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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구-송강 홍천뢰(松岡 洪天賚),혼암 홍경승(混庵 洪慶承),문하사인 경재 홍로(敬齋 洪魯), 진동단(鎭洞壇)

구름에 달

by 碧巖 2026. 1. 30. 23: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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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하사인 경재 홍로(敬齋 洪魯),송강 홍천뢰(松岡 洪天賚),혼암 홍경승(混庵 洪慶承)

대구광역시 군위군 부계면 대율리 661-1

안내문

한밤의 관문인 이곳 솔밭에 세워진 두 좌의 비석은

1592년 일본이 30만 군사를 일으켜 우리나라를 침범한 임진왜란이 발발하여

나라가 바람앞에 등불처럼 위태로울 때 선비의 몸으로 분연이 일어나

일가 친척과 주민을 모아 의병을 조직하고 이곳에서 훈련하여

당시 일본군의 주요 보급로 거점인 영천성을 수복하는데 선봉장이 되어

화공으로 적을 물리친 송강 홍천뢰 장군과

군량조달과 작전까지 수행하여 전공을 세우신 조카 혼암 홍경승 선생의

공적을 기리어 업적을 후세에 전하여

큰 교훈의 장으로 삼고자 여기에 추모비를 세워 오늘에 전한다.

                                                           사회(寫懷,회포를 쓰다),  경재 홍로(敬齋 洪魯,1366-1392)​

                                                                   平生忠義蘊諸心

                                                                   평생충의온제심==평생토록 충과 의를 마음에 쌓아

                                                                   致澤君民抱負深

                                                                   치택군민포부심==임금과 백성 위한 포부가 깊었건만

                                                                   萬事于今違宿計

                                                                   만사우금위숙계==모든 일이 이제와 품은 계획과 어긋나니

                                                                   不如歸去臥雲林

                                                                   불여귀거와운림==차라리 돌아가 자연에 묻혀 살리

                         품은 뜻을 읊음

               평생토록 충과 의를 마음속에 가득 담아

               임금과 백성 위한 포부가 깊었건만

               모든 일이 이제와 품은 계획과 어긋나니

               차라리 돌아가 자연에 묻혀 살리

                                  행촌 홍영희(杏村 洪英姬)

경재 홍로(敬齋 洪魯, 1366.1.13.~1392.7.4.)

여말선초의 문인이자 관료이다. 호는 경재(敬齋), 자(字)는 득지(得之)이다.

7세에 효경(孝經)을 능통하게 읽을 정도로 총명하고 부지런했다.

장성해서는 성리학과 고금의 가례 및 ‘이락연원록(伊洛淵源錄)‘ 등을 깊이 연구했다.

경재선생실기에 따르면

목은 이색(牧隱 李穡,1328~1396)은 득지지문 진숙속야(得之之文, 眞菽粟也)

"득지의 문장은 참으로 콩과 쌀같이 이로운 물건이다" 라고 칭찬했다고 한다.

과거에 뜻이 없었으나 아버지의 권유로 스물두 살에 생원시에 응시하여 합격하고,

스물다섯 살 되던 공양왕(恭讓王) 2년(1390년) 경오방 진사과 대과에 11위로 급제하였다.

포은 정몽주(圃隱 鄭夢周,1337~1392)의 추천으로 한림학사가 되고, 문하사인으로 승진되었다.

이성계를 따르던 사인(舍人) 우정 조박(雨亭 趙璞,1356~1408)과

좌사의 수암 오사충(守菴 吳司忠, 1327~1406) 등이 상소하여

목은 이색(牧隱 李穡)과 조민수(曺敏修,1324~1390)의 죄를 다스려야 한다고 청하자,

상소한 자들의 권세가 두려워 대신들 중 한 마디도 말을 하는 자가 없었는데,

이때 경재 홍로(敬齋 洪魯)만이 상소를 올려

그들에게 죄를 물어 다스림은 정당한 처사가 아님을 극력 변호하였다.

 

이후 나라가 점점 혼란해지자 병을 핑계로 관직을 사임하고

고향인 군위군 부계면 대율리로 돌아와,

거처하는 곳에 '경재'(敬齋)라는 편액을 걸고 선비의 본업에만 전념했다.

공양왕 4년(1392년) 7월 4일에 병을 얻었으나

어버이 마음을 다치게 할까 염려해 신음소리 한 번 내지 않았다고 한다.

그달 17일 새벽에 갑자기 일어나 의관을 갖추기 시작하였는데,

이를 본 가족이 만류하자 "내가 간밤에 꿈에 태조를 뵈었다. 오늘이 내가 돌아갈 날이다."라 하고

관복을 갖추어 입고 사당에 배알한 다음,

아버지의 침소에 들어가 절을 올린 뒤, 뜨락에 자리를 편 뒤 북쪽을 향하여 네 번 절하고

신여국해망 사역하언(臣與國偕亡, 死亦何言)

"신은 나라와 더불어 함께 망하겠나이다. 죽는 자가 무슨 말을 하겠나이까"

라는 말을 남기고 오전 사시(巳時)에 숨을 거두니 향년 27세였다고 한다

송강 홍천뢰(松岡 洪天賚) 장군 추모비

松岡洪天賚將軍追慕碑

송강홍천뢰장군 추모비

송강 홍천뢰(松岡 洪天賚, 1564~1614) 

본관은 부림(缶林)이고, 호는 송강(松岡)으로

고려 문화사인 경재 홍로(敬齋 洪魯,1366~1392) 선생의 5세손으로

1564년 명종 19년 한밤마을에서 태어났다.

