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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창-황강 신성진 지려(黃岡 慎性眞),사헌부감찰 신성렬지려(慎性烈),신재주처 안동권씨지려, 묵재 신동건 지려(默齋 愼東建)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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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碧巖 2023. 8. 6. 23: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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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강 신성진 지려(黃岡 慎性眞, 1752~1830)

경남 거창군 위천면 은하리길 100

孝子 通政大夫 承政院左副承旨兼 經筵參贊官 春秋館修撰官 慎性眞之閭

효자 통정대부 승정원좌부승지겸 경연참찬관 춘추관수찬관 신성진지려

황강 신성진(黃岡 慎性眞, 1752~1830)

1752년 영조 28년 임신년에 황고 신수이(慎守彛, 1688~1768)의 손자로 태어나

1830년 순조 30년 경인년에  78세로 졸 하였다.

字는 정보(精甫) 號는 황강(黃岡)이며

1777년 정조 원년  정유년에 시행한 식년전시 문과방 을과에 급제하여,

대사간, 대사헌, 좌부승지, 남포현감, 양산군수 등을 역임하였다.

아버지 신인명(慎認明)의 병 간호에 손가락을 베어 피를 먹이는 효성과 더불어

백성을 사랑하여 1857년 철종8년 정사년에 정려가 내려졌다.

 

 

신성렬과 진양강씨 지려 (慎性烈, 1759~1801, 晉陽江氏)

신성열(慎性烈)은 1759년 영조35년  기묘년에 요수 신권(樂水 慎權)의 8세손으로 태어났다.

학문에 열중하여 소학(小學)을 평생의 부적처험 삼았고

42세 되던 해에 마을에 천연두가 만연하였으나

어버이를 떠날 수 없다하여 구차하게 피하지 않다가 마침내 병에 걸려 졸 하였다.

1883년 고종20년 계미년에 효자 신성렬과 그의 처 강씨 부인의 정려가 내렸졌다.

정려각 안에는 두 개의 작은 귀부에 비석이 나란히 서 있으며 기문은 현판으로 되어 있다.

孝子 贈 通訓大夫司憲府監察 慎性烈之閭

효자 증 통훈대부사헌부감찰 신성렬지려

烈女贈通訓大夫司憲府監察 性列妻贈淑人晋陽姜氏之閭

열녀증통훈대부사헌부감찰 성열처증숙인진양강씨지려

 

 

 

신재주처 안동권씨 지려(愼在周妻 安東權氏)

烈夫學生愼在周妻孺人安東權氏之閭

열부학생신재주처유인안동권씨지려

유인 안동권씨(孺人 安東權氏)

요수 신권선생(樂水 愼權)의

3째 아들인 청송당 신복행(聽松堂 慎復行, 1533~1624)의 후손 신재주(愼在周)의 처이다.

19세에 시집와 반년도 못되어 남편 상을 당했다.

마땅히 남편이 죽은 날에 따라 가고자 했으나 시부모를 봉양하다가

1851년 철종2년 신해년 4월에 삼년상을 치르고 남편을 따라간 열녀이다.

1854년 철종5년 갑인년에 정려가 내려졌다.

 

 

 

묵재 신동건 지려(默齋 愼東建, 1779~ ? )

孝子 贈 通訓大夫 司憲府監察 愼東建之閭 上之二十九年 壬辰 四月日 命旌

효자 증 통훈대부  사헌부감찰 신동건지려   상지이십구년 임진 4월일 명정

묵재 신동건(默齋 愼東建)은

거창신씨 황산입향조 승훈랑 신우맹(慎友孟)의 10대 손으로 정조 기해(1779)애 출생하여 거차리에 살았다.

초휘(初諱) 천응(天應) 字 자두(子斗), 號 묵재(默齋)이다.

부친 병환을 당하여 손가락을 잘라 피를 먹여 3년을 연명케 하였다.

상을 당하여 평소 부친이 좋아하던 잉어 횟고기를 전에 올리고자 했으나 여의치 않았다.

동네의 잉어를 기르던 연못가에 울며 서성이니

등지느러미에 효자(孝子)가 새겨진 잉어가 튀어나와 전을 올렸다.

하늘이 감동한 효성이 극치로

1892년 고종 29년 임진 4월에 정려가 내려졌다.

정려는 원래 북쪽 동문(石門 : 葛川洞門)앞에 있었는데

1987년 가을 손자 신병채가 청송당 남쪽 담장 곁에 옮겨 1903년 건립하였다.

네 개의 팔각 서주(높이 180cm) 위에 지붕돌을 얹고

그 속 작은 귀부 위에 비석을 세웠는데(가로 : 155cm, 세로 : 106cm, 높이 : 230cm) 드물게 보는 석조 정려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