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름에 달

괴산-우암 송시열,문정공,화양동주, 왕자사부

碧巖 2016. 7. 1. 22: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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文正公 尤菴 宋時烈先生 墓域 충북 괴산군 청천면 청천리 7-1

 

文正公 尤菴 宋時烈 문정공 우암 송시열 1607(선조 40)1689(숙종 15).

본관 恩津은진.

兒名 聖賚성뢰, 字 英甫영보, 號 尤庵우암, 尤齋우재, 華陽洞主화양동주. 諡號 文正문정

 

가계도

曾祖父  奉事 宋龜壽  봉사 송구수

   祖父  都事 宋應期 도사 송응기

   伯父  宋欽祚  송흠조

   仲父  宋承祚  송승조

   仲父  宋天祚  송천조

   仲父  宋邦祚  송방조

      父  司饔院奉事 宋甲祚 사옹원봉사 송갑조

      母  善山郭氏 奉事 郭自防 女 선산곽씨 봉사 곽자방의 녀

 

      본  송시열(宋時烈)

   配位  韓山李氏 都事 李德泗의 女 한산이씨 도사 이덕사의 녀

      子  宋基泰 系 都正 송기태 계 도정

   子婦  李挺蓮이정연의 여

      女  權惟 縣監 권유 현감

      女  尹전윤전

      兄  宋時熹 송시희

      兄  縣監 宋時默 현감 송시묵

      弟  縣監 宋時燾 현감 송시도 

      弟  監役 宋時杰 감역 송시걸 

 

 

충청도 옥천군 구룡촌(九龍村) 외가에서 태어나 26(1632) 때까지 그 곳에서 살았다.

그러나 뒤에 회덕(懷德)의 송촌(宋村비래동(飛來洞소제(蘇堤) 등지로

옮겨가며 살았으므로 세칭 회덕인으로 알려져 있다.

8세 때부터 친척인 송준길(宋浚吉)의 집에서 함께 공부하게 되어,

훗날 양송(兩宋)으로 불리는 특별한 교분을 맺게 되었다.

 

12세 때 아버지로부터 격몽요결 擊蒙要訣·기묘록 己卯錄등을 배우면서

주자(朱子이이(李珥조광조(趙光祖) 등을 흠모하도록 가르침을 받았다.

 

1625(인조 3) 도사 이덕사(李德泗)의 딸 한산 이씨(韓山李氏)와 혼인하였다.

이 무렵부터 연산(連山)의 김장생(金長生)에게서 성리학과 예학을 배웠고,

1631년 김장생이 죽은 뒤에는 그의 아들 김집(金集) 문하에서 학업을 마쳤다.

 

27세 때 생원시(生員試)에서 일음일양지위도 一陰一陽之謂道를 논술하여 장원으로 합격하였다.

이 때부터 그의 학문적 명성이 널리 알려졌고

2년 뒤인 1635년에는 봉림대군(鳳林大君 : 후일의 효종)의 사부(師傅)로 임명되었다.

1년 간의 사부 생활은 효종과 깊은 유대를 맺는 계기가 되었다.

 

그러나 병자호란으로 왕이 치욕을 당하고 소현세자와 봉림대군이 인질로 잡혀가자,

좌절감 속에서 낙향하여 10여 년 간 일체의 벼슬을 사양하고 전야에 묻혀 학문에만 몰두하였다.

 

1649년 효종이 즉위하여 척화파 및 재야학자들을 대거 기용하면서,

그에게도 세자시강원진선(世子侍講院進善사헌부장령(司憲府掌令) 등의 관직을 내리자 비로소 벼슬에 나아갔다.

 

이 때 그가 올린 기축봉사 己丑封事는 그의 정치적 소신을 장문으로 진술한 것인데,

그 중에서 특히 존주대의(尊周大義 : 춘추대의에 의거하여 中華를 명나라로 夷賊을 청나라로 구별하여 밝힘.)

복수설치(復讐雪恥 : 청나라에 당한 수치를 복수하고 설욕함.)를 역설한 것이

효종의 북벌 의지와 부합하여 장차 북벌 계획의 핵심 인물로 발탁되는 계기가 되였으나,

 

1650년 2 조선의 북벌 동향을 간파한 청나라의 여론으로

송시열을 포함한 산당(山黨) 일파가 모두 조정에서 물러났다.

