는 이황이 찾아와 서경덕의 저술에 대하여 토론하기도 하였다.
홍인우는 초년에는 서경덕의 문하에, 만년에는 퇴계의 문하에 출입하였던 것이다.
1553년(명종8) 매부 남언경(南彦經, 1528~1594), 친구 허충길 등과 함께
금강산을 비롯한 관동 일대를 유람하고 「관동록(關東錄)」(일명 ‘관동일록’(關東日錄))을 지었다.
1553년(명종8) 아버지 홍덕연이 소갈병으로 벼슬을 사임하고 고향 여주에서 몸을 정양하다가 돌아가자,
효성이 지극했던 홍인우는 죽만 마시고 피눈물을 흘리면서 여막살이를 하다가
1554년(명종9) 11월 10일 40세의 나이로 여막에서 사망하였다.
그는 여막살이 중에도 이황의 당부에 따라 이황과 학문에 관련된 서간을 주고 받았다.
저서로는 『치재집(耻齋集)』 · 『치재일기(恥齋日記)』 등이 있다.
묘소는 경기도 여주 북쪽 대송리(大松里) 언덕에 있으며,
만전(晩全)홍가신(洪可臣)이 지은 비명이 남아 있다.(『만전집(晚全集)』 권5)
죽은 뒤에 당양부원군(唐陽府院君)영의정에 추증되었고, 여주의 기천서원(沂川書院)에 제향되었다.
부인 순천김씨는 군수 김희직(金希稷)의 딸인데, 자녀는 2남 2녀를 두었으니,
장남 홍진(洪進)은 문과에 급제하여 당흥부원군(唐興府院君)이조판서를 지냈고,
차남 홍적(洪迪)은 문과에 급제하여 사헌부 집의를 지냈다.
장녀는 제용감정 이경률(李景㟳)의 처가 되었고, 차녀는 사평 이문회(李文會)의 처가 되었다.
손자 홍진의 아들 홍여율(洪汝栗)은 퇴계 이황의 손자 이안도(李安道)의 사위로서 군수를 지냈고,
홍적의 아들 홍여량(洪汝亮)은 형조 정랑을 지냈다.
홍인우의 후손 중에는, 홍인우가 아버지 홍덕연의 상사를 다 치르지 못하고 죽은 것처럼
거상(居喪) 중에 여막살이를 하다가 죽은 이들이 있었다.
홍인우의 아들 홍적은 아버지 홍인우의 복제(服制)를 마치지 못하고 졸 하였고,
홍적의 손자 홍유부(洪有阜)도 아버지 홍여량의 상을 당하여
애통해 하다가 3년 상을 치르고 한달 후 졸하였다.(『청장관전서(靑莊館全書)』 권49)
당흥부원군 단민공 인재 홍진(端敏公 認齋 洪進)
당흥부원군 단민공 인재 홍진(端敏公 訒齋 洪進, 1541~1616)
본관은 남양(南陽), 자는 희고(希古), 호는 인재(訒齋), 퇴촌(退村)이다.
1541년(중종 35) 중종 때 유명한 성리학자 홍인우(洪仁祐)의 아들로 태어났다.
1564년(명종 19) 24세에 사마시에 합격하였고 1570년(선조 3) 30세에 식년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였다.
이후 관직에 나가 정자, 검열, 수찬, 응교 등을 지냈고
1589년(선조 22) 직제학으로 문사랑이 되어 정여립의 모반사건을 계기로 일어난 기축옥사를 다스렸다.
이어서 동부승지를 거쳐 좌·우승지를 역임하였다.
1592년(선조 25) 임진왜란이 일어나 왕을 호종할 때 왕이 요동으로 피난하려는 것을 반대하였다.
이듬해 한성부 판윤으로 승진하여 한양에서 전쟁 중에 굶주린 백성들의 진휼에 힘썼다.
1604년(선조 37) 호성공신 2등에 책록되었으며 당흥부원군(唐興府院君)에 봉해졌다.
이후 대사헌과 이조판서, 판의금부사를 지냈으며,
1609년(광해군1) 관상감 제조가 되었으나 북인이 정권을 잡자 사퇴하였다.
1616년(광해군 8) 12월에 죽었으며 . 사후에 영의정에 추증되었으며 시호는 단민(端敏)이다.
문집으로 『퇴촌유고(退村遺稿)』가 있으며,
인재 홍진 영정(認齋 洪進 影幀)은 경기도 유형문화재 제178호 이다.
忠勤貞亮効節協策扈聖功臣 唐興府院君 贈議政府領議政退村洪公之墓
충근정량효절협책호성공신 당흥부원군 증의정부영의정퇴촌홍공지묘
贈貞敬夫人坡平尹氏葬在朴氏墓左 貞敬夫人蔚山朴氏祔
증정경부인파평윤씨장재박씨묘좌 정경부인울산박씨부
당흥부원군 단민공 인재 홍진(端敏公 認齋 洪進) 묘소후경
당흥부원군 단민공 인재 홍진(端敏公 認齋 洪進)의 초배위 증 정경부인 파평윤씨,
군수 홍여울(洪汝栗)
공조정랑 홍유형(洪有炯)
進士工曹正郞安東判官贈左承旨南陽洪公有炯之墓 配淑夫人淸州慶氏
진사공조정랑안동판관증좌승지남양홍공유형지묘 배숙부인청주경씨
//남양홍씨 절충장군 첨지중추부사 홍덕연(洪德演) 가계//
고조부 지중추원사 장양공 홍사석(莊襄公 洪師錫)
증조부 사용 홍계연(洪季涓)
조부 상호군 홍귀손(洪貴孫)
아버지 성균관사성 대구부사 홍이평(洪以平)
어머니 광릉이씨(廣陵李氏) 대사헌 이세필(李世弼)의 따님
형님 생원 홍덕준(洪德濬)
동생 종묘서영 홍덕윤(洪德潤)
동생 직장 홍덕렴(洪德濂)
첨지중추부사 홍덕연(洪德演)
배위 증 정경부인 용인이씨, 우후 이사량(李思良)의 따님
장남 명유 치재 홍인우(耻齋 洪仁祐)
배위 증 정경부인 순천김씨, 청도군수 김희직(金希稷)의 따님
손자 당흥부원군 단민공 인재 홍진(端敏公 認齋 洪進)
배위 증 정경부인 파평윤씨, 증 이조판서윤응규(尹應奎)의 따님
배위 정경부인 울산박씨, 사온서영 박의남(朴宜男)의 따님
증손자 군수 홍여울(洪汝栗)
현손 첨정 홍유환(洪有煥)
현손 공조정랑 홍유형(洪有炯)
5대손 홍경증(洪景增)
5대손 홍경훈(洪景塤)
6대손 홍석구(洪錫九)
손자 사헌부집의 홍적(洪迪)
증손자 돈녕부도정 홍여익(洪汝翼), 안동인 효헌공 눌암 김찬(孝獻公 訥菴 金瓚)의 장인
증손자 형조정랑 홍여량(洪汝亮)
차남 교사관별좌 홍인지(洪仁祉)
삼남 홍인희(洪仁禧)
사남 홍인상(洪仁祥) 홍인례(洪仁禮)
2녀 공조참의 동강 남언경(東岡 南彦經)의 배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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