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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성-화진포 김일성(金日成) 별장, 이기붕(李起鵬) 별장

구름에 달

by 碧巖 2024. 1. 6. 22: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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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진포 김일성 별장

강원도 고성군 거진읍 화포리 530-1

화진포 김일성 별장

이 별장은 일제 강점기인 1937년 일본이 중일전쟁을 일으키면서

원산에 있던 외국인 휴양소를 화진포에 강제 이주시킬 때,

당시 선교사 셔우드 홀 부부가 독일 망명 건축가 베버에게 의뢰하여

1938년 이곳에 건립하였으나 6.25 전쟁 중 훼손된 건물을

2006년 5월 원래 모습으로 복원하였다.

건축 당시 회색돌로 지어진 건물이

해안 절벽 위 송림속에 우아하게 자리하고 유럽의 성을 재현한 모습에서

“화진포의 성” 으로 불리어졌으며,

1948년부터 1950년까지 김일성(金日成,1912~1994) 일가가

이 곳을 휴양지로 이용하면서 지금은 “김일성 별장”으로 불리우고 있다.

화진포 설화

먼 옛날 화진포 마을에 “이화진”이라는 부자가 살고 있었다.

그러나 이 사람은 주위 사람들에게 인색하고 성격이 고약해 마을에 구두쇠로 소문이 자자했다.

그러던 어느 날 건봉사 스님이

이화진의 집을 찿아와 시주를 시주를 얻으려 하자 시주 대신 소똥을 퍼주었다.

그러자 스님은 염불을 외며 소똥을 바랑에 받아 넣고는 답례로 “복 많이 받으십시오” 라고 말하며 돌아서 나갔다.

이 광경을 보고 있던 며느리는 얼른 쌀을 퍼서 스님께 드리며

“우리 아버님이 큰 죄를 지었습니다. 용서해 주세요” 라며 빌었다.

그러자 스님은 들은 체도 않고 화진포 고개의 고총산까지 올라갔다.

며느리가 쫓아오는 것을 보고 딱 멈춰서며 며느리에게 말했다.

“왜 자꾸 나를 쫓아오시오?”라고 묻자 며느리는 사정을 하며 또 용서를 빌었다.

그러자 스님은 시주를 받으며 “그대는 나를 따라 오면서 무슨 소리가 나더라도 절대 돌아보지 말라” 고 말했다.

며느리가 얼마 동안 스님 뒤를 따라 걷는데 갑자기 뒤에서 ‘쾅’하고

하늘이 무너질 듯한 큰 소리가 나자 며느리는 자신도 모르게 뒤를 돌아다 봤다.

그러자 하늘에는 폭우가 마구 쏟아지고, 이화진이 살던 집과 논밭이 순식간에 모두 호수가 돼 버렸다.

스님은 이미 모습을 감춘 뒤였고, 며느리는 애통해 하다 그만 돌이 되어 버렸다.

그 일 이후 고을에 큰 홍수가 나고 농사는 흉년이 들기 시작했다.

이 마을 사람들은 착한 심성을 가진 며느리의 죽음을 안타까이 여겨

고총서낭신으로 모셨는데 그 후로 농사도 잘 되고 전염병도 사라졌다고 한다.

화진포라는 이름도 바로 이화진의 이름 “화진”에서 유래했다고 한다.

 

 

 

 

 

 

 

이기붕 별장

강원도 고성군 거진읍 화포리 530-1

만송 이기붕(晩松 李起鵬, 1896~1960)

1920년대 외국인 선교사들에 의해 건축되어 사용된 건물로써

해방 이후 북한 공산당 간부 휴양소로 사용되어오다가

휴전 이후 부통령 부인이었던 박마리아 여사가 개인 별장으로 사용하였다.

 

 

 

 

 

 

화진포에서 맺은 사랑

황금물결 찰랑이는 정다운 바닷가

아름다운 화진포에 맺은 사랑아

꽃구름이 흘러가는 수평선 저 넘어

푸른꿈이 뭉게뭉게 가슴 적시면

조개껍질 주어 모아 사랑을 수놓고

영원토록 변치 말자 맹세한 사랑

 

은물결이 반짝이는 그리운 화진포

모래 위에 새겨놓은 사랑의 언약

흰 돛단배 흘러가는 수평선 저 멀리

오색 꿈이 곱게곱게 물결쳐 오면

모래섬을 쌓아놓고 손가락 걸고

영원토록 변치 말자 맹세한 사랑

 

 

광개토대왕릉(廣開土大王)

화진포 앞바다의 섬으로 보이는 거북이 형상의 금구도가

광개토대왕릉 이라는 자료가 발견되어 학계에 비상한 관심이 모아지고 있다.

고구려 연대기에 따르면 광개토대왕 3년 서기394년 8월경 화진포의 거북섬에 왕릉(王陵) 축조를 시작했으며,

광개토대왕 18년 8월에 화진포의 수릉축조 현장을 대왕이 직접 방문하기도 했던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그리고 광개토대왕이 서거한 이듬해인 서기 414년 장수왕(長壽王) 2년 9월 29일

화진포 거북섬에 광개토대왕의 시신을 안장 하였다고 한다.

이곳에 광개토대왕릉 수비대가 왕릉을 지키고 있었고,

계림(신라)의 군사와 수비대의 잦은 분쟁이 있었던 것으로 기술하고 있으며,

서기 492년인 고구려 21대 문자명왕(文咨明王) 2년에 이곳에서 광개토대왕의 망제(望祭)를 지냈다는 기록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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