그 뒤 1653(효종 4)에 충주목사,

1654년에 사헌부집의·동부승지 등에 임명되었으나 모두 사양하고 취임하지 않았다.

 

1655년에는 모친상을 당하여 10년 가까이 향리에서 은둔 생활을 보냈다.

1657년 상을 마치자 곧 세자시강원찬선(世子侍講院贊善)이 제수되었으나 사양하고,

대신 정유봉사 丁酉封事를 올려 시무책을 건의하였다.

16587월 효종의 간곡한 부탁으로 다시 찬선에 임명되어 관직에 나갔고,

9월에는 이조판서에 임명되어 다음 해 5월까지 왕의 절대적 신임 속에 북벌 계획의 중심 인물로 활약하였다.

 

그러나 16595월 효종이 급서한 뒤,

조대비(趙大妃)의 복제 문제로 예송(禮訟)이 일어나고,

국구(國舅) 김우명(金佑明) 일가와의 알력이 깊어진 데다,

국왕 현종에 대한 실망으로 그 해 12월 벼슬을 버리고 낙향하였다.

 

이후 현종 15년 간 조정에서 융숭한 예우와 부단한 초빙이 있었으나 거의 관직을 단념하였다.

다만 1668(현종 9) 우의정에, 1673년 좌의정에 임명되었을 때 잠시 조정에 나아갔을 뿐,

시종 재야에 머물러 있었다.

그러나 재야에 은거하여 있는 동안에도 선왕의 위광과 사림의 중망 때문에 막대한 정치적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었다.

 

사림의 여론은 그에 의해 좌우되었고 조정의 대신들은 매사를 그에게 물어 결정하는 형편이었다.

그러나 1674년 효종비의 상으로 인한 제2차 예송에서

그의 예론을 추종한 서인들이 패배하자 예를 그르친 죄로 파직, 삭출되었다.

1675(숙종 1) 정월덕원(德源)으로 유배되었다가 뒤에 장기(長鬐거제 등지로 이배되었다.

 

유배 기간 중에도 남인들의 가중 처벌 주장이 일어나, 한때 생명에 위협을 받기도 하였다.

1680년 경신환국으로 서인들이 다시 정권을 잡자, 유배에서 풀려나 중앙 정계에 복귀하였다.

그 해 10월 영중추부사 겸 영경연사(領中樞府事兼領經筵事)로 임명되었고, 또 봉조하(奉朝賀)의 영예를 받았다.

 

1682년 김석주(金錫胄김익훈(金益勳)

훈척들이 역모를 조작하여 남인들을 일망타진하고자 한 임신삼고변(壬申三告變) 사건에서

김장생의 손자였던 김익훈을 두둔하다가 서인의 젊은 층으로부터 비난을 받았다.

또 제자 윤증(尹拯)과의 불화로 1683년 노소분당이 일어나게 되었다.

 

16891월 숙의 장씨가 아들(후일의 경종)을 낳자

원자(元子:세자 예정자)의 호칭을 부여하는 문제로 기사환국이 일어나 서인이 축출되고 남인이 재집권했는데,

이 때 세자 책봉에 반대하는 소를 올렸다가 제주도로 유배되었다.

그러다가 그 해 6월 서울로 압송되어 오던 중 정읍에서 사약을 받고 죽었다.

 

그러나 1694년 갑술환국으로 다시 서인이 정권을 잡자

그의 억울한 죽음이 무죄로 인정되어 관작이 회복되고 제사가 내려졌다.

이 해 수원·정읍·충주 등지에 그를 제향하는 서원이 세워졌고,

다음해 시장(諡狀) 없이 문정(文正)이라는 시호가 내려졌다.

 

이 때부터 덕원·화양동을 비롯한 수많은 지역에 서원이 설립되어 전국적으로 약 70여 개 소에 이르게 되었는데,

그 중 사액서원만 37개소였다.

