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성-김구선생 은거의 집(金九先生 隱居 宅)
전남 보성군 득량면 쇠실길 22-62, (삼정리 572)
안동김씨 대호군공파 세장비
백범 김구선생의 주요활동 1
-1893~1894년 동학운동 입문 후 첩지를 받고 팔봉접주로 해주성 공격에 선봉에 나섰으나 실패.
-1895년 2월 청계동 안태훈 진사에게 몸을 의탁하고 스승 고능선을 만남.
-11월 남만주에 김이언 의병부데에 참여하여 일본군을 공격하였으나, 참패.
-1896년 2월 을미사변때 명성황후 살해 충격으로 귀국길 치하포에서
일본국 중위를 죽인 뒤 체포되어 해주 감옥에 투옥 후 7월 인천 감옥으로 이송 후 사형을 선고받음.
백범 김구선생의 주요활동 2.
-1897년 사형 집행 직전 고종의 특사로 집행정지 되었으나 석방되지 못함.
-1898년 3월 19일 인천감옥 탈옥 후 삼남 일대에서 피신 후, 하동 쌍계사, 공주 마곡사에서 승려가 되다.
-1906~1907년 서명의숙 안악양산학교 교원, 재령보강학교 교장 역임.
-1911년 11월 안악사건(안명근사건) 주동자로 몰려 징역 15년으로 복역중 감형과 특사로 1915년경 출옥함.
백범 김구선생의 주요활동 3.
-1919년 3.1운동 후상해로 망명하여 안창호의 추천으로 임시정부 초대 경무국장.
-1923년 12월 임시정부 내무총장.
-1926년 12월 임시정부 국무령.
-1927년 3월 임시정부 국무위원에 선출.
-1927년 8월 임시정부 내무장이 됨.
백범 김구선생의 주요활동 4.
-1930년 이동녕, 이시영, 조소앙 등과 한국독립당 창당.
-1931년 청년들의 모임 한인 애국단을 조직하여 일본인 침략주의자들 암살 지휘함.
-1932년 1월 8일 이봉창 의사 의거: 동경에서 일왕 히로히토 저격.
-1932년 4월 29일 윤봉길 의사 의거: 상해홍구공원에서 폭탄 투척으로 시라카와 일본군 대장등을 즉사시킴.
-1932년 5월 임시정부 상해에서 항주로 옮김.
백범 김구선생의 주요활동 5.
-1940년 3월 임시정부 주석에 오르고, 한국독립당 집행위원장으로 선임.
-1941년 12월 9일 5개항의 대일 선전포고문 발표 후 임전태세에 돌입.
-1942년 7월 중국정부와 광복군이 정식협정 체결하여 연합군과 항일 공동작전 기초 마련.
-1944년 4월 임시정부 주석에 재선
백범 김구선생의 주요활동 6.
-1945년 9월 3일 국내외 동포에게 고함 성명과 14개항의 임시정부 당면 정책 발표와 빠른 귀국 약속
-1945년 11월 23일 김규식 등 국무위원들과 귀국.
-1945년 12월 16일~26일 모스크바에서 미국, 영국, 소련 3국 외상모임에 한반도 신탁통치안 결의에
신탁통치 반대와 미국, 소련 양군의 철퇴로 38선 철폐와 자주독립 정부 수립 주장.
겨레의 스승 백범 김구선생
백범 김구선생은 대한민국 임시정부 문지기로 자청해서
임시정부 주석으로서 조국의 자유와 독립을 위해 최후까지 혈투를 전개한 애국자이시다.
나의 소원은! 첫째도, 둘째도, 셋째도 우리나라 대한의 완전한 자주독립이며,
통일된 민주적 선진 문화 국가 건설이다.
백범 김구선생의 혼이 깃든 쇠실마을
쇠실마을 유래: 조선시대에 우측 산 어귀에 쇠를 부리고 벼리는 곳이 있어 ‘쇠실’이라 함
1914년 행정구역 개편으로 ‘쇠실’(금곡) 또는 ‘심송’이라 부름
백범김구선생의 어록
-지난행이(知難行易)
정확히 아는 것은 어렵고, 행동하기는 쉽다.
