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정나씨 후곡 나급(後谷 羅級)의 증손자 한성부좌윤 어영대장 나홍좌(羅弘佐)
경기도 안산시 상록구 건건동 산124-8
한성좌윤 어영대장 나홍좌(羅弘佐) 1649(인조 27)~1709(숙종 35)
조선 후기의 무신. 본관은 안정. 자는 제백(濟伯).
아버지는 증 호조참판 성원이고, 어머니는 안동권씨 도정(都正) 순창(順昌)의 따님이며, 유복자로 태어났다.
송준길의 문인이었지만 무예를 닦아 1676년(숙종 2) 무과에 급제하였다.
1677년 선전관에 임명되었고,
1679년 도총도사로 승진하고, 이어 경력을 거쳐 중화부사, 서흥현감, 봉산군수 등을 지냈고,
1685년 내금위장이 되었다. 이때 풍기를 문란시켰다 하여 사간원의 탄핵을 받았다.
1688년 전주목사, 1690년 해미현감으로 나가 선정을 베풀었다.
1695년 영흥부사에서 통제사로 옮길 때 송영(送迎)의 폐단을 없애버렸다.
1697년 총융사 겸 훈련도정, 포도대장을지내고 한성부좌윤 등을 역임했다.
1699년 노·소론 간의 대립으로 과옥(科獄)이 일어나자,
1700년 포도대장으로 과옥을 안치하였는데, 이것이 화근이 되어 무고로 용천(龍川)으로 유배되었다.
노론인 김창협(金昌協) 등 대신들의 변론에 힘입어 1703년에 풀려났다.
곧 춘천방어사에 임명되었으나 부임하지 않았고,
1708년 수원방어사에 임명되었으나 얼마 후 사직하였다.
그는 천성이 충효하고 기풍이 영걸스럽고 총명하였다고 하며,
유복자로 태어난까닭에 어머니를 봉양키 위해 수십 년을 이곳저곳으로 다니면서
최고로 큰 변방 장수로 제수하려는 것을 사양하고 오로지 인근에 있는 성(城)만을 청하여 재임하였다.
청렴을 신조로 살아 백성의 집에는 곡식이 쌓여 있어도
그의 집에는 쌓아 둔 곡식이 없으므로 백성들은 서로 다투어 쌀과 음식 등을 모아서 보내기도 하였다.
그가 죽자 여러 고을 백성들이천리 길을 마다않고 와서
위로하고 부의를 한 것은 그의 은혜를 생각함에서였다.
묘는 서울시 서초구서초동에 있었으나, 도시화로 1971년 이곳 상록구 건건동 나봉산 아래로 이장되었다.
嘉善大夫漢城府左尹 御營大將 弘佐羅公之墓 配貞夫人光山金氏 密陽朴氏祔左
가선대부한성부좌윤 어영대장 홍좌나공지묘 배정부인광산김씨 밀양박씨부좌
御營大將羅公弘佐 貞夫人光山金氏 貞夫人密陽朴氏之墓
어영대장나공홍좌 정부인광산김씨 정부인밀양박씨지묘
한성좌윤 나홍좌(羅弘佐) 신도비
嘉善大夫漢城左尹兼五衛都摠府副摠管御營大將羅公神道碑銘幷序
가선대부한성좌윤겸오위도총부부총관어영대장나공신도비명병서
大匡輔國崇祿大夫行判中樞府事 崔錫鼎撰
대광보국숭록대부행판중추부사 최석정찬
士人 尹世鏞謹書 사인 윤세용근서
傍後孫 相午篆書 방후손 상오전서
후곡 나급(後谷 羅級)의 증손자 나명좌(羅明佐)
나명좌(羅明佐)
1634(인조 12)~1651(효종 2)
조선시대의 유생. 본관은 안정. 자는 여익(汝翼).
아버지는 해주목사 나성두(羅星斗,1614~1663)이고
어머니는 경주김씨로 예조판서 김남중(金南重,1627~1671)의 따님이다.
동춘당 송준길(同春堂 宋俊吉,1606~1672)의 사위이고,
문강공 삼연 김창흡(文康公 三淵 金昌翕,1653~1722)의 외삼촌이다.
1648년 15세에 동춘당 송준길의 딸에게 장가갔는데, 일찍 죽었다.
1662년(현종3) 유인 송씨가 자결하여 상록구 건건동 나봉산 묘역에 합장하였다.
농암 김창협(農巖 金昌協,1651~1708)이 지은 묘지명이 《농암집(農巖集)》에 남아 있다.
