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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주-상락후 정간공 온재 김영후(貞簡公 穩齋 金永煦),영삼사사 상락군 김천(金蕆),안렴사 오은 김사렴(梧隱 金士廉),양성현감 김취(金吹),

구름에 달

by 碧巖 2026. 6. 7. 21: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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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락후 정간공 온재 김영후(貞簡公 穩齋 金永煦)

충북 청주시 청원구 오창읍 모정리 산8

상락후 정간공 온재 김영후(貞簡公 穩齋 金永煦) 지단

高麗上洛侯金公諱永煦 上黨國大夫人淸州韓氏之壇

고려상락후김공휘영후  상당국대부인 청주한씨지단

 

영삼사사 상락군 김천(金蕆) 지단

高麗奉翊大夫金公諱蕆 三韓國大夫人玄風郭氏之壇

고려봉익대부김공휘천  삼한국대부인 현풍곽씨지단

선세사적 정간공부군   영삼사사공부군   설단영건기

 

高麗忠臣壁上三韓三重大匡 左政丞上洛侯福昌府院君

諡貞簡安東金公永煦事蹟碑

고려충신벽상삼한삼중대광 좌정승 상락후 복창부원군

시정간 안동김공영후사적비

상락후 정간공 온재 김영후(上洛侯 貞簡公 穩齋 金永煦,1292충렬왕18~1361공민왕10)=70세

고려 말기의 문신. 본관은 안동. 호는 온재(穩齋), 균헌(筠軒).

조부는 충렬공 김방경(忠烈公 金方慶),

아버지는 판삼사사 상락군 문영공 김순(上洛君 文英公 金恂,1258~1321)이다.

1325년(충숙왕12, 1294~1339) 7월 산원(散員) 장세(張世)가

소윤(少尹) 임준경(林俊卿)의 말을 빼앗은 사건이 일어나자 지평(持平)으로서 장령(掌令) 김원식(金元軾)과 함께

총신(寵臣)의 비호를 물리치고 치죄(治罪)를 청하였다.

 

1339년(충숙왕 복위8) 4월 삼사우윤(三司右尹)으로 원나라에 가서 부처의 화상을

바쳤으며, 충혜왕,1315~1344)이 자신을 헐뜯던 신청(申靑)을 이문소(理問所)에 가두고

그의 죄상을 행성(行省)에서 기록하여 중서성에 올릴 때 이를 가지고 원나라에 갔다.

1341년(충혜왕 복위2) 6월 조적(曺頔, ?~1339)의 난으로 왕이 원도(元都)에 갔을 때

간신들이 변란을 꾸몄으나, 왕을 시종한 공으로 삼사우사(三司右使)로서 일등공신에

봉해지고 전(田) 100결과 노비 10구를 받았다.

 

1342년 심양왕 왕고(瀋陽王 王暠, ?~1345)의 모반에 참가하지 않고

원나라에서 충혜왕을 시종한 공으로 추성보절동덕익찬공신(推誠保節同德翊贊功臣)의 호를 받았다.

 

1343년 11월 원나라의 자정원사(資政院使) 고용보(高龍普, ?~1362) 등이

충혜왕을 잡아갈 때 시종한 백관들이 모두 도망갔으나 끝까지 남아 충혜왕을 보호하다가 창에 맞기도 하였다.

1344년 10월 충목왕이 즉위하자 찬성사가 되고,

이듬해 정월 정방이 부활하였을 때 찬성사로서 제조관(提調官)이 되었다.

12월에는 좌정승으로 원나라에 가서 방물(方物)을 바쳤으며 우정승에 승진되었다.

1346년 5월 원나라에 사신으로 다녀왔으며,

1352년(공민왕 1) 8월 복창부원군(福昌府院君)에 봉해지고 서연(書筵)에 입시하여

변정도감을 파할 것을 주장했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자 병을 칭하고 조정에 나가지 않았다.

 

1356년 원나라에서 왕에게 친인보의선력봉국창혜정원(親仁保義宣力 奉國彰惠靖遠)이라는

공신호를 내린 것에 사은(謝恩)하기 위하여 원나라에 갔다가 돌아온 뒤

상락후(上洛侯)에 봉해졌다. 시호는 정간(貞簡)이다.

상락후 정간공 온재 김영후(上洛侯 貞簡公 穩齋 金永煦,1292충렬왕18~1361공민왕10)=70

고려 말기의 문신. 본관은 안동. 호는 온재(穩齋), 균헌(筠軒).

조부는 충렬공 김방경(忠烈公 金方慶),

아버지는 판삼사사 상락군 문영공 김순(上洛君 文英公 金恂,1258~1321)이다.

 

1325(충숙왕12, 1294~1339) 7월 산원(散員) 장세(張世)가 소윤(少尹) 임준경(林俊卿)의 말을 빼앗은 사건이 일어나자 지평(持平)으로서 장령(掌令) 김원식(金元軾)과 함께

총신(寵臣)의 비호를 물리치고 치죄(治罪)를 청하였다.