-모든 것은 나로부터 시작된다.
나를 다스려야 뜻을 이룬다.
-답설가(踏雪歌)
눈덮인 들판을 걸어갈 때 어지럽게 걷지마라.
오늘 걷는 나의 발자국은 반드시 뒷사람의 이정표가 되리니
踏雪野中去 不須湖亂行 今日我行跡 遂作後人程
답설야중거 불수호란행 금일아행적 수작후인정
백범김구선생의 어록
-불환과이환불균(不患寡而患不均) 가난은 참을망정 불공정은 참지 못한다.
-쟁두쟁족(爭頭爭足) 우두머리가 되려고 싸우지 말고 발이 되기를 다투라.
-상호불여신호 신호불여심호(相好不如身好 身好不如心好)
얼굴이 잘생긴 것은 몸이 건강한 것만 못하고 몸이 건강한 것은 마음이 바른것만 못하다.
백범김구선생의 은거가
1898년 5월경 김두호(金斗昊)라는 건장한 청년이 이 집에서 달포쯤(45일) 기거했는데,
그 청년이 온 겨레가 민족의 지도자로 숭앙하는 백범 김구 선생이었다.
김구 선생은 일제의 명성황후 시해를 응징코자 일본군 장교를 살해하고 옥고를 치르다가,
1898년 3월 9일 인천감옥을 탈옥하여 은거지를 찿던 중, 그해 5월 이 곳 쇠실마을로 찿아들었다.
김구 선생은 이 집(종친 김광언(金光彦, 1864~1937)에 머물면서
종친 광언 덕언 등과 더불어 학문과 시대를 논하고,
중국 역사가 아닌 우리 역사를 공부하여 민족정기를 일깨웠다.
떠날 때 그간 보살펴 준 은덕에 감사하며 이 집의 종친 김광언(金光彦)에게 한국 역사책을 남겼는데,
이 책의 속표지에 이별을 아쉬워하는 한시 한 수와 김두호(金斗昊)라는 서명이 있다.
이별하기 어렵구나 이별하기 어렵구나
헤어지는 곳에서 일가의 정이 솟는다
꽃 한가지를 반씩 나누어 한 가지는 종가에 남겨두고 떠나네
이 세상 살아 언제 만날 것인고 이 강산을 떠나기 또한 어렵구나
넷이 함께 놀기 한 달이 넘었는데 일이 어긋나 아쉽게 헤어지며 떠나는구나
-이별난중에서-
해방 후 상하이에서 귀국하자 김구 선생은 김기옥(金寄玉,1910~1998, 김광언의 손자)에게
안부를 묻고 한번 방문하겠다는 편지를 보낸다.
그리고 이 마을을 떠난지 48년이 지난
1946년 9월 김구선생은 김두호(金斗昊)가 아니라 민족의 지도자가 되어 다시 찿았다.
김구 선생은 쇠실마을을 다시 찿은 소감을 “감격에 넘치었다.”고『백범일지』에 적고 있다.
김구 선생이 이 마을에 피신 왔을 때는 23살의 청년이었다.
이런 젊은이를 이 집의 할아버지를 비롯해 마을 사람들이 융숭한 대접을 하였다.
이는 당시 김구 선생이 비록 떠돌이 신분이었지만 누가 보아도 범상한 사람이 아니었음을 추측케 한다.
김구 선생이 이 집에 머문 기간은 45일 정도다. 선생의 파란만장한 인생을 생각하면 매우 짧은 기간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짧은 인연을 잊지 않고 편지를 보내고 또 직접 마을을 방문해 마을 사람들과 정담을 나누었다.
요즘의 사회적 풍조에서 보면 이처럼 짧은 인연을 소중하게 생각하고,
작은 은혜에 진심으로 감사하는 김구 선생의 모습이 너무나 고귀하게 느껴진다.
글쓴이 김태권(金泰權, 전 나주공업고등학교 교사)
김태기(金泰璂, 전남대학교 경제학부 교수),(김기옥(金寄玉)의 아들)
백범김구선생과 쇠실마을의 인연
1898년 인천감옥 탈옥 후 삼남 일대에서 피신 중 친족인 안동김씨 집성촌을 소개받고
5월 23세때 보성군 득량면 쇠실마을 김광언댁에서 45여일간 안전하게 은거하셨다.
