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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안-마이산(馬耳山),마이탑사(馬耳塔寺), 석정 이갑룡(石亭 李甲龍),처사 이갑룡, 줄사철나무

구름에 달

by 碧巖 2024. 8. 30. 23: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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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이산(馬耳山)   마이탑사(馬耳塔寺)   마이산탑(馬耳山塔)

전북 진안군 마령면 동촌리 진안읍 단양리

아득한 먼 옛날 큰 죄를 지어 하늘나라에서 쫓겨난 한 산신 부부 내외가 이 세상에 살고 있었다.

그들은 인간 세상에서 두 아이를 낳고 기르며 살면서 수 억겁 동안 속죄의 시간을 보냈다.

오랜 속죄의 날들을 보내고 드디어 하늘 천상계로 승천의 기회가 열렸다.

이때 남편 산신이 아내 산신에게 말했다.

"이제 하늘나라로 다시 올라갈 때가 되었소.

그러나 우리가 승천하는 모습이 사람들 눈에 띄면 부정을 탈것이니

사람들이 깊이 잠든 한밤중을 택해 승천하는 것이 좋을 듯하오."

그러나 아내의 생각은 달랐다.

한밤중은 너무 무섭습니다. 게다가 밤중에 일을 치르자면 너무 피곤합니다.

그러니 푹 자고나서 이른 새벽에 올라가십시다.

누가 꼭두새벽에 잠 안자고 우리들이 승천하는 것을 훔쳐보고 있겠습니까?

남편 산신은 일을 그르칠까 걱정되었지만 아내 산신의 고집을 꺾지 못했다.

오랜 속죄의 날들이 무위로 돌아갈지도 몰라 불안 했지만

이튿날 새벽에 승천하기로 마음 먹고 잠자리에 들었다.

이튿날 새벽, 산신 부부는 마침내 승천을 시도했다.

하늘을 향해 산이 쑥쑥 솟아가고 있을 때

아랫마을의 어느 부지런한 아낙네가 치성을 드리기 위해 정화수를 뜨려고

우물을 찾았다가 그 현장을 목격하고 말았다.

아낙네는 생전 처음 보는 그 광경에 놀라 비명을 질러 댔다.

이 소리에 부정을 탄 산신부부는 결국 꿈에도 그리던 승천을 하지 못하고

그 자리에 굳어져 지금의 암수 마이봉이 되었다고 한다.

화가 머리끝까지 난 남편 산신은 아내 산신을 걷어차고는

두 아이를 빼앗아 버렸다는 뒷얘기도 전한다.

그래서일까? 지금의 수마이봉(해발 673m)은 두 아이를 거느리고 있는 듯한 형상을 취하고 있고,

암마이봉(667m)은 수마이봉을 등지고 앉아 한없이 고개를 떨군채 후회하는 듯 한 형상을 취하고 있다.

 

道士 李甲龍先生 事蹟碑

도사 이갑룡선생 사적비

탑의 주인공 석정 이갑룡(石亭 李甲龍)처사의 인간전모

이 처사는 1860년 3월 25일

전북 임실 둔덕에서 효령대군 15대손 이성우(李成宇)의 차남으로 탄생하시었다.

어려서부터 효성이 지극했던 그는 부모의 상을 당하여 묘옆에 움막을 치고

3년간의 시묘살이를 마친 뒤 인생의 허무 무상함을 통탄,

전국 명산을 전전하며 수양을 쌓다가 25세 때 마이산에 들어와

솔잎으로 생식을 하며 수도를 하던 중 신의 계시를 받아 만불탑(萬佛塔)을 축석했다.

이 탑은 천지음양이치와 팔진도법을 적용하여 30여년의 구제와 만인이 짓는

죄를 대신해 비는 기도로서 일생을 보내시다 1957년 98세를 일기로 세상을 마치셨다.

이 처사가 남긴 유물로는 탑 외에도 신의 계시를 받아 쓰신

30여권의 신서와 모든 재난과 재앙을 막아주는 부적 등이다.

특히 흐들리면서도 넘어지지 않는

만불탑의 신비 오묘함은 중생 구제의 상징으로 영원히 빛날 것이다.

처사 이갑룡(石亭 李甲龍)옹의 생애

이갑룡옹은 1860년 3월 25일

전북 임실군 둔덕리에서 효령대군의 15대손 이성우씨 차남으로 태어났다.

어려서부터 효성이 지극하여 부모상을 치른후에도 삼년간의 시묘를 하였으며

그후 나라의 어지러움과 인생의 괴로움에 회의를 느끼고 명산을 찿아 수도하던 중

난세와 억조 창생을 구원하려면 공을 드려야 한다는 신의 계시와 깨달음으로

솔잎을 생식하며 이곳에 탑을 쌓았다.

