농암종택(聾巖宗宅)
경북 안동시 도산면 가송길 162-133(가송리 612)
효절공 농암 이현보(孝節公 聾巖 李賢輔, 1467~1555)
농암은 태어나서부터 재주가 뛰어나고 골상이 비범하였다.
특히 사냥을 좋아하고 학문에는 힘쓰지 않았는데,
19세에 향교에 가게 되어 이때부터 정진하여
20세에는 홍귀달(洪貴達)의 문하에 가서 수학했으며 특히 정주학(程朱學)에 뛰어났다.
29세에 생원시에 합격하고 32세에 문과에 급제, 교서관권지부정자(校書館權知副正字)에 제수된 이래
여러 관직을 거쳤으며, 36세에 사관으로서 탑전에 가까이 가서 사초를 쓸 수 있도록 해줄 것을 주청하여
연산군의 미움을 샀다. 38세에 대사헌 홍자아(洪自阿)의 진강(進講)이 착란(錯亂)되었다 하여
개차(改差)에 청했다가 금옥에 갇혔고, 안기역(安奇驛)에 유배되었다.
40세인 1506년 중종반정이 이루어져 성균관 전적(典籍)으로 환조(還朝),
42세에 어버이를 위해 외직을 빌어 영천군수가 되었다.
44세에 성친(省親), 명농당(明農堂)을 세웠으며, 46세에 농암 위에 애일당(愛日堂)을 건립하였다.
47세에 내직으로 옮기고 그 다음해에 밀양부사가 되었으며, 52세에 안동부사를 지냈고,
55세에 내직으로 옮겨다가 56세에 충주목사, 그 다음해에 성주목사가 되었다.
59세에 어버이가 늙었음을 들어 해관(解官) 귀향했으나 곧 입조하였고,
62세에 귀성했다가 곧 대구부사가 되었으며,
친노(親老)로 해직했는데, 그 이듬해에 평해군수, 이어 영천군수가 되었다.
65세에 어머니 상을 당하고 삼년을 시묘하고, 67세에 형조참의ㆍ홍문관 부제학을 거쳐
68세에 경주부윤, 70세에 벼슬을 버리고 귀향했으나 곧 경상도관찰사가 되었다.
71세에 아버지 상을 당하여, 시묘 중 부인상을 당했다.
73세에 형조ㆍ호조참판, 76세에 말미를 받아 귀향하니 이에 치사(致仕)가 이루어졌다.
이때부터 강호의 생활이 시작되었고, 77세에 영지정사(靈芝精舍)를 건립하였다.
또 지중추부사에 특제(特除)되어 사직소를 올렸으나 받아들여지지 않고,
자헌대부상호군(資憲大夫上護軍)이 되었으며 또 정헌(正憲), 숭정(崇政)의 가자(加資)를 받았다.
89세를 일기로 1555년 2월 13일에 이하니 시호는 효절(孝節)이다.
자혜애친(慈惠愛親) 자비롭고 은혜로우며 어버이를 사랑한 것을 효(孝)
호렴자극(好廉自克) 청렴한 것을 좋아하여 자신을 이긴 것을 절(節)
8남 1녀를 두었는데, 농암 생존 당시에
세 아들 이희량(李希樑), 이충량(李忠樑), 이계량(李季樑)이 각기 봉화와 안동과 의흥의 원님이었다.
금계(錦溪) 황준량(黃俊良)은 그 손서이고
시를 주고 받은 인물들로는
송재(松齋) 이우(李堣), 온계(溫溪) 이해(李瀣), 모재(慕齋) 김안국(金安國), 눌재(訥齋) 박상(朴祥)
호음(湖陰) 정사룡(鄭士龍), 신재(愼齋) 주세붕(周世鵬), 충재(沖齋) 권벌(權潑)
회재(晦齋) 이언적(李彦迪), 음애(陰崖) 이자(李耔), 관포(灌圃) 어득강(魚得江),
양곡(陽谷) 소세양(蘇世讓) 외 당대 명사 여러 사람이 있었으며,
특히 퇴계 이황(退溪 李滉)과 주고받은 시문이 많이 남아 있다.
효절공 농암 이현보(孝節公 聾巖 李賢輔, 1467~1555) 초상, 보물 제872호
농암선생고택(聾巖先生古宅)
농암종택은 농암선생이 태어나고 성장한 집이며, 직계자손들이 650여년을 대代를 이어 살아오고 있는 집이다.