 

그의 행적에 대해서는 당파간에 칭송과 비방이 무성했으나,

1716년의 병신처분(丙申處分)1744(영조 20)의 문묘배향으로 학문적 권위와 정치적 정당성이 공인되었다.

영조 및 정조대에 노론 일당전제가 이루어지면서 그의 역사적 지위는 더욱 견고하게 확립되고 존중되었다.

 

송시열의 학문은 전적으로 주자의 학설을 계승한 것으로 자부했으나,

조광조이이김장생으로 이어진 조선 기호학파의 학통을 충실히 계승, 발전시킨 것이기도 하였다.

그는 언필칭 주자의 교의를 신봉하고 실천하는 것으로 평생의 사업을 삼았다.

저서로는 주자대전차의·주자어류소분·이정서분류 二程書分類·

            논맹문의통고 論孟問義通攷·경례의의 經禮疑義·심경석의 心經釋義·

            찬정소학언해 纂定小學諺解·주문초선 朱文抄選·계녀서등이 있다.

 

문집은 1717(숙종 43) 왕명에 따라 교서관에서 처음으로 편집,

167권을 철활자로 간행하여 우암집 尤菴集이라 하였다.

이후 1787(정조 11) 다시 빠진 글들을 수집, 보완하여

평양감영에서 목판으로 215102책을 출간하고 송자대전 宋子大全이라 명명하였다.

 

그 뒤 9대손 병선(秉璿병기(秉夔) 등에 의하여 송서습유 宋書拾遺9, 속습유 續拾遺1권이 간행되었다.

이들은 1971년 사문학회(斯文學會)에서 합본으로 영인, 송자대전7책으로 간행했고,

1981년부터 한글 발췌 번역본이 민족문화추진회에서 14책으로 출간되고 있다.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다음백과사전에서>

有名朝鮮左議政文正公尤菴宋先生墓  貞敬夫人李氏祔左

유명조선좌의정문정공우암송선생묘  정경부인이씨부좌

 

 

 

 

 

 

 

文正公 尤菴 宋時烈 문정공 우암 송시열 1607(선조 40)1689(숙종 15).

17세기 중엽 이후 붕당정치가 절정에 이르렀을 때 서인노론의 영수이자 사상적 지주로서 활동

효종의 즉위와 더불어 대거 정계에 진출해 산당(山黨)이라는 세력을 형성했던

송준길(宋浚吉이유태(李惟泰유계(兪棨김경여(金景餘윤선거(尹宣擧윤문거(尹文擧김익희(金益熙) 등과 함께

김장생(金長生김집(金集) 부자에게서 배웠다.

26세 때까지 외가인 충청도 옥천군 구룡촌에서 살다가 회덕(懷德)으로 옮겼다.

1633(인조 11) 생원시에 장원급제하고 최명길(崔鳴吉)의 천거로 경릉참봉이 되면서 관직생활에 발을 내디뎠다.

1635년 봉림대군(鳳林大君 : 뒤의 효종)의 사부(師傅)가 되었다.

 

이듬해 병자호란이 일어나자 인조를 따라 남한산성에 들어갔으나,

1637년 화의가 성립되어 왕이 항복하고 소현세자와 봉림대군이 청나라에 인질로 잡혀가게 되자

낙향하여 10여 년 간을 초야에 묻혀 학문에 몰두했다.

1649년 효종이 왕위에 올라 척화파와 산림(山林)들을 대거 기용하면서,

그도 장령에 등용되어 세자시강원진선을 거쳐 집의가 되었다.

이때 존주대의(尊周大義)와 복수설치(復讐雪恥)를 역설하는 글을 왕에게 올려 효종의 신임을 얻게 되었다.

 

그러나

청서파(淸西派 : 인조반정에 간여하지 않았던 서인세력)였던 그는

공서파(功西派 : 인조반정에 가담하여 공을 세운 서인 세력) 인 김자점(金自點)이 영의정에 임명되자 사직했다.

이듬해 김자점이 파직된 뒤 진선에 재임명되었다가 다시 물러났다.

그뒤 충주목사·사헌부집의·동부승지 등에 임명되었으나 모두 사양하고 향리에 은거하면서 후진양성에만 전념했다.