머무신 동안 동국사기라는 역사책을 중심으로 김광언(金光彦), 김덕언(金德彦), 사중이 함께
시대상과 후손들의 교육활동 등 많은 선진적 활동을 계몽하고 민족정기를 일깨우다.
떠나실 때 자기 신분을 밝히고 이별난이란 석별의 시를 남기고 종가의 정을 안고 가셨다.
1946년 9월 48년만에 보은의 방문을 하시고 종친들과 지속적인 교류를 하셨다.
백범 김구(白凡 金九)=== 김두호(金斗昊)
김구선생 은거기념관
백범은 1898년 여름 이곳 김광언씨의 집에서 40여일 동안 은거하면서 지역민에게 우리의 역사를 가르치고,
독립의식을 고취하다 다른 곳으로 옮겨갔다.
현재 쇠실 마을에는 김구선생을 은거했던 김광언의 집이 남아있으며,
후손들은 그때의 일을 자랑스럽게 여기며 김구선생이 건네준 역사책과 글을 보존하고 있다.
離別難 白凡 金九 (이별난 백범 김구)
離別難如離別難
이별난여이별난---이별하기란 어렵구나 참으로 이별은 어려운 일인데
離別難處花樹開
이별난처화수개---이별한 곳에서 일가의 정이 솟구쳐
花樹一枝分折半
화수일지분절반---꽃나무 한가지를 꺾어 절반씩을 나눠
半留宗家半行帶
반류종가반행대---한 가지는 종가댁에 남겨두고 한가지는 가지고 떠납니다.
生我天地逢何時
생아천지봉하시---넓은 천지에 살아서 또 만날것인지
捨此江山去亦難
사차강산거역난---이 강산을 버리고 떠나기도 또한 어려운 일인데
四員同遊至月餘
사원동유지월여---네 사람이 함께 한달여 동안 한가로이 놀고 지내다
齟齬惜別而去也
저어석별이거야---이별을 아쉬워하며 덧없이 떠납니다.
日後見此或可思
일후견차혹가사---먼훗날 이것을 보시게 되면 혹시 오늘의 나를 회상할까
餘否耶遺此表情
여부야유차표정---생각되어 정표로 남겨두고 멀리 멀리 떠나갑니다.
白凡金九先生 隱居追慕碑
백범김구선생 은거추모비
김구선생이 국모(명성황후)를 살해한 일제를 응징코자 일본장교를 살해하고 옥고 중
1898년 3월 9일 인천 감옥에서 탈옥하여 이곳 쇠실 김승묵(金升默, 字 光彦, 1864~1937)의 집에서
달포여를 은거하여 광언(光彦), 덕언(德彦), 사중과 더불어
시대상을 논하고 동국사기를 가르치며 민족정기를 일깨웠다.
떠날 때 이별의 아쉬움을 담은 이별난시를 남긴 후 중국으로 망명하였고,
해방후 상해에서 귀국하여 48년이 지난 1946년 9월 다시 찿아 쇠실마을 사람들과 정담을 나누었으며,
집집마다 친필 휘호를 써보내 은거의 깊은 인연을 이어가게 했다.
이에 보성 군민은 선생의 애국 정신을 받들고 그 뜻과 얼을 자손만대에 기리고자
1990년 3월 백범 김구선생기념사업추진위원회를 구성하여 은거추모비와 시비를 건립하였다.
백범 우물
//안동김씨 대호군공파 송와 김광언(松窩 金光彦) 가계//
부친 참봉 김영목(金榮穆, 1822생), 字 윤정(允亭)
송와 김승묵(松窩 金升默, 1864~1937), 字 광언(光彦)
자 농은 김재열(農隱 金在烈, 1883~1930), 字 홍규(洪奎)
손자 김성회(金性會, 1910~1998), 字 기옥(奇玉)
증손자 김태룡(金泰龍, 1935~1981)
증손자 김태권(金泰權, 1946생)
증손자 김태기(金泰璂, 1956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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