최초 이 집을 지은 분은 영천이씨 안동입향시조 이헌(李軒)으로, 선생의 고조부로 군기시소윤 벼슬을 했다.
고려말 영천에서 서울로 내왕하다가 이곳 산수를 사랑하여 그대로 복거(卜居)하였다 하며,
자손들은 입향조 이헌(李軒)부터 24세손, 선생으로부터는 19세손까지 내려왔다고 한다.
농암선생이 ‘불천위(不遷位)’로 모셔졌기에 ‘농암종택’으로 부른다.
종택은 2,000여 평의 대지 위에 사당, 안채, 사랑채, 별채, 문간채로 구성된 본채와
긍구당, 명농당 등의 별당으로 구성되어 있다.
‘긍구당(肯構堂)’은 1370년 전후에 입향조 이헌(李軒)이 지은 건물이며,
‘명농당(明農堂)’은 1501년 농암선생 나이 44세 때 귀거래(歸去來)의 의지를 표방하고 지은 집으로,
벽 위에 ‘귀거래도(歸去來圖)’를 그렸다.
종택과 ‘분강촌(汾江村)’의 모습을 보여주는 그림은 여러 종류인데,
특히 1526년에 그린 ‘분천헌연도(汾川獻燕圖,보물 1202)’는 선생 당시의 풍광이 잘 나타나 있다.
바깥마당에 거목의 ‘홰나무(槐木)’가 있어 이를 ‘구인수(九印樹)’라 불렀다.
그 연유는 선생 당시 아들, 사위 등 9남매가 벼슬을 하여 수연(壽宴)을 하기 위해 모이면
이 나무에 그 인끈 9개가 걸렸기 때문이었다.
또 마당에는 ‘옥인석(玉印石)’, ‘금상석(金床石)’이라는 우아한 4각형의 단아한 바위가 있었고,
명농당 앞에는 ‘영금당(影襟塘)’이라는 아담한 연못도 있다.
그러니까 종택 건물 역시 ‘긍구당’과 같은 시기에 지어진 것으로 추정되니,
600년의 역사는 넘는 건물이라 할 수 있다.
1544년, 신재 주세붕(愼齊 周世鵬)선생이 청량산을 가던 도중에 선생을 예방했는데,
그때 선생과 농암종택을 묘사한 글이 있어 소개한다.
"농암을 분강(汾江)가로 찾아뵈오니, 공이 문밖까지 나와 맞이했다. 방에 들어가 바둑을 두니 곧 술상이 나왔다.
큰 여종은 거문고를 켜고, 작은 여종이 비파를 불면서 도연명의 ‘귀거래사’와 농암의 ‘귀전부’,
이하(李賀)의 ‘장진주사’와 소설당(蘇雪堂)의 ‘행화비렴산여춘’ 등을 노래했다.
공의 아들 이문량(李文樑)은 자(字)가 대성(大成)인데 모시고 있다가 ‘축수의 노래(壽曲)’를 불렀다.
나와 대성이 일어나 춤을 추니 공이 또한 일어나 춤을 추었다.
이때 공의 춘추 78 세로 내 아버지의 연세여서 더욱 감회가 깊었다.
공의 거처는 비록 협소했으나 좌우로 서책이 차 있으며, 마루 끝에는 화분이 나란히 놓여 있었다.
그리고 담 아래에는 화초가 심어져 있었고,
마당의 모래는 눈처럼 깨끗하여 그 쇄락함이 마치 신선의 집과 같았다.”
원문 “公所居殊隘 然左右圖書 堂前列置花盆 墻下植花草 庭沙如雪 灑然若入神仙宅也”
효절공 농암 이현보(孝節公 聾巖 李賢輔, 1467~1555) 선생은
영남사림(嶺南士林) 으로 중앙정계에 진출한 첫 세대였다고 한다.
1498년(연산군4) 32세에 식년문과에 급제하여 예문관검열·춘추관기사관·예문관봉교 등을 거쳐,
1504년(연산군 10) 38세 때 사간원정언이 됐다.
이때에 서연관의 비행을 탄핵했다가 안동에 유배됐으나 중종반정으로 지평에 복직된다.
밀양부사·안동부사·충주목사를 지냈고,
1523년(중종 18) 57세에는 성주목사로 선정을 베풀어 표리(表裏)를 하사받았다.
이후 병조참지와 동부승지에 부제학 등을 거쳐 대구,경주부윤, 경상도관찰사, 형조참판, 호조참판을 지냈다.
