허백당 정난종(虛白堂 鄭蘭宗)의 장자 창원도호부사 창원군 정광보(昌原君 鄭光輔)
경기도 군포시 속달동 산 3-1
허백당 정난종(虛白堂 鄭蘭宗)의 장남 창원도호부사 창원군 정광보(昌原君 鄭光輔,1457~1524)
본관은 동래, 자는 운지(雲之), 운지(運之)이다.
할아버지는 진주목사를 지낸 정사(鄭賜)이고,
아버지는 이조 호조판서를 지낸 익혜공 허백당 정난종(虛白堂 鄭蘭宗)이다.
아버지 정난종은 네 번 과거에 급제하였으며 좌리공신에 책록되었다.
중종 때의 의정부 영의정 수부 정광필(守夫 鄭光弼)의 형이고,
호음 정사룡(湖陰 鄭士龍)의 아버지이다.
그의 집안은 훈구파였지만 동생 정광필은 사림파에 호의적이었으며,
아들 정사룡은 명종, 선조 때의 문인으로, 용재 이행(容齋 李荇,1478~1534)의 문인이 되었다.
진사시에 입격하고, 이후 문과에도 여러 차례 응시하였으나 낙방하여 뜻을 이루지 못하였다.
음보로 관직에 나가 와서별제(瓦署別提)를 시작으로
사재감주부, 종부시주부, 군자감주부를 거쳐 사헌부감찰에 두번 임명되었고,
장원서장원과 장원서별제, 평시서령, 장예원사의, 종친부전부를 거쳐
장악원첨정, 예빈시첨정, 제용감첨정을 거쳐 통례원봉례 등을 역임하고 사헌부장령에 이르렀다.
지방관으로는 연산현감, 평양부판관, 정선군수, 풍기군수,
금산군수, 순창군수, 초계군수, 창원도호부사, 연안부사(延安府使)를 지냈다.
연산군 때 직간을 하다가 길주군으로 유배되었으며,
중종반정 후 풀려나 다시 창원도호부사겸 김해진관병마첨절제사가 되었다.
이후 창원도호부사를 끝으로 질병으로 사퇴하고 의령군 도굴산 근처에 내려가 은거하다가
1524년 3월 9일 졸하였다. 사후 증직으로 증 이조판서에 추증되었다
通政大夫行昌原都護府使 金海鎭管兵馬同僉節制使 鄭公之墓 淑夫人全義李氏之墓
통정대부행창원도호부사 김해진관병마동첨절제사 정공지묘 숙부인전의이씨지묘
허백당 정난종(虛白堂 鄭蘭宗)의 장자 창원군 정광보(昌原君 鄭光輔) 묘역후경
창원도호부사 창원군 정광보(昌原君 鄭光輔) 신도비
덕수인 좌찬성 문헌공 용재 이행(文獻公 容齋 李荇,1478~1534) 짓고
창녕인 형조판서 문장공 돈재 성세창(文莊公 遯齋 成世昌,1481~1548) 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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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백당 정난종(虛白堂 鄭蘭宗)의 차남 영의정 문익공 수부 정광필(文翼公 守夫 鄭光弼,1462~1538)
허백당 정난종(虛白堂 鄭蘭宗)의 차남 영의정 문익공 수부 정광필(文翼公 守夫 鄭光弼,1462~1538)
본관은 동래(東萊). 자는 사훈(士勛), 호는 수부(守夫).
정구령(鄭龜齡)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진주목사 정사(鄭賜)이고,
아버지는 이조판서 허백당 정난종(虛白堂 鄭蘭宗)이며, 어머니는 장사랑 이지지(李知止)의 따님이다.
조선의 문신으로 중종 재위기의 최장수 정승으로 정승 기간이 14년이며 영의정만 2번에 걸쳐 9년을 하였다.
수부 정광필(守夫 鄭光弼)의 직계 후손이
철종(哲宗)을 옹립한 경산 정원용(經山 鄭元容,1783~1873)으로 영의정을 네 번 역임하였다.
1492년(성종23) 31세에 진사에 오르고, 그 해 식년 문과에 급제하였다.
성균관학정 때 좌의정 이극균(李克均)의 발탁으로 『성종실록』 편찬에 참여하기도 하였다.
1504년(연산군10) 직제학을 거쳐 이조참의가 되었는데,
임금의 사냥이 너무 잦다고 간했다가 충남 아산(牙山)으로 유배되었다.
1506년 중종반정 후 부제학에 오른 뒤 이조참판, 예조판서, 대제학을 거쳐
1510년 우참찬으로 전라도도순찰사가 되어 삼포왜란을 수습하고 병조판서에 올랐다.
1512년 함경도관찰사가 되어 기민 구제에 공헌하였다.
1513년 우의정과 좌의정을 거쳐, 1516년 영의정에 올랐다.
1519년 기묘사화 때 정암 조광조(靜菴 趙光祖)를 구하려다 영중추부사로 좌천되었다가
1527년 다시 영의정에 올랐다.