젊어서부터 무예와 지락이 뛰어나 선조 17년(1684년) 21살에 별시 무과에 급제했다.

선조 25년(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4월

집안 조카 혼암 홍경승(混庵 洪慶承)과 300여 명의 의병을 이끌고

영천의 대동(大同), 한천(漢川), 소계(召溪) 등지에서 왜적과 싸워 전공을 세웠고,

7월 영천성 전투에서 선봉장으로 출전하여 영천성 탈환에 큰 공을 세웠다.

그러나 불철주야 전투를 계속해온 장군은 마침내 중병에 걸려 귀가 요양을 하게 되었는데

이 때문인지 조정에서의 논공행상 때는 장군만이 공훈에서 소외 되었으나

그는 불평하나 토로하지 않고 미관으로서 나라에 충성을 다하였고

장군은 그 후에도 또다시 왜적을 크게 격파하는 공훈으로 훈련원정이라는 관직에 올랐다가

3년 후 사직하고 귀향 은거하면서 51세의 생애를 마칠 때 까지 벼슬자리를 택하지 않았다.

영천성 수복 전투는 임진왜란이 일어난 뒤

조선군이 육지에서 승리한 최초의 전투로 높이 평가하고 있다.

문강공 여헌 장현광(文康公 旅軒 張顯光,1554~1637) 선생은

'위태롭던 사직이 공의 힘으로 유지되었다'라고 크게 칭송했다.

한밤마을 성안 숲에는 홍천뢰 장군 추모비와 혼암 홍경승(混庵 洪慶承)선생의 기적비가 있다.

// 부림홍씨 송강 홍천뢰(松岡 洪天賚) 가계//

 6대조 진사 죽헌 홍민구(竹軒 洪敏求)

 5대조 문하사인 경재 홍로(敬齋 洪魯,1366~1392)

고조부 어모장군 홍재명(洪在明)

증조부 홍찬(洪瓚)

   조부 홍제문(洪悌文)

   부친 부장 홍덕기(洪德器)

           송강 홍천뢰(松岡 洪天賚,1564~1614) 창의정용군(昌義精勇軍)

           배위 순창설씨, 충의공 설위근(설尉勤)

                   장남 홍엄(洪曮),  차남 홍돈(洪暾),  삼남 홍경(洪曔)

 

 

혼암 홍경승(混庵 洪慶承) 선생 기적비

宣武原從功臣 混庵缶林洪公諱慶承先生紀績碑

선무원종공신    혼암부림홍공휘경승선생 기적비

혼암 홍경승(混庵 洪慶承,1567~ ? )

본관은 풍산(豊山), ​자(字)는 군하(君賀), 호(號)는 혼암(混庵)

그는 나라의 위기 앞에서 붓 대신 칼을 들었던 선비로,

특히 경북 영천 지역을 중심으로 큰 공을 세운 인물이다.

고려 시대 국자감 생원이었던 홍지경(洪之慶)의 후손이며,

대대로 학문적 기반이 탄탄한 영남의 선비 가문 출신으로서, ​

1592년 임진왜란이 발발하자,

그는 영남 지역의 대표적인 의병장인 권응수(權應銖,1546~1608) 장군의 휘하로 들어가서

임진왜란 초기 육지에서 거둔 가장 빛나는 승리 중 하나인

영천성 탈환 작전 일명 영천성 복성 전투(永川城 復城 戰鬪)에 참여하여

전투를 하며 군대 내에서 군수물자 관리와 문서작성 업무를 전담하며,

의병 부대의 행정과 보급을 책임지는 양료관(糧料官)의 막중한 역할을 수행하였다.

임진왜란이 끝난 후에도 권력을 탐하지 않고

향리인 군위 한밤마을로 돌아와 학문에 전념하며 후학을 양성하였으며,

혼암집(混庵集)은 그의 생애와 임진왜란 당시의 기록을 후대에 정리된 문집으로

당시 의병들의 활동상과 지역 사회의 대응을 보여주는 귀중한 역사 자료로 평가받고 있다.

영천 지역 의병들의 공적을 기록한 명부인 영천 창의정충록(彰義精忠錄)에 그의 이름이 당당히 올라가 있다.

글을 읽던 선비가 나라의 위기에 어떻게 행동해야 하는가 를 몸소 보여준 전형적인 영남 의병의 표상이다.

