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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여-사천현감 은산 정득열(鄭得說)

구름에 달

by 碧巖 2023. 10. 21. 20: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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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천현감 은산 정득열(鄭得說)

충남 부여군 부여읍 능산리 산30-1

부여군 향토유적 제48호

 

忠臣贈訓鍊院正行泗川縣監鄭公得說之墓  淑人晉州姜氏祔左

충신증훈련원정행사천현감정공득열지묘  숙인진주강씨부좌

사천현감 정득열(鄭得說, 1565~1592)

자는 군석(君錫), 장정공(莊靖公) 정숭조(鄭崇祖)의 증손으로 첨지중추부사 정희영(鄭希永)의 둘째 아들이다.

1588년 선조 21년 24세에 무과에 급제하여,

1592년 4월에 사천(泗川)현감을 제수받고 부임한지 열흘도 안되어

그 해 4월 14일 왜구가 바다를 건너와 부산포에 상륙, 우리나라 연해(沿海)의 여러 고을을 크게 짖밟아 다 흩어져서,

적이 사천(泗川)에 침범하였다는 소식을 듣고 군사를 이끌고 돌아와

진주판관(晋州判官 ) 김시민(金時敏)과 같이 합병(合兵)하여 고성(固城), 사천(泗川), 진해(鎭海) 등

여러 고을에 주둔하고 있던 적을 공격하니, 적의 기세가 꺾여 적군은 철군하여 진주로 숨어 들어갔다.

이에 김시민(金時敏)으로 하여금 성벽을 타고 올라가 적을 막아 성을 지키도록 해 놓고,

군사 3백명을 거느리고 다시 병사(兵使) 유숭인(柳崇仁)에게로 달려가 유병사와 같이 적을 공격하였으나,

적의 수가 날로 늘어나고 우리 전선은 넓어 한정된 인원으로 맞아 싸우기가 어려움을 알고

도중에 복병을 설치하여 적의 진로를 끊고 협공해 대승을 거두었으나

적과의 접전속에 병사 유숭인(柳崇仁)이 먼저 전사하고

현감 정득열(鄭得說)도 흩어진 병졸들을 모아 끝까지 싸우다가 전사하였다.

1739년(영조 15)에 유학 유상화(柳相華) 등 수백명이 그를 임진왜란 때 역전사(力戰死)한 공로자로,

그의 아들 정택뢰(鄭澤雷)도 광해군 때 폐모론을 공박한 공로자로 증관사시(贈官賜諡)할 것을 상소하여

그는 훈련원정에, 아들 정택뢰(鄭澤雷)는 지평에 증직되고 정려가 내려졌다.

묘갈은 홍문관응교 윤광소(尹光紹)가 찬하고 승정원 동부승지 이심원(李心源)이 쓴 후 1760년 10월에 세웠다.

내용은 공의 출생과 선조, 생애, 임란시의 공적, 장례 등을 기록하고 있다.

贈兵曹判書行泗川縣監忠壯鄭公得說墓 配贈貞夫人晉州姜氏祔左

증병조판서행사천현감충장정공득열묘 배증정부인진주강씨부좌

//하동정씨 사천현감 정득열(鄭得說) 가계//

  6대조 하성부원군 정흥인(河城府院君 鄭興仁)

  5대조 문성공 학역재 정인지(文成公 學易齋 鄭麟趾, 1396~1478)

고조부 하남군 정숭조(河南君 鄭崇祖)

증조부 참판 정승렴(鄭承廉)

   조부 부호군 정인국(鄭仁國)

   부친 첨지중추부사 정희영(鄭希永)의 2자

              사천현감 은산 정득열(鄭得說, ?~1592)

              배위 증 정부인 진주강씨, 성균관학유 강종경(姜宗慶)의 따님

                          자 증 지평 충결공 화강 정택뢰(忠潔公 花岡 鄭澤雷, 1585~16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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