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름에 달

대마도 학봉 김성일선생 시비,

碧巖 2016. 7. 15. 22: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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朝鮮國通信使 鶴峯 金誠一先生詩碑

조선국통신사 학봉 김성일선생시비

 

본관  의성(義城).

   字  사순(士純).

   號  학봉(鶴峯).

諡號   문충(文忠)

안동 임하(臨河) 출생.

1556(명종 11) 도산서원으로 가서 이황(李滉)을 만나 그 문하생이 되었다.

1562년 승려 보우(普雨)의 말에 따라 문정왕후가 희릉(禧陵)을 옮기려 하자,

유생의 신분으로 이에 반대하는 상소문을 지었다.

1564년 진사시, 1567년 대과에 합격하여 승문원 부정자(副正字)에 임명되었다.

이후 정자(正字) ·대교(待敎) ·봉교(奉敎) 등을 역임하고,

1572(선조 5)에는 상소를 올려 사육신을 복관시키고 종친을 등용할 것 등을 주장하였다.

1573년 전적 ·수찬 등을 시작으로 병조좌랑 ·이조좌랑 등의 요직을 거쳐,

1577년 사은사(謝恩使) 서장관으로 명나라에 파견되어 종계변무(宗系辨誣)에 노력하였다.

사행 길에 요동에서 정학서원(正學書院)을 방문하여 중국 선비들과 학문하는 목적을 놓고 토론하였다.

귀국 이듬해인 1579년 홍문관교리를 거쳐 사헌부장령에 임명되어

시사를 과감하게 비판하고 종실의 비리를 탄핵하여 대궐의 호랑이[殿上虎]라는 별명을 얻었다.

1580년 함경도순무어사(咸鏡道巡撫御使)가 되어 영흥 ·함흥 ·삼수 ·길주 ·명천 등의 고을을 순행하면서

민정을 살피고 수령들의 근무태도를 점검하였다.

1583년 특지로 나주목사가 되어 장기간 끌어온 민사상의 송사(訟事)를 해결하는 등 선정을 베풀었다.

당시 김여물(金汝岉)이 순무어사로 나주에 파견되어 민가에서 술을 마시고 밤에 관아로 오자,

그를 꾸짖고 문을 열어주지 않는 강직함을 보였다.

1589년 의정부사인(舍人)으로 있을 때

도요토미 히데요시[豊臣秀吉]가 보낸 현소(玄蘇) ·평의지(平義智) 등과 일본과의 통호문제를 의논하였다.

이즈하라 학익산 서산사

1590(선조 23) 3월 일본 사정을 탐지하려고 파견된 통신사행에 부사(副使)로 임명되어

(정사 황윤길, 서장관 허성)이듬해 2월까지 1년 동안 일본에 다녀왔다.

일본에 들어간 직후부터

정사 황윤길(黃允吉) 등과 관백(關伯)에게 예를 표하는 절차를 놓고 심한 의견 대립을 보였는데,

그는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일본의 국왕이 아니므로 왕과 동일한 예를 베풀 수 없다고 주장하여 이를 관철시켰다.

당시 일본을 야만국으로 보았던 그는

당당한 문명국 조선의 대표자로서 예법으로 무장한 선비의 위상을 지키기 위해 무던히 노력했다.

일례로 대마도주가 국분사(國分寺)에서 연회를 베풀었을 때

가마를 타고 연회장으로 들어오는 무례를 범하자 대노하여 즉시 방으로 들어가 버렸다.

이에 당황한 대마도주는 애꿎은 가마꾼의 목을 베고 극력 사죄했다.

 

또 왜인이 바친 예단에 조선국사신래조(朝鮮國使臣來朝)’라 되어 있자 받지 않았고,

국서에 각하(閣下)’, ‘방물(方物)’이라 되어 있는 부분을 지적하여 각각 전하(殿下)’예폐(禮幣)’로 바꾸게 했다. 관백 도요토미 히데요시를 접견할 때는 군신의 예인 정하배(庭下拜)’의 부당성을 지적하고

당에 올라 예를 표하는 영외배(楹外拜)’를 관철시켰다.

이런 그를 두고 황윤길은 일본인과 다투어 얻는 것보다 잃는 것이 많지 않느냐고 비판했고,

허성은 그가 지나치게 체모를 따져서 평지풍파를 일으킨다고 불평했다.