 

1658(효종 9) 다시 관직에 복귀하여 찬선을 거쳐 이조판서에 올라 효종과 함께 북벌계획을 추진했다.

 

이듬해 효종이 급서한 후 자의대비(慈懿大妃)의 복상(服喪) 문제를 둘러싸고 제1차 예송(禮訟)이 일어나자 송시열은

기년복(朞年服 : 1년 동안 상복을 입는 것)을 주장하면서

3년복(2년 동안 상복을 입는 것)을 주장했던 남인의 윤휴(尹鑴)와 대립했다.

 

예송은 대명률 大明律·경국대전의 국제기년설(國制朞年說)에 따라 결국 1년복으로 결정되었지만

이 일은 예론을 둘러싼 학문적 논쟁이 정권을 둘러싼 당쟁으로 파급되는 계기가 되었다.

예송을 통해 남인을 제압한 송시열은 효종에 이어 현종이 즉위한 뒤에도 숭록대부에 특진되고

이조판서에 판의금부사를 겸임한 데 이어 좌참찬에 임명되어

효종의 능지(陵誌)를 짓는 등 현종의 신임을 받으면서 서인의 지도자로서 자리를 굳혀 나갔다.

 

그러나 이때 효종의 장지(葬地)를 잘못 옮겼다는 탄핵이 있자 벼슬을 버리고 회덕으로 돌아갔다.

그뒤 여러 차례 조정의 부름을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향리에 묻혀 지냈으나,

사림의 여론을 주도하면서 막후에서 커다란 정치적 영향력을 행사했다.

1668(현종 9) 우의정에 올랐으나 좌의정 허적(許積)과의 불화로 곧 사직했다가

1671년 다시 우의정이 되었고 이어 허적의 후임으로 좌의정에 올랐다.

 

1674년 효종비 인선왕후(仁宣王后)가 죽자 다시 자의대비의 복상문제가 제기되어 2차 예송이 일어났을 때

대공설(大功說 : 9개월 동안 상복을 입는 것)을 주장했으나

기년설(朞年說 : 1년 동안 상복을 입는 것)을 내세운 남인에게 패배, 실각당했다.

 

이듬해 앞서의 1차 예송 때 예를 그르쳤다 하여 덕원으로 유배되었고,

이어 웅천·장기·거제·청풍 등지로 옮겨다니며 귀양살이를 했다.

1680(숙종 6) 경신대출척으로 남인들이 실각하고 서인들이 재집권하자

유배에서 풀려나 그해 10월 영중추부사 겸 영경연사로 다시 등용되었다.

그뒤 서인 내부에서 남인의 숙청문제를 둘러싸고 대립이 생겼을 때,

강경하게 남인을 제거할 것을 주장한 김석주(金錫胄김익훈(金益勳) 등을 지지했다.

이로써 서인은 1683년 윤증(尹拯) 등 소장파를 중심으로 한 소론과,

송시열을 중심으로 한 노장파의 노론으로 분열되기에 이르렀다.

 

1689년 숙의장씨가 낳은 아들(뒤의 경종)의 세자책봉이 시기상조라 하여 반대하는 상소를 올렸다가

숙종의 미움을 사 모든 관작을 삭탈당하고 제주로 유배되었다.

그해 6월 국문(鞠問)을 받기 위해 서울로 압송되던 길에 정읍에서 사약을 받고 죽었다.

 

학문경향과 정치사상

송시열은 젊은 시절 이이의 학통을 계승한 김장생과 그의 아들 김집의 문하에서 성리학과 예학을 수학했는데

그의 학문은 바로 이러한 기호학파의 학맥을 근간으로 형성되었다.

 

이기론(理氣論)에서 그는 이황의 이원론적인 이기호발설(理氣互發說)을 배격하고

이이의 기발이승일도설(氣發理乘一途說)을 지지,

사단칠정(四端七情)이 모두 이()라 하는 일원론적 사상을 발전시켰다.

또한 정통 성리학자로서 그는 주자의 학설을 전적으로 신봉하고 실천하는 것으로 평생의 업을 삼았다.