 

1339(충숙왕 복위8) 4월 삼사우윤(三司右尹)으로 원나라에 가서 부처의 화상을

바쳤으며, 충혜왕,1315~1344)이 자신을 헐뜯던 신청(申靑)을 이문소(理問所)에 가두고

그의 죄상을 행성(行省)에서 기록하여 중서성에 올릴 때 이를 가지고 원나라에 갔다.

 

1341(충혜왕 복위2) 6월 조적(曺頔, ?~1339)의 난으로 왕이 원도(元都)에 갔을 때

간신들이 변란을 꾸몄으나, 왕을 시종한 공으로 삼사우사(三司右使)로서 일등공신에

봉해지고 전() 100결과 노비 10구를 받았다.

 

1342년 심양왕 왕고(瀋陽王 王暠, ?~1345)의 모반에 참가하지 않고 원나라에서 충혜왕을 시종한 공으로 추성보절동덕익찬공신(推誠保節同德翊贊功臣)의 호를 받았다.

 

134311월 원나라의 자정원사(資政院使) 고용보(高龍普, ?~1362) 등이 충혜왕을 잡아갈 때 시종한 백관들이 모두 도망갔으나 끝까지 남아 충혜왕을 보호하다가 창에 맞기도

하였다. 134410월 충목왕이 즉위하자 찬성사가 되고, 이듬해 정월 정방이 부활하였을 때 찬성사로서 제조관(提調官)이 되었다. 12월에는 좌정승으로 원나라에 가서 방물(方物) 바쳤으며 우정승에 승진되었다. 13465월 원나라에 사신으로 다녀왔으며,

1352(공민왕 1) 8월 복창부원군(福昌府院君)에 봉해지고 서연(書筵)에 입시하여

변정도감을 파할 것을 주장했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자 병을 칭하고 조정에 나가지 않았다.

 

1356년 원나라에서 왕에게 친인보의선력봉국창혜정원(親仁保義宣力 奉國彰惠靖遠)이라는

공신호를 내린 것에 사은(謝恩)하기 위하여 원나라에 갔다가 돌아온 뒤

상락후(上洛侯)에 봉해졌다. 시호는 정간(貞簡)이다.

子孫果賢與 國家自用之 苟不賢與雖 得之其可保乎

자손과현여   국가자용지   구불현여수   득지기가보호.

 

온재 김영후선생 어록비(穩齋 金永煦先生 語錄碑)

子孫果賢與 國家自用之 苟不賢與雖 得之其可保乎

자손과현여  국가자용지  구불현여수  득지기가보호

자제가 과연 현명하다면 국가에서 스스로 선발하여 쓸 것이요

만일 현명하지 못하다면 비록 관직을 얻었다 하여도 그것을 지킬 수 있겠는가.

이 글은 김영후 선생이 좌정승으로 계실 때 혹자(或者)가 선생에게 말하기를

손자들이 20세가 넘었는데 관직을 구해 주어야 하지 않겠는가 라고 하니

선생께서 하신 말씀이다.

고려사와 족보에 기록되어 있다.

이때에 안렴사공 사렴(士廉)은 이미 등과 하였고

선생의 말씀에 영향을 받아 충강공 사안(士安)은 관찰사에 오르고

익원공 사형(士衡)은 상락부원군 좌정승에

서운관정공 수(綏)는 서운관정에 올라 가문을 빛냈다.

스스로 갈고 닦아 국가에 필요한 인재가 되라는 말씀이다.

 

 

 

 

 

 

안렴사 오은 김사렴(梧隱 金士廉)

청주시 향토유적

안렴사공 오은 김사렴(梧隱 金士廉,1335~1405)

유명평총 일편도산 만고수양(遺命平塚 一片陶山 萬古首陽)

고려 말 충신 안동김씨 김사렴(金士廉)의 충절은 후세에까지 귀감으로 통한다.

김사렴은 어려서부터 학문에 힘써 문장에 능하였으며, 공민왕 초에 과거에 급제하여

벼슬이 안렴사(按廉使, 지방장관)에 이르렀다.

포은 정몽주(圃隱 鄭夢周,1338~1392), 목은 이색(牧隱 李穡,1328~1396)과 친교가

두터웠으며 함께 직간(直諫)으로 이름이 높았다.

익원공 낙포 김사형(翼元公 洛圃 金士衡,1341-1407)의 친형님이다.

1365년(공민왕 14) 왕이 신돈(辛旽,1323~1371)을 총애하여

신돈에게 벽상삼한삼중대광 집현전대학사를 더하고 공신의 호를 내리자,

김사렴은 그가 고려의 사직을 위태롭게 할 인물이라고 탄핵하였다.

조야가 모두 침묵을 지키고 있었는데 김사렴이 홀로 탄핵을 한 것이다.