훗날 고니시 유키나가의 통역관인 요시라는 당시 조선통신사들의 행태를 이렇게 평했다.

황윤길은 술에 취해 혼수상태였고,

  김성일은 절의 때문에 형세를 두루 살피지 않았으며,

  허성은 자신이 낮은 지위에 있다하여 두루 살피지 않았다.”

 

상황이 그랬으므로 통신사가 15912월 부산에 돌아와 복명한 내용이 전혀 딴판이었다.

각기 조정에 상소를 올릴 때,

황윤길'반드시 왜군의 침입이 있을 것'이라고 보고하였고,

김성일'그렇지 않다'고 하며, 자신은 병란의 조짐을 발견하지 못했다면서 두려운 것은 섬나라 도적이 아니라

민심이니 내치에 힘쓰라고 반박했다. 이 보고 때문에 임진왜란을 불러온 장본인으로 각인되었고,

이런 김성일의 복명에 의심을 품은 선조는 왜란 발발 직전 그를 경상우도 병마절도사에 제수했다.

조정의 중신을 외직으로 쫓아낸 것이다.

이어서 왜란이 발발하자 파직되어 국사를 그르친 죄인이라 하여 죽이려 했지만

곧 류성룡 등의 만류와 변호로 공을 세울 수 있는 기회가 주어져, 경상우도 초유사(招諭使)로 임명되었다.

경상도로 내려가 의병장 곽재우를 도와 의병활동을 하며,

의병을 두루 모으고 관군과 의병간의 협력도 도모케 했다.

임진왜란이 일어난 그 해 8월 경상도 관찰사로 임명되어 충정을 다할 기회를 맞았다.

의병을 규합하고 군량미를 모으며, 김시민(金時敏)을 도와 진주성을 왜군으로부터 지키도록 하였다.

1593년 순찰사로서 각 고을의 항전 상태를 살피고 독려하기도 하였으나 병으로 곧 세상을 떠났다.

주리설을 따랐고, 예학에도 밝아 '가례'를 준수하였다.

저서로는 해사록 海槎錄》 《상례고증 喪禮考證등이 있다.

안동의 호계서원(虎溪書院), 사빈(泗濱)서원, 영양의 영산(英山)서원, 의성 빙계(氷溪)서원,

하동 영계(永溪)서원, 청송 송학(松鶴)서원, 나주 경현(景賢)서원 등에 제향되었다.

 

 

 

 

 朝鮮國通信使鶴峯 金誠一先生詩碑 후면

一堂簪蓋兩邦臣  한 집에 머리 맞댄 두 나라 신하

區域雖殊義則均  지역은 달라도 의리는 고르다네

尊俎雍容歡意足  술자리 다사해 환영의 뜻 족하니

傍人莫問主兼賓  그대들, 주인과 손을 묻지 마시게

 

鶴峯 金誠一 先生儒鄕(유향)慶尙道 安東 出身으로

德行勳業(훈업)靑史에 빛나는 道學者이다.

大科及第하여 淸官을 두루 거친 先生

一五九0年 朝鮮國通信使韓日 兩國善隣友好를 위하여

國家 外交文化使節日本國을 향한 使行길에 올랐다.

對馬島에 들려 宣慰使(선위사) 玄蘇僧(현소승)迎接(영접)을 받고

客館西山寺滯留(체류)하는 동안 두분은 를 주고 받았는데

그 중 西山寺(사연)이 깊은 詩 一首를 골라 이 돌에 새겨 後世에 길이 하고자 한다.”

                                                                        二千年 十一月. 鶴峯 金誠一 先生詩碑建立委員會

曾祖父 : 金萬勤김만근,

   祖父 : 金禮範김예범

   祖母 : 寧海申氏(영해신씨)

      父 : 金璡김진

      母 : 驪興閔氏여흥민씨)

      兄 : 金克一김극일

      兄 : 金守一김수일

      兄 : 金明一김명일

      弟 : 金復一김복일

   配位 : 安東權氏 權德鳳

   長男 : 金潗김집

   次男 : 金湙깁역

   三男 : 金汯김굉

 

文化八(一八一一)年度  朝鮮通信士幕府接遇  地

문화팔(일팔일일)년도  조선통신사막부접우  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