 

주자대전 朱子大全·주자어류 朱子語類의 연구에 몰두하여 주자대전차의 朱子大全箚疑·

주자어류소분 朱子語類小分등의 저술을 남긴 것은 이같은 그의 학문세계를 단적으로 보여주는 것이다.

그의 이러한 학풍은 기본적으로 양란 후의 사회적·정치적 동요를 수습해서 양반지배체제를 재건하고

나아가서는 조선과 명()'원수'인 청을 물리치고 중화적 세계질서를 회복하고자 한 현실인식의 반영이었다.

곧 주자학의 명분론인 삼강오륜을 사회운영의 원리로 파악하여,

청에 대한 복수의 근거를 명에 대한 강상·군신(君臣)의 관계에서 찾았다.

 

이같은 북벌론은 당연히 조선왕조의 부국강병 필요성을 제기하는 것이었고,

이를 위해 정치적·사회적인 측면에서 송시열이 강조했던 것은 '세도정치론'(世道政治論)이었다.

이는 강상윤리를 기초로 하는 사회기강의 확립과 주자학적인 의리(義理도학(道學)의 실현에 목표를 두는 것이었으며,

또 이의 실현주체로서 성학(聖學)의 수양을 쌓은 성인(聖人)으로서의 군주를 상정하는 것이었지만

그러한 군주가 없을 경우에는 현인(賢人) 재상(宰相)이 전권을 행사해야 한다는 주장이었다.

 

결국 현실적으로는

세도정치의 이상을 실현할 수 있는 군자당(君子黨)은 노론뿐이라는 당파적 이해를 대변하는 것이었다.

그러한 면에서 그는 주자의 교의에서 벗어나 본래의 공맹(孔孟)에서 유학을 재정립하고 군주 중심의

정치운영방식을 추구하고자 했던 허목(許穆)이나 윤휴 등 남인의 학자들과 커다란 차이를 드러냈던 것이다.

복상을 둘러싼 2차례의 예송에 깊이 간여하면서 남인과 대립했던 이면에는 이와 같은 입장의 차이가 있었다.

 

기사환국으로 노론이 실각하면서 송시열의 이같은 정치운영론은 일단 실패했으나,

18세기 후반 이후 노론의 일당전제정치 확립 이후

가장 영향력 있는 사상체계로서 정치와 학문 양 측면에서 거의 독점적인 지위를 구축했다.

 

지주제유지론과 부세제도개혁론

송시열은 보수적인 서인, 특히 노론의 입장을 대변하여

명에 대한 존주대의와 병자호란에 대한 복수설치가 국가정책의 기조가 되어야 함을 역설했다.

 

그것은 춘추대의(春秋大義)에 입각한 유교적 명분론의 표현임과 동시에

양란 이후 국가재조(國家再造)의 과정에서 요구되는

국가기강의 확립과 민생의 안정을 위한 강력한 통치이념의 필요에서 나온 것이기도 했다.

국가재조의 방향에 있어서 그는 봉건국가의 틀을 유지·강화하는 가운데 그 운영을 개선하여

양란 이후의 사회적 모순에 대처해나가려는 입장을 분명히 했다.

송시열은 이 시기 정전론(井田論기전론(箕田論)으로 집약되던 토지개혁론에 대해 반대했다.

 

곧 그는 주자의 정전제난행설(井田制難行說)에 따라 정전제는 토지가 적고 인구가 많은 시기에는 실현할 수 없으며

병란을 거치고 인구가 감소한 뒤가 아니면 시행할 수 없는 것이라고 주장했다.

따라서 그가 양란 후의 사회경제 재건을 위해 내놓은 대책은

부세제도(賦稅制度)와 재정제도를 부분적으로 개선하는 방향이었다.

즉 부세제도의 개선을 통해서 문란해진 농민수취 질서를 재정비하여 농민부담을 경감시키는 한편

국가재정을 강화한다는 것이 그 주요내용이었다.