1392년 고려가 망하고 이성계(李成桂,1335~1408)가 조선을 건국하자

충신은 불사이군(不事二君)이라 하여 청주에 은거하였다. 

태조 이성계가 수차례에 걸쳐 불렀으나 거절하고 도산(陶山)으로 옮겨 두문불출하였다. 

기록에 의하면 그는 한양 쪽을 향해 앉지도 않았으며 죽음에 임해서는 

고려의 신하로 군왕을 보필하여 나라를 보존치 못했을 뿐 아니라

신순(身殉:죽음으로 나라를 지키는 것)하지도 못한 죄인이 무슨 면목으로 죽어서 선왕을 뵐 것인가, 

내가 죽은 뒤 심심산중에 묻어 봉토(封土)하지 말며 돌을 세우지 말라 라는

유명평총(遺命平塚)의 유언을 남겼다고 한다. 후손들에게는 벼슬에 나가지 말 것을 당부했다.

김사렴의 묘는 그가 죽은지 273년만인 1678년(숙종4년)에 후손들에 의해

석곽 중의 지석(誌石)이 발견되어 즉시 봉분을 만들어 시향 지내기를 계속하였다.

영모재(永慕齋)는 1678년 김사렴의 학문도덕을 숭모하는 선비들이 강학도장으로 세웠으며

안렴사공 묘소의 재궁으로 쓰이고 있다.

숙종은 그의 충절(忠節)을 가상히 여겨

 일편도산 만고수양(一片陶山 萬古首陽)‘이라는 과제(課題)로 과거(科擧)를 보았고,

우암 송시열은 충병일월 절고산악 일편도산 만고수양

(忠昞日月 節高山岳 一片陶山 萬古首陽)이라고 그를 칭송하였다.

高麗忠臣按廉使金公士廉之墓

고려충신 안렴사 김공사렴지묘

안렴사 오은 김사렴(梧隱 金士廉) 묘역후경

안렴사 오은 김사렴(梧隱 金士廉) 신도비각

高麗忠臣按廉使梧隱金先生神道碑銘幷序

고려충신안렴사 오은김선생 신도비명병서

嘉善大夫禮曹參判 同知經筵實錄事 成均館大司成

奎章閣直提學知製敎 外裔南公轍 撰

가선대부예조참판 동지경연실록사 성균관대사성

규장각직제학지제교 외예남공철 찬

二十代孫 彰會書幷篆 이십대손 창회서병전

영모재

 

 

영모재 편액

조상유택 참배하니 고향집에 다시 온 듯

처음만난 종친들도 죽마고우 다시 본 듯

초면의 일가친척 아저씨 형님 부르매

조상님의 끼친 음덕 한 덩어리 웃음되네

할아버님 할머니 백골안녕하소서

명년에 다시 찿아 참배 하겠나이다

향사마친 청아한 맘 날아갈 듯 가쁜한데

종친들과 작별인사 가는 걸음 무거워라

 

 

 

원종공신 양성현감 김취(金吹)

通訓大夫行陽城縣監 安東金公諱吹之墓 配淑人李氏

통훈대부행양성현감  안동김공휘취지묘  배숙인이씨

 

//안동김씨 안렴사공파 양성현감 김취(金吹) 가계//

7대조 상락공 충렬공 김방경(忠烈公 金方慶,1212~1300)

6대조 판삼사사 문영공 김순(文英公 金恂)

5대조 상락후 정간공 온재 김영후(貞簡公 穩齋 金永煦)

5대조모 상당국대부인 청주한씨, 전교시령 한보(韓譜)의 따님

고조부 영삼사사 상락군 김천(金蕆)

고조모 삼한국대부인 현풍곽씨, 포산군 문헌공 석천 곽원진(苞山君 文憲公 石川 郭元振)의 따님

증조부 안렴사 오은 김사렴(梧隱 金士廉,1335~1405)

증조모 순흥안씨, 정당문학 순성군 문혜공 안원숭(順成君 文惠公 安元崇)의 따님

조부 소윤 김약(金瀹)

부친 지주사 김우주(金遇周)

모친 숙부인 문화유씨,

        형님 승문원판교 김환(金丸)

               조카 사헌부감찰 김종손(金宗孫)

        동생 김연(金演)

                조카 진사 김치손(金致孫)

        동생 사헌부지평 김여(金礪)

                조카 상원군수 김적(金廸)

        원종공신 양성현감 김취(金吹)

        배위 숙인 이씨

               장남 찰방 김철손(金鐵孫)

                      손자 충무위 어모장군 김장(金墻)

                              증손자 시강원습독 김백일(金百鎰)

                              증손자 진사 김천일(金千鎰)

                              증손자 사용 김만일(金萬鎰)

               차남 사용 김균손(金均孫)

                       손자 헌릉참봉 김숙(金琡), 생부 상원군수 김적(金廸)

                              증손자 통덕랑 김영수(金泳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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