한편 신의 계시로 쓴 30여권의 신서와 부적을 남겨 놓았다.

강풍에 흔들려도 무너지지 않는 이 탑은 천지 음양이치와 팔진도법으로

1885년부터 30여년간에 걸쳐 이곳을 비롯 정읍군 신태인읍 백산사 등에 탑을 쌓고

일생을 기도로 살다 1957년에 향년 98세로 타계하였다.

세계적으로 그 형태가 특이하며 오묘하고 웅려한 이 탑은

어려운 나라의 창생을 구원하려는

염원과 기도의 상징으로 또는 한국미를 자랑하는 명소로 길이 남을 것이다.

1994년 7월 글 월촌 이기반(月村 李基班)    글씨 변산 김윤길(邊山 金允吉)

섬진강  발원지  용궁

마이산 줄사철나무군락

진안군 마령면 동촌리 천연기념물 제380호

줄사철나무는 노박덩굴과에 속하는 상록활엽의 덩굴식물로

줄기에서 나는 뿌리로 나무나 바위를 덩굴처럼 기어오르며 자라는 식물이다.

꽃은 5∼6월에 연한 녹색으로 피고

열매는 10월에 연한 홍색으로 익으며 황적색 종의로 싸여 있는 종자가 들어있다.

기암절벽에 붙어 자라는 나무 마이산의 줄사철나무군락지는

수마이봉 기슭 은수사 뒤 편, 암마이봉 기슭 탑사 앞쪽,

수풀 속에 오래된 나무는 기암절벽에 붙어 자라고 있고 유목들이 군락을 이루고 있다.

오래된 나무는 직경 8∼12㎝이고 높이 3∼7m 쯤 되고 동절기 낙엽이 떨어진 계절에도

마이산 바위 벼랑에 붙어서 두터운 상록성을 자랑하고 있는 독특한 모양을 이룬다.

보기 드문 형태의 마이산의 줄사철나무군락지는

우리나라 내륙지방에서 줄사철나무가 자랄 수 있는 북쪽한계선이지만,

그러나 바닷가를 따라서는 동쪽에서는 울릉도, 서쪽에서는 덕적도까지 자라고 있다.

다 자란 줄사철나무와 어린 줄사철나무들이 한데 모여 군락을 이루고 있어

학술적, 생태학적으로 매우 중요한 자료이므로 천연기념물로 지정하여 보호하고 있다.

사시사철 잎이 푸르러 낙엽이 진 겨울철이면 삭막한 주위환경과 대조를 보이며 장관을 이룬다.

 

 

마이탑사 대웅전

 

산신각

마이산(馬耳山)                      만보당 김수동(晩保堂 金壽童)

馬耳雙尖揷太空

마이쌍첨삽태공===말 귀가 쌍봉으로 돌출하여 공중에 꽂혔고

雲開突兀露秋容

운개돌올로추용===구름 걷히자 우뚝한 바위에 가을빛 드러내네

似聞絶頂神湫在

사문절정신추재===듣자하니 정상에는 신령한 늪이 있다는데

鼓角何能試老龍

고각하능시로룡===어찌 나팔과 북으로 늙은 용을 시험할까?

 

만보당 김수동(晩保堂 金壽童, 1457~1512)

조선전기 문신, 본관은 안동(安東). 자는 미수(眉叟), 호는 만보당(晩保堂)이다.

상락부원군(上洛府院君) 김사형(金士衡)의 후손으로 조부는 동지중추부사 김종숙(金宗淑)이고,

아버지는 목사 김적(金磧)이며, 어머니는  순흥안씨로 동부승지 안질(安質)의 따님이다.

 

1477년(성종 20) 식년 문과에 급제하여 여러 청요직을 거친 뒤 4조 판서를 역임했다.

우의정으로 있을 때 중종반정에 가담해 정국공신(靖國功臣) 2등에 책록되고

좌의정(左議政)으로 승진하고 영가부원군(永嘉府院君)에 봉해졌다.

영의정(領議政)으로 승진하고

영경연 홍문관 예문관 춘추관 관상감사(領經筵 弘文館 藝文館 春秋館 觀象監事)를 겸했다.

중종 7년(1512)에 향년 56세로 졸했다. 시호는 문경(文敬)이다.

 

마이산 형성

마이산은 오랜 시간 동안 열과 압력을 받으며

퇴적된 자갈,모래,점토 등이 점차 바위로 굳어져 형성된 역암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약1억년 전 백악기때 지구의 지각운동으로 이 역암층이 지표면으로 상승하면서

지금과 같은 뾰족한 봉우리 모양의 마이산이 만들어졌다.