내수사(內需司) 혁파, 궁방전(宮房田) 억제, 군영(軍營) 감축, 호적법·호패법·향약·사창법·노비종모법(奴婢從母法

대동법·호포법 등의 재정비·실시 등 송시열이 제기한 구체적 방책들은 농민의 각종 세의 부담을 줄이는 대신,

세를 부담하는 양민층을 확대하고 국가의 재용(財用)을 절감함으로써 국가재정을 튼튼히 하고자 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사회경제제도의 근본적 개혁을 통해 민산(民産)을 안정·발전시키는 것이 강력하게 요구되는 시점에서

송시열의 부분적인 제도개선책으로서는 점차 높아가는 사회불안과 체제동요를 막을 수 없었다.

송시열이 강상윤리를 강조하고 이를 통해 국가·사회기강을 철저히 확립하고자 했던것은 이를 염두에 둔 것이기도 했다.

 

1694년 갑술옥사로 서인이 다시 정권을 잡으면서 신원되어 관작이 회복되었다.

 

그해에 수원·정읍·충주 등지에 그를 제향하는 서원이 세워졌고, 다음해에는 문정(文正)이란 시호를 받았다.

이때부터 화양동을 비롯한 전국 각지에 약 70여 개 소에 이르는 서원이 세워졌다.

1716(숙종 42)의 병신처분(丙申處分)1744(영조 20)의 문묘배향을 통해

그의 학문적·정치적 권위가 국가의 공인을 받게 되었으며,

특히 영조·정조 이후 노론 일당전제가 이루어지면서 사상적 지주로서의 지위를 확고히 구축하게 되었다.

제자로는 윤증이 가장 촉망되었으나 그 아버지의 묘지문 문제로 노론·소론으로 분당되어 서로 대립하는 관계가 되었다.

 

그의 학통을 이어받은 권상하(權尙夏)의 문하에서 한원진(韓元震윤봉구(尹鳳九이간(李柬)

이른바 강문8학사가 나왔는데 이들은 조선 후기 기호학파 성리학의 주류를 형성했던 인물들이었다.

이들을 통하여 송시열의 주자학적인 정치·경제·사회 사상은 조선 후기 성리학의 정통적 흐름이자,

가장 강력한 지배 이데올로기로서 기능하게 되었다.

저서로는 주자대전차의·주자어류소분·이정서분류 二程書分類·논맹문의통고 論孟問義通攷·

경례의의 經禮疑義·심경석의 心經釋義·찬정소학언해 纂定小學諺解·주문초선 朱文抄選·

계녀서 戒女書등이 있으며,

문집으로는 1717(숙종 43) 교서관에서 간행된 우암집

167권과 1787(정조 11) 평양감영에서 출간한 송자대전 宋子大全215권이 있다.

 

그뒤 9대손 병선(秉璿병기(秉夔) 등이 송서습유 宋書拾遺9, 속습유 續拾遺1권을 간행했다.

尤菴 宋時烈先生 우암 송시열선생 초상

조선 후기의 문신 송시열의 초상화. 작자 미상. 비단 바탕에 채색. 67.3*89.7. 국보239. 국립중앙박물관소장.

그림에는 1651년에 송시열이 지은 제시와 정조가 1778년에 쓴 어제찬문이 들어 있다.

복건에 유복 차림을 한 좌안7분면의 반신상으로,

사후에 숭모의 마음에서 생시진본을 범본으로 하여 제작된 것으로 보인다.

 

우암 송시열 글씨 / 명가필보에서

 

 

尤菴先生 墓域 後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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王子師傅왕자사부

권설직(權設職)으로, 1785(정조 9) 대전통편(大典通編)에 명문화됨으로써 임시로 증치된 관직이다.

품계는 종9품으로 사과 이하의 체아록(遞兒祿)을 받았다.

대군사부(大君師傅왕손교부(王孫敎傅내시교관(內侍敎官) 등의 권설직은

재직기간 900일이 지나면 6품관으로 승급되었다.

宋子玄孫王子師傅府君  配令人尹氏 之墓

송자현손왕자사부부군  배영인윤씨 지묘

 

 

 

宋子玄孫王子師傅府君 墓域 後景

송자현손왕자사부부군 묘역 후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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通仕郞成均館進士恩津宋公諱在哲之墓  配端人延日鄭氏祔右

통사랑성균관진사은진송공휘재철지묘  배단인영일정씨부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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宋尤菴 神道碑閣