1515년 장경왕후(章敬王后)가 죽고 중종의 총애를 받던 후궁이 자기의 소생을 끼고 왕비의 자리에 오르려 하자,
홍문관 동료들을 이끌고 적극 간쟁해 새로이 왕비를 맞아들이게 하였다.
1519년 중종이 사정전(思政殿)에 들러 천재(天災)의 원인이 될만한 정치의 잘못을 물었을 때
송재 한충(松齋 韓忠)이 비루한 재상이라고 탄핵하자,
이요정 신용개(二樂亭 申用漑)가 선비가 대신을 면대해 배척하는 풍토는 근절해야 한다며
송재 한충(松齋 韓忠)의 논죄를 주장하였다.
그러나 그는 오히려 젊은 사람들이 바른 말하는 풍조를 꺾어 억제하는 것은 옳지 못하다 하여
재상의 넓은 도량을 보이기도 하였다. 1531년 70세에 궤장(几杖)이 하사되었다.
1533년 허물로 그만두고 영상에서 물러나 회덕에 있을 때,
후임 영상인 희락당 김안로(希樂堂 金安老,1481~1537)로부터
장경왕후 국장 때 총호사(摠護使)를 맡아 능지(陵地)를 불길한 땅에 잡았다는 무고를 받아 김해로 유배되었다.
이것은 김안로의 아들 김희(金禧)가 중종의 장녀 효혜공주(孝惠公主)와 혼인해 부마가 되어
임진강변의 호곶목장(壺串牧場, 말을 공급하기 위하여 조정에서 운영하던 목장)을 받아 밭을 일구고자 하므로,
이를 저지한 일로 희락당 김안로(希樂堂 金安老)의 원한을 샀기 때문이었다.
1537년 김안로가 사사(賜死)되자 곧 풀려나 영중추부사가 되었다.
저서로는 『정문익공유고(鄭文翼公遺稿)』가 있으며,
중종의 묘정에 배향되었고
대전의 회덕서원(현 숭현서원), 용궁의 완담향사(浣潭鄕祠), 현 예천 완담서원에 향사되었다.
시호는 문익(文翼)이다.
有明朝鮮國大匡輔國崇祿大夫議政府領議政兼 領經筵弘文館藝文館 春秋館觀象監事
유명조선국대광보국숭록대부의정부영의정겸 영경연홍문관예문관 춘추관관상감사
世子師 贈諡文翼公之墓 貞敬夫人恩津宋氏之墓
세자사 증시문익공지묘 정경부인은진송씨지묘
1539년 4월 세우다
貞敬夫人恩津宋氏之墓
정경부인은진송씨지묘
허백당 정난종(虛白堂 鄭蘭宗)의 차남 문익공 수부 정광필(文翼公 守夫 鄭光弼) 신도비
진주인 병조판서 문정공 양곡 소세양(文靖公 陽谷 蘇世讓,1486~1562) 짓고
진성인 문순공 퇴계 이황(文純公 退溪 李滉,1501~1570) 쓰다
1562년 명종17년 건립
//익혜공 허백당 정난종(翼惠公 虛白堂 鄭蘭宗) 가계//
증조부 판사복사사 증 호조참의 정해(鄭諧)
증조모 용궁전씨, 현감 전순수(全順守)의 따님
조부 결성현감 증 이조판서 삼수정 정구령(三樹亭 鄭龜齡)
조모 군부인 상산박씨, 판사재감정 박여노(朴女老)의 따님
부친 진주목사 증 좌찬성 정사(鄭賜,1400~1452)
모친 연안군부인 이씨, 상호군 이백인(李伯仁)의 따님
동래군 익혜공 허백당 정난종(東萊君 翼惠公 虛白堂 鄭蘭宗,1433~1489)
배위 정경부인 전주이씨, 장사랑 이지지(李知止)의 따님
장남 창원도호부사 창원군 정광보(昌原君 鄭光輔,1457~1524)
손자 강서현령 정한용(鄭漢龍)
증손 천안군수 정순우(鄭純祐)
손자 대제학 호음 정사룡(湖陰 鄭士龍,1491~1570)
손자 정언용(鄭彦龍)
차남 영의정 문익공 수부 정광필(文翼公 守夫 鄭光弼,1462~1538)
배위 정경부인 은진송씨, 예조정랑 증 직제학 송순년(宋順年)의 따님
손자 남부주부 정노겸(鄭勞謙,1484~1529)
손자 경기전참봉 정휘겸(鄭撝謙,)
증손 한성판윤 매계 정유신(梅溪 鄭惟愼,1519~1577)
손자 사재감부정 정익겸(鄭益謙,1494~1558)
증손 시강원보덕 정유청(鄭惟淸,1534~1598)
손자 강화도호부사 증 좌찬성 정복겸(鄭福謙,1501~1552)
증손 좌의정 임당 정유길(林塘 鄭惟吉,1516~158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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