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강채씨 대제학 순천군 중암 채홍철(順天君 仲菴 蔡洪哲)
전남 순천시 덕월동 653-1
高麗三重大匡純誠輔翊贊化功臣 右文館大提學 領藝文館事中書侍郞平章事
고려삼중대광순성보익찬화공신 우문관대제학 영예문관사중서시랑평장사
文惠公順天君 中菴蔡先生之墓 配順天郡夫人 安東金氏合祔
문혜공순천군 중암채선생지묘 배순천군부인 안동김씨합부
文惠公 順天君 中菴蔡先生墓碣銘
문혜공 순천군 중암채선생묘갈명
공의 휘는 홍철(洪哲)이요, 자는 무민(無悶)이요 호는 중암(中菴)으로 교주도(交州道) 평강현(平康縣) 사람이다. 나이 18세에 문사에 능하여 성균시(成均試)에 합격하였고, 23세에 진사시(進士試)에 등제하였다. 처음에 응선부 녹사(膺善府錄事)에 임명되었으며, 다섯 차례 전직하여 통례문 지후(通禮門祗候)가 되었다.
외방에 나가 장흥부(長興府)를 맡아서 혜정(惠政)을 펼치다가 얼마 뒤에 그만두고는 곧장 집에 돌아와서 한가히 지냈는데 그 기간이 모두 14년이었다. 스스로 중암거사(中菴居士)라고 호하고는 항상 부도(浮圖)의 선지(禪旨)와 금서(琴書)와 약을 조제하는 일로 하루하루를 보냈다. 공은 성품이 또 청탁하는 것을 좋아하지 않았으며 세상일에 아무 욕심이 없이 그대로 몸을 마칠 것처럼 보였다.
덕릉(德陵 충선왕 )이 평소에 공의 이름을 알고 있던 중에, 지대(至大) 무신년(1308, 충선왕 원년)에 이르러 신정(新政)을 행하게 되자, 현재(賢才) 얻기를 급히 여기면서 공을 크게 쓰려고 하였다. 그러나 공은 더욱 고집을 부리며 출사하려고 하지 않다가 강권에 못 이겨 겨우 몸을 일으켰다.
그러자 곧바로 사의 부정(司醫副正)을 제수하였고, 다시 황경(皇慶) 임자년(1312)에 밀직 부사(密直副使)에 임명하였다. 그리하여 전임 지후(祗候)의 신분에서 한 번 몸을 일으켜 여덟 번 옮긴 끝에 5년 만에 재상의 지위에 오르니, 사림이 이를 영광으로 알았다.
연우(延祐) 갑인년(1314, 충숙왕 1)에 토지의 경계를 바로잡게 할 적에 공이 그 임무를 전담하였다. 이에 사방의 토지를 살펴 적절하게 삼양(三壤)으로 분류한 뒤에 옛 제도를 참작하여 개간된 토지에 징수하되 당시의 상황에 알맞게 하도록 힘쓰니, 공사(公私)가 모두 편하게 여겼다.
덕릉이 이 일을 계기로 공을 더욱 중시하여 누차 밀직사(密直使)를 가하였으며, 이듬해 겨울에 그 일이 일단 보고되자 첨의 평리(僉議評理)에 올리고 삼사사(三司使)로 옮겼다가 뒤이어 찬성사(贊成事)로 승진시켰다. 경신년(1320)에 평강군(平康君)에 봉해졌다.
또 공의 자제 중에 원조(元朝)에 벼슬하여 5품의 직질(職秩)에 오른 자가 있어 은혜를 받고 태상예의원 판관(太常禮儀院判官)에 봉해졌는데, 이는 자계(資階)를 갖춘 훈작(勳爵)이었다. 지순(至順) 임신년(1332, 충숙왕 복위 1)에 의릉(毅陵 충숙왕 )이 복위하여 구인(舊人)을 임용하려고 하였다.
그리하여 공을 다시 기용하여 정승으로 삼고 얼마 뒤에는 또다시 순천군(順天君)에 봉하였으며, 삼중대광(三重大匡)으로 품계를 높이고 공신의 호를 가하였다. 그리고 우문관대제학 영예문관사(右文館大提學領藝文館事)의 신분으로 병자년(1336)에 공거(貢擧 시관(試官) )를 맡았는데, 당시에 인재를 제대로 뽑았다고 일컬어졌다.
공은 문장과 기예가 모두 정밀하기 그지없었다. 그중에서도 특히 석교(釋敎)에 조예가 깊었는데, 그 도를 논할 적에는 비록 저명한 승려라고 할지라도 공이 한마디 말로 굴복시키곤 하였으니, 참으로 본 것이 없었다면 어떻게 이와 같이 할 수가 있었겠는가.
공은 일찍이 집 북쪽에 전단원(旃檀園)을 지어 놓고 항상 선승(禪僧)을 길렀는데, 그중에는 득도한 자도 꽤 있었다. 또 그 전단원 안에 약방을 차렸는데, 나라 사람들이 그 덕을 많이 봤으므로 활인당(活人堂)이라고 부르기도 하였다.
그리고 뒤에 집 남쪽에 중화당(中和堂)이라는 건물을 짓고서 때때로 영가군(永嘉君 권보(權溥) ) 권공(權公) 이하 국상(國相) 8인을 초청하여 기영회(耆英會)를 만들었는데, 이는 대개 선현(先賢)의 모임을 본받은 것으로서 풍류가 그보다 결코 못하지 않았다.
