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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진-병마절도사 이권(李菤),문경공 경재 이기(文敬公 敬齋 李芑),문헌공 용재 이행(文獻公 容齋 李荇)

구름에 달

by 碧巖 2024. 12. 13. 22: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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덕수이씨 연헌 이의무(蓮軒 李宜茂)의   장남 절도사 이권(李菤)

충청남도 당진시 송산면 능안길 143-26 (도문리 산78-1)

 

嘉善大夫同知中樞府事兼 平安道兵馬節度使 德水李公菤之墓 配貞夫人海州崔氏祔左

가선대부동지중추부사겸 평안도병마절도사 덕수이공권지묘 배정부인해주최씨부좌

 

 

1519년 기묘사화로 조광조가 실각하자 이행은 홍문관 부제학이 되고,

이듬해 공조참판에 임명됨과 동시에 대사헌과 예문관 대제학을 겸하였다.

1521년 공조판서가 된 이후 우참찬, 좌참찬, 우찬성으로 승진하였고,

1524년 이조판서가 되었다. 다시 좌찬성을 거쳐

1527년 우의정에 올라 홍문관대제학 등을 겸임하였다.

1530년에는 『신증동국여지승람』의 편찬을 마치고 좌의정이 되었다.

하지만 희락당 김안로(希樂堂 金安老,1481~1537)의 전횡을 논박하다가

김안로의 반격으로 1532년 평안도 함종에 유배되어

1534년 유배지에서 사망하였다.

1537년 김안로 일파가 축출되자 이행은 복관되어 중종 묘정에 배향되었다.

 

 

 

덕수이씨 연헌 이의무(蓮軒 李宜茂)의   장남 절도사 이권(李菤) 묘역후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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증 영의정 연헌 이의무(蓮軒 李宜茂)의  차남  문경공 경재 이기(文敬公 敬齋 李芑)

영의정 풍성부원군 문경공 경재 이기(文敬公 敬齋 李芑,1476~1552)

본관은 덕수(德水). 자는 문중(文仲), 호는 경재(敬齋), 시호는 문경(文敬).

1501년(연산군7) 문과에 급제, 명성이 자자하였으나

장인인 군수 김진(金震)이 재물을 탐하였던 관계로 좋은 벼슬을 얻지 못하다가

그의 재주가 아깝다 하여

대사헌 회재 이언적(晦齋 李彥迪,1491~1553)의 힘으로 벼슬의 길에 올랐다.

여러 요직을 거쳐 1545년(인종1) 우의정이 되자

윤원형(尹元衡, ?~1565)과 결탁하여 을사사화(乙巳士禍)를 일으켜

선비들에게 모조리 화를 입혔으며

훈공이 책록되고 풍성부원군(豊城府院君)에 피봉,

기사(耆社)에 들어갔다가 영의정이 된 후 급사하였다.

세상은 윤원형(尹元衡),이기(李芑)를 가리켜 2흉(凶)이라 하였으며

선조 초에 훈작(勳爵)을 추삭(追削)하였다.

推誠協翼炳畿定難衛士功臣 大匡輔國崇祿大夫 議政府領議政兼 領經筵春秋館事觀象監事

추성협익병기정난위사공신 대광보국숭록대부 의정부영의정겸 영경연춘추관사관상감사

豐城府院君 諡文敬 德水李公諱芑之墓 貞敬夫人光山金氏祔

풍성부원군 시문경 덕수이공휘기지묘 정경부인광산김씨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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증 영의정 연헌 이의무(蓮軒 李宜茂)의  삼남 문헌공 용재 이행(文獻公 容齋 李荇)

大匡輔國崇祿大夫議政府左議政兼 兩館大提學 世子傅 諡文獻 德水李公諱荇之墓

대광보국숭록대부의정부좌의정겸 양관대제학 세자부 시문헌 덕수이공휘행지묘

配貞敬夫人全州李氏祔左

배정경부인전주이씨부좌

 

좌의정 문헌공 용재 이행(文獻公 容齋 李荇,1478~1534)

이행의 본관은 덕수(德水), 자는 택지(擇之),

호는 용재(容齋),창택어수(滄澤漁水),청학도인(靑鶴道人)이다.