//부림홍씨 혼암 홍경승(混庵 洪慶承) 가계//

 7대조 진사 죽헌 홍민구(竹軒 洪敏求)

 6대조 문하사인 경재 홍로(敬齋 洪魯,1366~1392)

 5대조 고조부 어모장군 홍재명(洪在明)

고조부 홍구(洪球)

증조부 홍우준(洪禹濬)

   조부 홍중헌(洪仲獻)

   부친 홍거원(洪巨源)

          혼암 홍경승(混庵 洪慶承,1567~ ? )

                  장남 홍여훈(洪汝勳)

                  차남 홍여업(洪汝業)

천 년을 이어온 전통마을의 정겨움이 있는   한밤 돌담 마을

군위군 부계면 대율리 한밤마을     진동단(鎭洞壇)  진동단

진동단(鎭洞檀)

화강암으로 세운 솟대의 꼭대기에는 오리 한 마리가 앙증맞게 자리를 잡고 있는데,

이 진동단(鎭洞檀)은  한밤마을 대율리(大栗)의 풍수지리학적 위치와 연관이 있다.

배의 형세를 띤 한밤마을이기에 돛대 또는 닻의 역할을 하는

진동단(鎭洞檀)을 세워 움직임을 다스려달라고 기원을 하는 것이라고 전한다.

특히 1930년의 대홍수 이후로는 그 필요성이 더욱 절실해진 것인지,

현재의 진동단(鎭洞檀) 솟대는 1966년 아예 화강암으로 세운 것이라고 하며, 

이와 관련해 한밤마을에는 어디에도 우물이 없다고 한다.

마을 자체가 배의 형상이니 우물은 배에 구멍을 뚫는 거나 마찬가지란 이유에서다.

우물이 없는 것이 마을이 형성된 때부터인지,

대홍수 이후부터 만들어진 금기인지는 알 수 없다고 한다.

縣監閔侯諱泳學永世不忘碑

현감민후휘영학 영세불망비

현감 민영학 영세불망비

관찰사 홍상국 ?? 영세불망비

 

효자 홍영섭(洪永燮) 지비

孝子 缶林洪公永燮之碑

효자 부림홍공영섭지비

효자 홍영섭(洪永燮                       경북도청 홈에서

효자 홍영섭(洪永燮)은 관향이 부림으로 향리(鄕里)인 부계면 율리(栗里에)서 1889년(고종 26년)에 태어났다. 어릴 때부터 부모를 섬기는 효심(孝心)이 지극하여 과일이나 맛난 음식이 생기면 먼저 입에 대지 않고 부모님께 드렸다. 8세 때 학문을 배우니 효행(孝行)이 더욱 깊어지고 인간으로서의 밝은 도리(道理)가 두터워졌다. 10세 때 어머님께서 병환으로 자리에 눕게되자 병간호에 온갖 정성을 다함은 물론이었으며 목욕을 하여 몸을 깨끗이 하고 마음을 가다듬어 부정(不淨)을 피하였으며 어머님의 쾌유를 위해 팔공산(八公山)에 올라가 수개월 동안 산신(山神)께 빌었다.

 

하느님도 무심하여 이듬해 모친이 별세(別世)하자 무덤 가에 묘막(墓幕)을 지어 3년간 묘소(墓所)를 떠나지 않고 지키며 생활하니 이웃 사람들은 효자라 칭송(稱頌)하였다. 엄동설한(嚴冬雪寒)의 차가운 날에도 여막을 떠나지 않으니 조카가 찾아와서 병이 나실까 염려하여 들어가기를 청하니 듣지 않았다. 그후 20세에 부친이 병으로 자리에 눕자 밤낮으로 간호함이 사람으로서는 더할 수 없었다. 이웃 친척의 잔치에 참석하여 모두들 술과 맛있는 고기를 먹으며 즐기는데 홀로 앉아 슬픈 빛을 보이자 친구가 그 사유를 물었더니 말하기를 "집에 어른이 병환으로 누워 계시는데 자식으로 어찌 맛있는 고기와 술을 즐기겠는가?"하여 주위 사람들을 감동케 하였다.

 

26세 때 어느 날 마을에 도적이 침입하여 많은 사람들을 살상(殺傷)하며 날뛰었으나 그는 피하지 않고 도적들을 타일러 돌려보냈다. 부친상을 당하자 장례전날 광중(壙中)에 들어가 아버지가 이곳에 묻혀 지낼 것을 생각하니 슬프기 한량없어 그 속에서 밤을 지새우고 돌아왔다. 부친 장례 후에는 무덤 옆에 막을 짓고 3년 동안 비바람과 차가운 눈을 맞으며 생활하던 어느 날 많은 비가 내려 큰물이 났다. 이때 물에 빠져 허우적거리는 호랑이를 발견하고 온 힘을 다하여 그 호랑이를 구해 주었다. 그후 호랑이는 밤마다 여막을 지키는 충효자 곁에 와서 함께 밤을 세우고 새벽녘에 산 속으로 들어갔다.

 

공(公)이 31세에 세상을 떠나자 그 호랑이가 문밖에 와서 크게 울며 슬퍼하였고 까마귀 떼들이 온 하늘을 덮어 하늘이 내린 효자(孝子)의 마지막 길을 조상(弔喪)하였다. 실로 충효자의 효심은 하늘은 물론 짐승까지도 감동케 하였다. 현재 부계면 대율동 송림(松林)속에 충효자의 효심(孝心)을 기리는 비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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