1542년(중종 37) 76세 때 지중추부사에 제수됐으나 병을 사유로 벼슬을 그만두고
만년에 안동 예안으로 귀향해 퇴계 이황(退溪 李滉), 금계 황준량(錦溪 黃俊良) 등과 교유하며
관직의 속박에서 벗어나 자연과 어울리는 기쁨을 노래하였다
저서로는 『농암집』이 있으며,
작품으로는 전하여오던 「어부가(漁父歌)」를 장가 9장, 단가 5장으로 고쳐 지은 것과
「효빈가(效嚬歌)」·「농암가(聾巖歌)」·「생일가(生日歌)」 등의 시조작품 8수가 전한다.
조선시대에 자연을 노래한 대표적인 문인으로 평가받고 있으며
문학사에서 강호시조의 작가로 중요한 자리를 차지하고 있다.
마을 앞 낙동강변 농암(일명 귀머거리 바위)에 올라 산천을 두루 살피니
자신의 옛 자취가 너무나 의연함에 감탄하고
소싯적 눈에 익은 자연물을 보고 오랫동안 품었던 소회를 밝힌다.
그것이 농암가(聾巖歌)이다
지금은 안동댐 건설로 농암은 물에 잠겨 있다
농암 선생이 35세 되던 해 1501년에 안동 예안면 분천리 옆마을 온혜리에는
동방의 대학자 이퇴계(李退溪) 선생이 태어났다
농암 이현보(聾巖 李賢輔, 1467~1555)는
퇴계 이황(退溪 李滉, 1501~1570)에게 고향선배로서 많은 길잡이가 되어 주었다 한다.
권씨부인과 선반가(宣飯歌)
농암가문의 시가문학은 전승되어 농암의 어머니 권씨부인, 농암 자신 그리고
아들 이숙량(李叔樑), 종증손자인 선오당 이시(善迂堂 李蒔) 등 4대가 우리말의 시조작품을 남겼다.
송강 정철(松江 鄭澈), 노계 박인로(蘆溪 朴仁老)와 더불어
‘가사문학의 3대가’로 평가받는 매호 조우인(梅湖 曺友仁)은 농암의 증손서이다.
특히 농암 이현보(聾巖 李賢輔)의 어머니인 권씨부인이 지은 ‘선반가(宣飯歌)’는
이 지역에 우리말로 된
노래의 전통이 흘러오고 있음을 보여주는 소중한 자료로 국문학계에 주목받고 있다.
내용은 자식이 승진하여 귀향하니 어머니가 기뻐서 노래한 매우 소박한 작품이다.
먹디도 됴ㅎ.ㄹ샤 승졍원 션반야 먹기도 좋구나 승정원 선반이여
노디도 됴ㅎ.ㄹ샤 대명뎐 기슬갸 놀기도 좋구나 대명전 기슭이여
가디도 됴ㅎ.ㄹ샤 부모다힛 길히야 가기도 좋구나 부모 향한 길이여
이 노래가 지어진 연유를 농암은 이렇게 기록했다. 아름다운 내용이라 생각되어 소개한다.
1526년 여름 진해지방 관원들의
비리를 조사하라는 특명을 받고 달이 넘도록 조사 하였으나 끝나지 않았다.
그런 가운데 유서(諭書)가 내려와 보니 뜻밖에 당상관 병조참지에 임명되어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돌아가는 길에 어버이가 계신 고향 예안에 잠시 들려 이 사실을 말씀드리니,
어머니가 기뻐하시면서 눈물을 흘렸다.
마침 서울 친구가 보낸 ‘옥관자(玉冠子)’가 도착하여 곧 부모님 앞에서 망건을 풀고 옥관자를 달았다.
이에 어머니께서 손으로 만지시며 말씀하시기를
‘옥관자에 구멍이 많아 뀌는 것이 어렵지 않으냐?’ 하시어, 내가 우스개로 답변하기를
‘다는 것이 어렵지 어찌 뀌는 것이 어렵겠습니까’하니, 온 집안이 기쁘게 웃었다.
다음 해 봄, 동부승지에 임명되어 여가를 얻어 찾아뵈오니,
어머니께서 미리 소식을 듣고 언문노래를 지어 어린계집종에게,
‘승지가 오거든 내가 지은 노래로 노래하라’ 했다. 그 노래가 ‘선반가’였다.