우뚝 솟은 두 개의 산봉우리와 10여개의 작은 봉우리로 이루어진

마이산의 높이는 서봉 687.4m, 동봉 681.1m,로 서봉은 암마이봉, 동봉은 수마이봉으로 불린다.

특히 암마이봉 남쪽에서는 타포니(풍화혈)라 불리는 거대한 구멍들을 관찰할 수 있는데,

타포니(taffoni)는 암석의 작은 홈에 물이 들어가

얼었다 녹았다를 반복하면서 생겨난 넓은 구멍을 말한다.

1979년 전라북도 도립공원으로 지정된 마이산은

이러한 지질학적 중요성을 인정받아 2019년 국가지질공원으로 지정되기도 하였다.

마이산 명칭

마이산(馬耳山)이라는 이름은 높은 두 개의 산봉우리가

마치 말의 귀 모양을 하고 있다고해서 생겨난 것으로,

조선시대 태종이 남쪽 지역을 돌아보던 중 마이산을 보고 이름 지었다고 전한다.

그 이전에도 마이산은 다양한 이름으로 불리었는데,

신라시대에는 서다산(西多山),

고려시대에는 용출봉(湧出峰) 이라 하였으며,

조선 초기에는 태조 이성계가 속금산(束金山)이라 이름지었다고 한다.

이 외에도 계절의 변화에 따른 마이산의 경관 변화를 보여주는 이름들도 전하는데,

봄에는 안개를 뚫고나온 두 봉우리가 쌍돗배 같다하여 돛대봉,

여름에는 수목이 울창해지면 용의 뿔처럼 보인다고 하여 용각봉,

가을에는 단풍 든 모습이 말의 귀 같다해서 마이봉,

겨울에는 눈이 쌓이지 않아 먹물을 찍은 붓끝처럼 보여 문필봉이라 하기도 한다.

이성계의 금척

마이산은 조선 초기 속금산(束金山)이라 하였는데,

태조 이성계(太祖 李成桂)가 이름지었다고 한다.

태조 이성계가 왕위에 오르기 전 어느 날

꿈에서 신인(神人)이 이성계에게 금척(金尺,금으로 된 자)을 주면서

이것을 가지고 국가를 정제(整齊,정돈하여 가지런히 함)하십시오라고 하였다고 전하는데,

이는 이성계가 장차 왕위에 오를 것이라는 계시의 꿈으로 알려져 있다.

꿈을 꾼 이후 이성계가 고려 말 남원 운봉의 황산에서 왜구를 물리치고

개선하는 길에 진안의 마이산을 지나는데,

마치 묶어서 세워놓은 듯이 뾰족하게 솟아 있는 모습이

꿈 속에서 본 금척과 흡사하다 하여 속금산이라 하였다고 한다.

이 외에도 태조 이성계의 성()()’가 목성(木姓)에 해당하므로

()’과 상극인 ()’의 기운을 묶어둘 필요가 있었기 때문에

산 이름을 속금산(束金山)’이라고 하였다고 보기도 한다.

이렇듯 마이산은 태조 이성계의

조선 창업과 관련된 금척 이야기의 상징적 장소로 주목되고 있다.

문화재

마이산은 국가 명승으로 지정된 문화재로,

마이산 남부와 북부 일원에는 아름답고 소중한 문화재들이 많이 분포되어 있다.

마이산 남부의 주요문화재로는 백제~통일 신라시대 창건되어

괘불탱(보물), 목불좌상(전북 유형문화재),

석탑(전북 문화재자료)등을 소장하고 있는 금당사(金塘寺)를 비롯하여

역암인 마이산(馬耳山)에서 덜어진 자연석으로 쌓아올린 원추형 탑 5기와

판판한 돌을 포개 쌓은 외줄탑 등 80여기의 마이산탑(전북 기념물)이 장관을 이루는 탑사(塔寺),

태조 이성계(太祖 李成桂,1335~1408)가 기도를 마치고 증표로 심어 자랐다는

청실배나무(천연기념물)와 줄사철나무 군락(천연기념물)이 있는 은수사(銀水寺)가 있다.

마이산 남부에는 일제강점기인 1920년대 건립되어 조선을 건국한 태조 이성계의 제사를 지내며

전북지역 항일운동의 거점 역할을 했던 이산묘(駬山廟,전북기념물)를 비롯하여

호남 지역의 대표적 항일 의병장인 정재 이석용(靜齋 李錫庸,1878~1914)

1907년 의병을 일으킨 장소인 용암(龍岩),

태조 이성계가 남원 운봉에서 왜구를 무찌르고

개선하던 중 잠시 머물렀던 곳이라는 주필대(駐蹕臺) 등이 있다.

마이산     탑영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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