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산 해미읍성(海美邑城)
충남 서산시 해미면 남문2로 143, (읍내리 491)
서산 해미읍성(海美邑城)
사적 제116호. 해미(海美)는 1414년(태종 14)에 충청도 덕산으로부터 충청도병마절도사영이 옮겨온 곳으로,
충청도병마절도사영이 청주로 이전한 1651년(효종2)까지 군사적 거점이 되었던 곳이다.
해미읍성(海美邑城)은 1491년(성종22)에 축조되어 서해안 방어를 맡았던 곳이다.
바다가 아름답다는 의미의 '해미(海美)'라는 지명은 조선시대부터 사용되었다.
1416년 태종이 서산 도비산에서 강무(講武, 왕의 친림하에 거행된 군사훈련을 겸한 수렵대회)를 하다가
해미에서 하루를 머물면서 주변지역을 둘러보게 됐는데,
당시 해안지방에 출몰하는 왜구를 효과적으로 방어하기에 적당한 장소라고 판단하여
덕산에 있던 충청병영을 이설하기 위한 대상지로 정해
1417년(태종17년)부터 1421년(세종3년)까지 축성을 완료하게 된다.
그 후 해미에 충청지역 육군의 최고 지휘기관인 충청병영이 위치하며
병마절도사가 배치되어 육군을 총 지휘하였고
1651년 청주로 충청병영을 이전하며 충청병마절도사의 병영성으로서의 역할이 끝나게 된다.
이후 충청도 5진영중 하나인 호서좌영이 들어서게 되고
영장(營張)으로 무장을 파견해 호서이성의 좌영장과 해미현감을 겸직하게 하면서
읍성(邑城)의 영 역할을 하게 된다.
1960년에 이 성을 우리나라에 현존하는 읍성의 표본으로 삼아
사적으로 지정하고 종합적인 보존계획을 세웠다.
1974년에 동문 잠양루(岑陽樓)와 서문 지성루(枳城樓)가 복원되었는데
원래 지성루(枳城樓)주변은 탱자나무 지(枳)가 말해주듯
탱자나무를 빽빽하게 심어 성곽의 담장으로 사용하였다고 하는데
어찌 복원한 것인지 현재는 탱자나무 몇그루만이 보이고 있는데, 최대한 복원하였으면 좋겠다.
해미읍성 진남문(鎭南問)
읍성의 남쪽으로 통하는 성의 정문으로, 옛 모습을 잘 간직하고 있으며
성 안쪽에서 보면 문루 아래를 가로지른 받침돌 중앙에
'황명홍치사년신해조(皇明弘治四年辛該趙)'라는 글자가 새겨져 있다.
황명홍치(皇明弘治)는 명나라 효종의 연호인 홍치를 의미하는데
1491년(성종 22년)에 진남문이 중수(重修)되었음을 추정할 수 있다.
皇明弘治四年辛亥造
황명홍치사년신해조
1491년(성종22) 중수하다.
옥사(獄舍)
1935년에 간행된 "해미순교자약사"를 토대로 복원했으며,
1790년부터 100여년간 수많은 천주교 신자들을 국사범으로 규정하여 이 곳에서 투옥하였다.
호서이성 호서좌영(湖西左營)
동헌
해미읍성과 천주교
천주교는 천주를 믿는 종교라는 뜻으로 가톨릭을 이르는 말이다.
우리나라에는 약 200여년 전, 조선후기에 전래되어
초기에는 서학이라는 학문의 일종으로 연구되었으나 후에 종교화 되면서 천주교 박해가 시작되었다.
1790년대 정조 때부터 시작된 천주교 박해는
병인양요(1866년 흥선대원군의 천주교도 학살, 탄압에 대항하여 프랑스 함대가 강화도에 침입한 사건)와
1868년 오페르트가 흥선대원군의 아버지인 남연군 묘를 도굴한 사건 이후 더욱 극심해진다.
이때 해미진영의 겸영장은 내포지방 13개 군현의 군사권을 쥐고 있었으므로
해당 지역의 교도들을 모두 잡아들여 해미읍성에서 처형하였는데
그 수가 무려 1,000여명 이상이었다고 전한다.
해미읍성 내아(內衙)
객사(客舍)
객관이라고도 하며 지방을 여행하는 관리나 사신의 숙소로 사용,
조례에 참석하지 못하는 지방관리들은 왕을 상징하는 전패(殿牌)를 객사에 모시고
초하루와 보름에 왕궁을 향해 절을 올리는 망궐례(望闕禮)를 올렸다
청허정(淸虛亭) 오르는 길 108계단
청허정(淸虛亭)
1491년(성종 22년) 충청병마절도사로 부임한 조숙기(曺淑沂, 1434~1509)가 건립한 것을
복원한 것으로 이곳에서 병사들은 휴식을 취하거나 활을 쏘며 무예를 익혔고,
문객들은 시를 짓고 글을 남겼다.
조선시대 학자 허백당 성현(虛白堂 成俔, 1439~1504)의 개인문집인 허백당집(虛白堂集)에 그 유래가 전한다.
정자의 이름인 청허(淸虛)는 "잡된 생각이 없이 맑고 깨끗하다는 뜻"으로
이곳에 오는 모든이들에게 한결같은 마음가짐을 당부하는 의미를 갖고 있다고 한다.
조선초기 해미읍성은 충청도의 육군사령부 역할을 하는 충청병영성으로 최고 책임자는 병마절도사(병사)였다.
조숙기(曺淑沂)가 58세에 병사로 부임하여 해미읍성을 수리하면서
소나무 우거진 성곽의 뒷산에 청허정(淸虛亭)을 지었다.
1494년 방문한 충청감사 조위(曺偉, 1454~1503)는
청허정 주변 소나무와 멀리 보이는 바다의 풍경에 대한 시를 남겼고,
수헌 권오복(睡軒 權五福, 1467~1498)의 문집 수헌집(睡軒集)에 절도사와 수령이 일을 마치고
청허정에 모여 지은 시가 전한다.
1579년 충청병영에서 근무하였던 충무공 이순신(李舜臣),
1790년 해미로 귀양왔던 다산 정약용(茶山 丁若鏞)이 청허정에 머물렀을 것이라 한다.
1872년 해미현지도에 청허정옛터로 표기된 것으로 보아
1800년대에 유실되어 없어진 것으로 추정하며, 일제 강점기에는 일본식 신사가 세워졌다가 철거되었고,
1976년 복원한 후 2011년 중수하였다 한다.
서산-모송사(慕松祠), 관가정공 최청(觀稼亭公 崔淸), 이조참판 양희재 최사(楊希齋 崔泗), 좌승지 최상림(崔商霖) (0) | 2023.07.05 |
---|---|
과천-통덕랑 최조갑(崔祖甲), 진사 최상하(崔商夏), 잠곡 최제(潛谷 崔濟) (2) | 2023.07.03 |
안산-홍정희 효자문(洪貞羲 孝子門), 효자 홍정희 정려각(洪貞羲 旌閭閣) (0) | 2023.06.27 |
안산-대부도 이찬(李燦)선생 자선비, 대부도 이찬 자선비(大阜島 李燦 慈善碑) (0) | 2023.06.25 |
강진-강진 충혼탑(忠魂塔) (0) | 2023.06.23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