이는 대개 어머니가 어려서 부모를 여의시고 외삼촌인 문절공(文節公 金淡) 댁에서 성장하시어
‘승지’ 벼슬이 귀한 것을 알았던 까닭이다.
내가 과거에 급제하여 경향으로 벼슬길에 다닌 것이 어언 40년,
어버이를 모신지가 이미 여러 해이나 오직 이 두 가지 일이 가장 즐거웠다.
이때 감사 초암 신상(草庵 申鏛)이 음식을 가지고 와서 수연을 배풀고 축하시를 지었다.
즐거웠던 추억과 지은 시(詩)들을 버릴 수 없어 작은 책을 만들었다.
아울러 동양의 시를 애일당(愛日堂)에 감추어 두고 후손들로 하여금 보고 느끼도록 했다.”
적선(積善) 선조어필(宣廟御筆)
종택 사랑마루에는 선조임금이 농암가문에 내린 ‘적선(積善)’이란 어필이 걸려있다.
크기가 무려 1m나 되는데,
아들 매암 이숙량(梅巖 李叔樑)이 왕자사부(王子師傅)의 벼슬을 받아 선조 임금께 나아가 사은숙배하니
선조가 “너의 집안은 적선지가(積善之家)가 아니냐” 하시고, 즉석에서 글을 써서 하사하였다 한다.
선생의 '효와 경로정신'을 염두에 두고 한 말이라 한다.
그 밖에도 종택은 33점의 보물과 2점의 지방문화재를 포함한
5천여 점의 전적과 고문서 등의 유품을 국학진흥원에 기탁하여 그 목록집이 발간된 바 있다.
종택은 지금 안동시의 ‘고가옥활용 프로그램’에 의해 개방되어 많은 사람들이 숙박체험을 하고,
퇴계친필의 농암선생 ‘어부가’와 퇴계선생의 ‘도산12곡’의 탁본도 한다.
肯構堂긍구당(1370년-현재)(경상북도 유형문화재 32호)
긍구당(肯構堂)은 1370년경 건립된 건물로, 농암의 고조부인 이헌(李軒)이 지었다.
농암 당시 퇴락하여 1553년 중수하고 긍구당이란 편액을 붙였다.
긍구는 '조상의 유업(遺業)을 길이 이어가라'는 뜻이다.
농암은 이 집에서 태어나 이집에서 운명하였으며, 농암 사후 농암종택의 중심 건물이 되어
모든 문사(門事)가 여기서 결정되었다. 편액글씨는 영천자 신잠(靈川子 申潛)이 썼다.
1551년 7월 29일, 농암 85세 생일날 친지들의 축하 시를 받아들고 그 감격을 '생일가' 한 수로 표현했다.
1554년 3년 뒤, 새해를 맞이하여 동안학발(童顔鶴髮)에 종1품 숭정대부의 직책을 지닌 재야 재상으로
‘금서띠(金犀帶)’ 두른 굽은 허리로 사돈 탁청정 김유(金綏), 족질 퇴계 이황(退溪 李滉),
손서 금계 황준량(금계 黃俊良), 예안현감 이봉수(李鳳壽) 등 이웃 친지들과
아들 이문량(李文樑), 이희량(李希樑), 이중량(李仲樑), 이계량(李季樑), 이숙량(李叔樑)의
축하의 시와 수연(壽宴)을 받고 그 소회를 글과 시로 남겼다.
농암의 이날 소회에는 "퇴락한 집을 아들 문량(李文樑)이 주장하여 중수하고,
이집에서 신년을 맞이하여 내가 '긍구당'이라 이름하니 중량이 시를 지어 좌중에 올렸다"라고 하였다.
지금 긍구당 마루에는 농암을 비롯한 위 참석 명현과 다섯 아들들의 시와 생일가가 벽에 판각되어 있다.
봉화 구전종택(구전 김중청,苟全 金中淸)에는
당시 구전깨서 이 시편들을 큰 글씨로 써서 목판으로 남겼는데 지금까지 보존되어 있다.
생일가는 이러하다.
공명이 끝이 있을까, 수요(壽夭)는 하늘에 달린 것
금서띠 굽은 허리, 여든 넘어 봄 맞음 그 몇 해인가
해마다 오는 날, 이 또한 임금님 은혜 일세
명농당(明農堂)
1501년 농암 44세에 고향에 ‘명농당’이라는 조그만 집을 짓고 벽 위에 ‘귀거래도(歸去來圖)’를 그렸다.
