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세 컨텐츠

본문 제목

산청-남명기념관(南冥紀念館)

구름에 달

by 碧巖 2023. 8. 14. 22:04

본문

728x90

남명기념관 외삼문 성성문(南冥紀念館 惺惺門)

경남 산청군 시천면 남명로 311,(사리 466)

덕산 소재 남명선생 국가사적지 현황 2022년 12월 1일

2017년 답사 후 재 답사이기에

별묘인 여재실(如在室) 및

기념관내의 신도비문 국역비 등 등 많은 부분의 촬영을 생략하였다.

 

남명 정신의 계승

덕천서원

남명 사상의 기틀

 

남명 학맥도

 

남명 조식선생 화상찬(南冥 曺植先生 畵像贊)

 

 

 

 

 

산천재 남명매 山天齎 南冥梅

경상남도 산청군 시천면 남명로 310-8 (시천면)

산천재

지리산 천왕봉 아래 산청군 시천면 사리에 있는 산천재의 뜰에는 남명 조식(曺植, 1501~1572)선생이

61세이던 명종 16년(1561)에 손수 심은 매화나무가 있다.

산천재는 선생이 학문을 닦고 연구하던 곳으로 명종 16년(1561)에 세웠고,

순조 18년(1818)에 고쳐졌다. 규모는 앞면 2칸, 옆면 2칸이다.

 

남명 선생은 영남의 퇴계 이황과 쌍벽을 이룰 만큼 호남 학파의 수장이다. 평생 벼슬에 나가지 않았지만 죽어서 사간원(司諫院)과 대사간(大司諫)에 이어 영의정에 추서된 위인이다. 선생은 1501년(연산7년)에 경상도 삼가현에서 태어나 벼슬길에 나아간 아버지를 따라 서울로 이주하였다가 그 후 의령, 김해, 삼가 등지에서 거주하였다. 선생은 61세가 되던 해에 산청의 덕산으로 이주해 그곳에 서실을 짓고 산천재라 이름하였다. 이 당호의 ‘산천(山天)’ 이란 말은《주역》대축괘(大畜卦)의 “강건하고 독실하게 수양해 안으로 덕을 쌓아 밖으로 빛을 드러내서 날마다 그 덕을 새롭게 한다"는 말에서 뜻을 취한 것으로 강건한 기상과 독실한 자세로 세상에 나아가지 않고 깊숙이 묻혀 심성을 도야하고 올바른 수양을 하는 것이 학자의 길임을 천명한 것이다. 선생은 산천재를 짓고는 그 뜰에 매화나무를 손수 심고 해마다 아름다운 꽃을 피우는 이 매화나무에 애정을 쏟았다.

 

산천재의 뜰에 있는 이 남명매는 산천재를 건립할 당시에 심었다면 이제 440여년의 연륜을 헤아린다. 밑에서부터 크게 세 갈래로 갈라진 줄기는 뒤틀려서 위로 뻗어 올랐다. 윗부분의 가지는 일부 말라 죽었으나 새로운 가지가 섬세하게 자라나 비교적 건강한 편이다. 해마다 3월 말이면 연한 분홍빛이 도는 반겹 꽃이 가득히 피는데, 그 향기가 지극히 맑다. 불의와 타협하지 않고 평생을 벼슬길에 나아가지 않음으로써 진정한 은둔의 지사였던 남명의 그 맑은 정신이 남명매의 그윽한 향기속에 지금도 스며 있는 듯하다. 산천재의 정원의 끝 강쪽 언덕에는 남명매보다는 뒤에 심었을 것으로 보이는 크고 작은 매화나무가 서 있다. 또 산천재의 바깥뜰에는 수형이 아름답고 크게 자란 활엽상록수인 가시나무가 여러 그루 서 있어 운치를 더해주고 있다.

 

南冥先生詩碑남명선생시비

題德山溪亭柱 제덕산계정주===덕산 시냇가 정자 기둥에 쓴다

請看千石鐘

청간천석종===천섬 들어가는 큰 종을 보소서

非大扣無聲

비대구무성===크게 치지 않으면 소리 없다오

爭似頭流山

쟁사두류산===어떻게 해야만 두류산처럼

天鳴猶不鳴

천명유불명===하늘이 울어도 울지 않을까

 

이 시는 남명선생께서 예순한 살 때 지리산 덕산으로 옮겨와

산천재를 짓고 시냇가 정자에 써 붙인 시로서 남명선생의 정신세계가 잘 나타나 있다.

 

 

덕산복거(德山卜居) 덕산에 터를 잡고서

春山底處無芳草

춘산저처무방초---봄산 어딘들 향기로운 풀 없으랴만

只愛天王近帝居

지애천왕근제거---천왕봉이 하늘 가까이 있는 것을 사랑해서 라네

白手歸來何物食

백수귀래하물식---빈 손으로 왔으니 무얼 먹고 살겠는가?

銀河十里喫猶餘

은하십리끽유여---십리 흐르는 은하 같은 물, 먹고도 남으리

산천재(山天齎)

조식 남명문집 목판 (曺植 南冥文集 木板)

경상남도 산청군 시천면 남명로 310-8

경상남도 유형문화재

조선시대 유학자인 남명 조식(曺植,1501∼1572) 선생의 시와 문장 등을 수록한 문집을 널리 간행하기 위해 만든 목판이다.

1604년 선조37년에 남명 조식의 제자인 정인홍(鄭仁弘, 1536~1623)이 합천 해인사에서 만들었으나, 원판이 불에 타버려 1622년 광해군 14년에 경상남도 관찰사 유영순(柳永詢)의 도움으로 다시 새겼다.

 

이후 1764년 영조40년에 박영신이 문집 원본이 나온 뒤 별도의 시문을 모아 낸 책인 ‘별집’의 내용을 교정하고 보충하였다.

영조 40년(1764)에 박영신이 별집의 내용을 다시 교정하고 보각(補刻)하였다.

1897년 고종34년에 남명 조식의 연보를 수정 보완하여『남명선생편년』을 간행하여, 지금의 모습을 갖추었으며, 185매인 목판을 남명기념관에 보관하고 있다.

 

 

남명매(南冥梅)

이 매화나무는 남명조식(南冥曺植,1501년~1572년) 선생이

61세에 천왕봉이 바라보이는 이 곳에 산천재(산천재)를 짓고,

뜰에다 심은 것이라 전한다.   세상 사람들은 이를 남명매라 부른다.

우음(偶吟)-우연히 읊다

朱點小梅下

주점소매하---작은매화 아래서 책에 붉은점 찍다가

高聲讀帝堯

고성독제요---큰 소리로 요전을 읽는다.

窓明星斗近

창명성두절---북두성이 낮아지니 창이 밝고

江闊水雲遙

강활수운요---강물 넓은데 아련히 구름 떠있네

관련글 더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