공은 감식이 뭇사람보다 뛰어났고 그 풍유(風猷)는 세상에 보기 드물었다. 사람을 취할 때에 완벽함을 요구하지 않았으며, 허물을 보고 어짊을 알았다. 그리하여 집에 있을 때나 남을 대할 적에 한 덩어리의 화기(和氣)가 우러나오곤 하였으니, 정말 대아(大雅)한 군자라고 일컬을 만하였다.
증조 휘 모(某)는 상서령(尙書令)에 추증되었다. 조부 휘 모는 소부감(小府監)으로 평장사(平章事)에 추증되었다. 부친 휘 모는 좌우위 보승낭장(左右衛保勝郞將)으로 첨의 정승(僉議政丞)에 추증되었다. 모친 박씨(朴氏)는 승평군부인(昇平郡夫人)으로 한국태부인(韓國太夫人)에 추증되었는데, 지밀직사(知密直事)에 추증된 휘 모의 따님이다.
부인 김씨(金氏)는 영가군부인(永嘉郡夫人)인데, 또 자제가 귀하게 되었으므로 대흥현군(大興縣君)에 봉해졌다. 부인의 부친 휘 모는 지위가 첨의 중찬(僉議中贊) 상락공(上洛公)에 이르렀으며, 세황(世皇 원 세조(元世祖) )의 조정에 공을 세워서 중봉대부(中奉大夫) 도원수(都元帥)를 제수받았다.
부인은 유가(柔嘉)하고 숙선(淑善)하여 규문의 법도를 잘 지켰다. 자녀 5인을 낳았다. 장남 하중(河中)은 연곡(輦轂 연경 )에서 숙위하다가 태부부 자의참군(太傅府咨議參軍)에 뽑혔으며, 본국에서도 간간이 벼슬하여 판삼사사(判三司事)에 이르렀고 지금은 평강군(平康君)이다.
다음 하로(河老)는 판종부시사(判宗簿寺事)이다. 다음 선지(先智)는 불교를 배워 계조연진 대선사(繼祖演眞大禪師)가 되었다. 장녀는 지금 계림 부윤(雞林府尹) 검교 첨의평리(檢校僉議評理)인 설현고(薛玄固)에게 출가하였다. 다음은 고(故) 좌우위 보승별장(左右衛保勝別將) 정광조(鄭光祖)에게 출가하였는데, 공보다 먼저 죽었다.
공이 세상을 떠나자 사람들은 모범을 잃고 나라는 시귀(蓍龜)를 잃었다고 탄식하며 애도하지 않는 이가 없었다.
4월 8일 경인에 성 동쪽 언덕에 장례 지냈다. 명(銘)은 다음과 같다.
사람은 덕이 있어야 / 人之有德。
지위도 수명도 누리는 법 / 必位必壽。
그렇지 않은 경우도 있긴 하지만 / 亦或不然。
공은 덕이 있어서 누릴 수 있었다오 / 惟公克有。
오직 우리 공만이 그러했나니 / 惟其有之。
그래서 영원히 전해질 것이라오 / 是以不朽。
중암 채홍철 묘역후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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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암 채홍철(仲菴 蔡洪哲)의 부친 중서시랑 평장사 강재 채함(康齋 蔡諴) 제단비
高麗中書侍郞平章事 康齋蔡公祭壇碑 配順天郡夫人朴氏
고려중서시랑평장사 강재채공제단비 배순천군부인박씨
//평강채씨 대제학 순천군 중암 채홍철(順天君 仲菴 蔡洪哲) 가계//
고조부 태묘서령 채영(蔡泳)
증조부 문하시랑평장사 경평공 채송년(景平公 蔡松年)
조부 문하시랑평장사 판이부사 문헌공 태봉 채화(文献公 泰峰 蔡華)
부친 중서시랑 평장사 강재 채함(康齋 蔡諴)
모친 승평군부인 박씨, 지밀직사사 박모(朴某)의 따님
대제학 순천군 중암 채홍철(順天君 仲菴 蔡洪哲, 1262년,원종3~1340년,충혜왕1)
배위 영가군부인 증 대흥현군김씨, 상락충렬공 김방경(上洛忠烈公 金方慶)의 따님
장남 영도첨의사사 평강부원군 채하중(平康府院君 蔡河中, 1299~1358)
배위 오산군부인 양씨, 양철명(梁徹明) 처인구 포곡읍 전대리 416-2
손자 합문지후 채왕진(蔡王儘)
손자 생원 채득록(蔡得淥)
손자 첨정 채득강(蔡得江)
차남 판종부사사 문절공 노재 채하생(文節公 魯齋 蔡河生)
손자 이조참판 채인검(蔡仁儉)
삼남 문하시중 채하로(蔡河老)
손자 사헌부감찰 채우상(蔡遇祥)
장녀 순창인 검교 첨의평리 계림군 설현고(鷄林君 薛玄固), 설인검(薛仁儉)의 손자
차녀 초계인 좌우위 보승별장 정광조(鄭光祖)
삼녀 연안인 이백고(李伯攷)
녀 횡성인 목사 조진(趙禛), 父 광정공 조계순(光定公 趙季珣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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