그리고 4년 뒤 49세에 잠시 휴가를 얻어 명농당에 들러 시를 써서 붙이고 다시 한 번 귀거래의 의지를 다졌다.
그 시는 이러하다.
龍壽山前汾水隅 용수산 앞 분강 구비에,
菟裘新築計非無 초가 한 칸 지음은 뜻한 바 있음이다.
東華十載霜侵鬢 벼슬길 10년 하얀 귀밑 털이,
滿壁虛成歸去圖 벽에는 헛되이 ‘귀거래도’만 그렸네.
1542년 98세인 아버지 이흠(李欽)이 운명하자,
76세의 농암은 임금과 동료의 만류를 뿌리치고 은퇴하였는데
농암을 위한 전별면은 조선조 유일의 정계은퇴식으로 모든 대신이 참석했다.
제천정전별연는 경기감사 독재 신거관(獨齋 愼居寬), 판돈령 윤임(尹任),
동지중추부사 호음 정사룡(湖陰 鄭士龍), 동지중추부사 윤사익(尹思翼), 공조참판 윤개(尹槪),
첨지중추부사 안분당 이희보(安分堂 李希輔), 첨지중추부사 윤계(尹溪), 부원군 윤여필(尹汝弼),
좌찬성 송암 유관(松庵 柳灌), 좌참찬 총재 권벌(冲齋 權橃), 이조판서 정수 유인숙(靜叟 柳仁淑),
형조판서 경재 이기(敬齋 李芑), 형조참의 이임(李霖), 호조판서 정순명(鄭順明),
공조판서 홍경림(洪景霖) 등이 참석했고, 이들의 전별행차는 다시 북쪽으로 옮겨 두모포전별연으로 이어졌다.
이때 전별시를 쓴 명현은 창령군 조계상(昌寧君 曺繼商), 좌참찬 회재 이언적(晦齋 李彦迪),
동지 호음 정사룡(湖陰 鄭士龍), 첨지 김광준(金光準), 예조판서 모재 김안국(慕齋 金安國),
형조판서 돈재 성세창(遯齋 成世昌), 예조판서 규암 송인수(圭菴 宋麟壽), 호조참의 장적(張籍),
예조참의 송강 조사수(松岡 趙士秀), 병조참판 서계 정세호(西溪 鄭世虎),
풍기군수 신재 주세붕(愼齋 周世鵬), 도승지 온계 이해(溫溪 李瀣), 의정부사인 퇴계 이황(退溪 李滉 )등이다.
농암은 은퇴의 기쁨을 도연명의 ‘귀거래’에 비유하고
그의 ‘귀거래사’를 본받아 ‘효빈가(效顰歌)’라는 감격적 소회의 시조를 읊었다. 기록은 이러하다.
“1542년 가을, 농암 늙은이 비로소 인끈을 벗고 국문(國門)을 나와,
한강 기슭에서 친구들과 이별하고 돌아가는 배를 탔다. 술에 취해 배 안에 누우니 달이 동산에 떠오르고
산들바람이 불어와 문득 도연명의 ‘배는 표표히 바람에 나부끼고’의 구절을 읊조리니,
돌아가는 흥겨움이 더욱 깊어져 스스로 빙그레 웃음 지었다.
이에 노래를 지으니, 이 노래는 도연명의 ‘귀거래사’를 본받은 까닭으로 ‘효빈가’라 했다.”
돌아가리라, 돌아가리라 말 뿐이오 간사람 없어,
전원이 황폐해지니 아니 가고 어쩔꼬.
초당에 청풍명월이 나며 들며 기다리나니.
‘명농당’증시자는 모재 김안국(慕齋 金安國), 사재 김정국(思齋 金正國), 송재 이우(松齋 李堣),
신재 주세붕(愼齋 周世鵬), 운암 김연(雲巖 金緣), 온계 이해(溫溪 李瀣), 퇴계 이황(退溪 李滉)등이며,
현판 글씨는 미수 허목(眉叟 許穆)의 글씨로 원본은 국학진흥원에 보존되어 있다.
분천헌연도(汾川獻燕圖, 보물 1202호)
병술중양일 분천헌연도(丙戌重陽日 汾川獻燕圖, 보물 1202호)
1526년 농암 이현보(聾巖 李賢輔, 1467~1555)가 60세에 부모를 뵙기 위해 휴가를 얻어 내려왔다.