묘 앞에는 묘표가 세워져 있는데,
뒷면에 1667년(현종8)에 새긴 묘표 음기가 남아 있는데, 마모가 심한 편이다
安定羅生明佐汝翼之墓 妻恩津宋氏祔左
안정나생명좌여익지묘 처은진송씨부좌
내시교관 상우당 나석좌(尙友堂 羅碩佐)
羅公碩佐之墓 具氏祔左
나공석좌지묘 구씨부좌
증 이조참판 내시교관 상우당 나석좌(尙友堂 羅碩佐) 1652(효종 3)~1698(숙종 24)
조선시대의 유생. 본관은 안정. 자는 중보(仲輔). 호는 상우당(尙友堂).
아버지는 해주목사 나성두(羅星斗)이고 증 이조참의 나성한(羅星漢)에게 입양되었고,
어머니는 경주김씨 예조판서 김남중(金南重)의 따님이다.
동춘당 송준길(同春堂 宋俊吉,1606~1672)의 문인으로
1674년(현종15) 중국 운남(雲南)에서
오삼계(吳三桂)가 명왕조의 부흥을 꾀하며 항청운동(抗淸運動)을 전개하자
일봉 조현기(一峰 趙顯期,1634~1685) 등과 함께 만언소(萬言疏)를 올려
삼번(三藩)의 난을 일으킨 오삼계(吳三桂), 경정충(耿精忠), 상지신(尙之信) 등과
명왕조 부흥 세력과 연합하여
효종 때 이룩하지 못한 북벌계획을 단행, 병자호란의 치욕을 설욕하자고 주장하였다.
1689년(숙종15) 기사환국에 이어 인현왕후 민씨 폐위사건이 일어나자 이를 주동한 남인을 통렬히 비난했다.
또 행전치는 것을 의논할 때 모두들 좋은 법이라고 주장했으나 홀로 불편하다고 반박하였다.
그는 관직에는 나아가지 않았지만
이웃 향당(마을 사람)들에게 나날이 굶주린 사람을 힘써 구제하는 것을 일삼았다.
가정은 넉넉지 못했지만 나무를 팔아 흉년에 가난한 사람들에게 나누어 주자
앞을 못보는 사람들이 먹여 달라고 문전에 운집하기까지 했다.
벼슬은 내시교관에 임명되었으나 봉양을 이유로 나아가지 않았다. 뒤에 이조참판에 추증되었고,
묘는 서울시 서초동에 있었으나, 도시화로 1971년 상록구 건건동 나봉산으로 이장되었다.
묘갈의 비문은 생질(甥姪) 인 문강공 삼연 김창흡(文康公 三淵 金昌翕)이 찬(撰)하였다.
有明朝鮮國內侍敎官通德郞羅公墓碣銘幷序
유명조선국내시교관통덕랑나공묘갈명병서
甥安東金昌翕述 延安金相履書
생안동김창흡술 연안김상리서
//안정나씨 세자시강원보덕 증 영의정 후곡 나급(後谷 羅級) 가계//
6대조 죽산현사 나경손(羅慶孫)의 따님
5대조 양산군수 나유선(羅裕善)
고조부 증 한성참군 나계종(羅繼宗)
중조부 창릉참봉 나세걸(羅世傑)
조부 성균관전적 나익(羅瀷,1507~1537)==문과급제
부친 성균학유 나윤침(羅允忱,1527~1578)==문과급제
모친 숙인 전주이씨, 별제 이원기(李元紀)의 따님
세자시강원보덕 증 영의정 후곡 나급(後谷 羅級,1552~1602)==문과급제=신도비
배위 정경부인 광산김씨, 한성참군 김호선(金好善)의 따님
자 형조참의 증 좌의정 구포 나만갑(鷗浦 羅萬甲,1592~1642)==문과급제
배위 정경부인 광산김씨, 한성참군 김호선(金好善)의 따님
손자 증 호조참판 나성원(羅星遠,1628~1649=21)
증손 어영대장 나홍좌(羅弘佐,1649~1709) ===신도비
현손 선전관 나억구(羅億耈)
현손 첨정 나억령(羅億齡)
현손 통덕랑 나억경(羅億慶)
손자 해주목사 기주 나성두(碁洲 羅星斗,1614~1663)
증손 나명좌(羅明佐,1634~1651) ====묘갈명
증손 명촌 나양좌(明村 羅良佐,1638~1710)
현손 나연(羅演), 생부 상우당 나석좌(尙友堂 羅碩佐)
5대손 통덕랑 나묵(羅默)
5대손 나검(羅檢)
증손 증 이조참판 내시교관 상우당 나석좌(尙友堂 羅碩佐,1652~1698)==묘비
손자 증 이조참의 나성한(羅星漢)
증손 내시교관 상우당 나석좌(尙友堂 羅碩佐,1652~1698), 생부 기주 나성두
현손 선공감역 나준(羅浚,1688~173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