할아버지는 지온양군사 이추(李抽),

아버지는 홍주부사 이의무(李宜茂), 어머니는 창녕성씨(昌寧成氏)다.

 

용재 이행(容齋 李荇)은 1495년(연산군1) 18세에 증광 문과에 급제하여

권지 승문원 부정자로 벼슬 생활을 시작했다.

예문관 검열과 봉교, 성균관 전적을 역임하면서 『성종실록』 편찬에 참여하였다.

한때 홍문관 교리에 올랐지만, 갑자사화(1504)에 연루되어 충주에 유배되었고,

1506년에는 거제도에 위리안치(圍籬安置)되었다.

 

이행은 중종반정으로 풀려나

사가독서(賜暇讀書)를 통해 촉망받는 관료로 인정받았다.

이행은 1513년(중종8) 성균관 사예가 되었다가

이듬해 사성으로 승진하였고, 사섬시정(司贍寺正)이 되었다.

1515년에는 사간원 대사간 등 성균관 대사성, 좌승지, 도승지를 거쳐

1517년에 대사헌이 되었다.

하지만 정암 조광조(靜庵 趙光祖,1482~1519)의 배척으로,

벼슬에서 물러나 충청도 면천으로 내려갔다.

 

1519년 기묘사화로 조광조가 실각하자 이행은 홍문관 부제학이 되고,

이듬해 공조참판에 임명됨과 동시에 대사헌과 예문관 대제학을 겸하였다.

1521년 공조판서가 된 이후 우참찬, 좌참찬, 우찬성으로 승진하였고,

1524년 이조판서가 되었다. 다시 좌찬성을 거쳐

1527년 우의정에 올라 홍문관대제학 등을 겸임하였다.

1530년에는 『신증동국여지승람』의 편찬을 마치고 좌의정이 되었다.

하지만 희락당 김안로(希樂堂 金安老,1481~1537)의 전횡을 논박하다가

김안로의 반격으로 1532년 평안도 함종에 유배되어

1534년 유배지에서 사망하였다.

1537년 김안로 일파가 축출되자 이행은 복관되어 중종 묘정에 배향되었다.

용재 이행(容齋 李荇)의 저서로는

1589년에 발간된 7책의 목판본 시문집인 『용재집(容齋集)』이 있다.

그 외에 『신증동국여지승람』 편찬에 참여하였고,

『동문선』과 『삼강행실도』의 속편을 제작할 때도 관여하였다.

이행의 시는 당대에 뛰어나다는 평을 받았으며,

참신한 표현과 독특한 발상으로 높이 평가되며

정조가 ‘조선조에서 제일의 시인’이라는 읍취헌 박은(揖翠軒 朴誾, 1479~1504)과 함께

해동강서파(海東江西派)로 불렸다

 

이행(李荇)의 시호는 문정(文定)이었으나 뒤에 문헌(文獻)으로 바뀌었다.

또한 이행은 당진시 송산면에 세거지를 형성한 덕수이씨의 입향조이다.

이행은 가문의 번영을 바라며 송산면 삼월리에 회화나무를 심었는데,

지금까지 번성하여 현재 당진군 천연기념물 제317호로 지정되었다.

증 영의정 연헌 이의무(蓮軒 李宜茂)의 삼남 문헌공 용재 이행(文獻公 容齋 李荇) 묘역후경

 

덕수이씨 증 영의정 연헌 이의무(蓮軒 李宜茂,1449~1507)

               장남 평안도병마절도사 이권(李菤,1467~ ? )

               차남 문경공 경재 이기(文敬公 敬齋 李芑,1476~1552)

               삼남 문헌공 용재 이행(文獻公 容齋 李荇,1478~1574)

               사남 평해군수 이영(李苓,1481~1546)

               오남 한성부좌윤 이봉(李芃,1484~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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