아버지 이흠(李欽)은 85세, 어머니 안동권씨는 80세였다.
이때 경상도 관찰사 안동인 유연재 김희수(悠然齋 金希壽)가
농암의 이러한 정성을 고려하여 수연(壽宴)을 주관하여 여러 고을 수령들을 함께 불러 음식을 마련하도록 했다.
무희와 악공들과 화공이 왔다.
영해군수 졸재 채소권(拙齋 蔡紹權)이 먼저 축하시를 썼고, 많은 참석자들이 이어서 축하시를 썼다.
유연재 김희수(悠然齋 金希壽)는 눌재 박상(訥齋 朴祥)선생으로 하여금 그 사실을 기록하게 하고 그림까지 남겼다.
『농암집』에 눌재 선생의 ‘분천헌연도병서’에 이 사실이 모두 기록되어 있다.
이후 농암이 서울로 올라가 눌재 박상(訥齋 朴祥)선생에게 이 사실을 말하고 시의 서문을 써 주도록 요청했다.
『애일당구경첩 하권』 ‘이보덕중양수친시서’의 글에 자세히 기록되어 있다.
눌재선생의 서문으로 보면 '많은 시문을 받았을 것'이라 했지만 지금 그 시문들은 문집에 보이지 않는다.
그림 좌측상단에는 종택, 우측 바위 위에는 애일당(愛日堂)과 강각(江閣)이 보이고,
그 아래는 분강(汾江)의 뱃놀이 풍류(風流)가 보인다.
이 그림은 ‘분강촌(汾江村)’의 실경에 가장 근접한 그림으로 매우 사실적으로 그려져 있다.
애일당은 부모를 위하여 지은 건물이며, 강각은 어부가, 농암가 등의 작품이 창작된 유서깊은 문학현장이기도 하다.
농암종택 전통주 일엽편주(一葉扁舟) 로 아쉬움을...
//영천이씨 효절공 농암 이현보(孝節公 聾巖 李賢輔) 가계//
9대조 신호위대장군 영양군 이대영(李大榮)
고조부 군기시소윤 이헌(李軒), 안동입향시조 묘소 녹전면 서삼리
증조부 의흥현감 이파(李坡)
증조부 예문관직제학 이오(李塢)
조부 통예문봉례 이효손(李孝孫, 1404~1487)
부친 인제현감 이흠(李欽, 1440~1537)
모친 안동권씨, 호군 권겸(權謙)의 따님
효절공 농암 이현보(孝節公 聾巖 李賢輔, 1467~1555)
배위 증 정경부인 안동권씨, 충순위 권효성(權孝誠)의 따님
장남 이석량(李碩樑) 조졸
차남 평릉도찰방 벽오 이문량(碧梧 李文樑, 1498~1581)
삼남 봉화현감 호암 이희량(虎巖 李希樑, 1501~1565)
사남 강원감사 하연 이중량(賀淵 李仲樑, 1504~1582)
오남 거창현감 환암 이계량(串巖 李季樑, 1508~ ? )
육남 내의원판사 행암 이윤량(杏巖 李閏樑, 1516~1589)
칠남 왕자사부 의병장 매암 이숙량(梅巖 李叔樑, 1519~1592)
팔남 사복시정 이연량(李衍樑)
녀 병사 산남 김부인(山南 金富仁), 탁청정 김유((濯淸亭 金綏)의 아들
동생 훈련습독 광헌 이현우(廣軒 李賢佑, 1470~1560)
조카 영해교수 이충량(李忠樑) 이수량(李遂樑)
손자 간재 이덕홍(艮齋 李德弘)---계문고제(溪門高弟)
안동-애일당(愛日堂), 강각(江閣), 농암선생정대구장(聾巖先生亭臺舊庄) (0) | 2022.12.02 |
---|---|
안동-분강서원(汾江書院),농암사당(聾巖祠堂),농암신도비(聾巖神道碑), 농암 이현보 (0) | 2022.11.29 |
안동-문충공 서애 류성룡(文忠公 西涯 柳成龍), 서애집(西厓集), 징비록(懲毖錄), 서애 유성룡(西涯 柳成龍) (0) | 2022.11.24 |
안동-의성인 참봉 김축(金軸), 김유(金柚) (0) | 2022.11.22 |
안동-농수 김효로(聾守 金孝盧,) 광산김씨 예안 오천(禮安 烏川) 입향조 (1) | 2022.11.20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