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름에 달

철원-경순왕릉(敬順王綾), 경순왕 김부(敬順王 金傅),

碧巖 2016. 8. 4. 22:28
728x90

 

 

 

경순왕 김부(敬順王 金傅,897~978)

경기 연천군 장남면 고랑포리 산 18-1

경순왕 김부(敬順王 金傅,897~978)

재위 기간은 9927~ 935년으로 신라의 제56대 군주이자 마지막 군주이다.

성은 김(), 이름은 부()이며   본관은 경주(慶州)이다.

문성왕의 6세손이며, 아버지는 이찬(伊飡) 효종이며,

어머니는 헌강왕의 딸 계아태후이다. 왕후는 죽방왕후 박씨이다.

 

 

본래 그는 신라의 왕족으로 경명왕과 경애왕의 이종 6촌 동생이다.

이종 6촌 형 경애왕이 갑작스럽게 암살되면서 왕위에 올랐다.

그러나 재위 9년만에 고려에 평화적으로 나라를 넘겨줄 것을 결정하였고,

태조 왕건에게는 자신의 사촌 누이 신성왕후와의 결혼을 주선하였다.

 

 

태조 왕건으로부터 경주를 식읍으로 하사받고 정승공(政承公)에 봉해졌으며,

낙랑공주 왕씨와 부인 왕씨 등 태조 왕건의 딸 2명을 후배로 맞이하였다.

한편 금성의 사심관에 임명되어 고려시대 사심관제도의 시초가 되었다.

 

927년부터 935년까지 재위하는 동안 927년 국상(國相) 김웅렴(金雄廉)이 잠시 대리청정을 하였으며

같은 해 927년부터 935년 퇴위할 때까지 친정하였다.

 

 

 

 

그의 능은 신라의 왕릉 중에 유일하게 경주가 아닌 경기도에 있다.

 

 

 

경순왕은 신라 문성왕의 후손으로 본명은 부()이다.

아버지는 이찬을 지낸 김효종이고

어머니는 신덕왕의 딸이자 경명왕, 경애왕의 누이 또는 신라 헌강왕의 딸인 계아태후 박씨이다.

계아태후의 가계 기록도 불분명하여, 헌강왕의 딸이라는 설도 있다.

 

 

문성왕-()-민공(敏恭)-인경(仁慶)-효종(孝宗)으로 가계가 이어졌고,

후일 그가 자신의 백부의 딸이라며. 왕건에게 소개한 신성왕후의 친정아버지 억렴은 종숙으로,

문성왕-()-민공(敏恭)-실홍(實虹)-억렴(億廉)-신정왕후로 이어졌다.

 

 

본래 왕위계승권에서 밀려난 입장이었으나

927년 경애왕이 갑작스럽게 피살당하면서 외사촌들(경명왕의 아들들)을 제치고 왕위에 올랐다.

927년 신라를 침공한 후백제군에게 제 55대 경애왕이 피살되고, 31살에 56대 왕위에 올랐다.

그의 즉위 배경은 미상인데,

그가 왕위에 오를 당시 경애왕의 자녀들이 미성년자였는지

그가 화백 회의의 추대를 받아서 즉위 했는가에 대한 여부는 알려진 바가 없다.

그는 즉위 초 아버지 효종랑을 신흥대왕(神興大王)으로,

할아버지 실홍(또는 관홍)을 의흥대왕(懿興大王)으로 각각 추존하였다.

재위 시에는 국력이 쇠퇴하고 특히 여러 차례에 걸친 후백제의 침공과 약탈로 국가의 기능이 완전히 마비되었다.

 

 

따라서 그의 정책은 난폭한 견훤보다 오히려 왕건 쪽으로 기울고 있었다.

931년 왕건의 알현이 있었는데 수십일을 머물면서 왕건은 부하군병들에게 정숙하여 조금도 범법하지 못하게 하니,

왕경의 사녀(士女)들은 전번 견훤이 왔을 때에는 시랑과 범을 만난 것 같았으나,

이번 왕건이 왔을 때에는 부모를 만난 것 같다고 하였다.

 

 

왕위에 오를 당시 왕후(王后)에 죽방부인(竹房夫人) 박씨(朴氏)가 이미 있었으며,

그 사이에 마의태자(麻衣太子) 김겸용(金謙用)<또는 김일이라고 함>

범공(梵空) 김덕지(金德摯) <김광이라고 함>

영분공(永棼公)<김명종이라고 함>등  3명의 왕자와 1명의 덕주공주(德周公主)를 두었다.

 

 

 

 

경순왕이 39살 되던 935년에  민심이 신흥 고려로 기울어짐에 따라,

군신회의(群臣會議)를 소집하여 고려에 귀부(歸附)하기로 결정하고, 고려 태조 왕건에게 귀부하였다.

이에 마의태자 김겸용(金謙用), 막내아들 범공(梵空) 김덕지(金德摯), 이순유(李純由) 등 몇몇은 강하게 반대하였다.

 

 

 

경순왕은 자신의 백부 김억렴의 딸을 태조 왕건에게 소개했는데, 그녀는 고려 태조 왕건의 신성왕후가 되었다.

 

태조 왕건은 자신의 두 딸인 낙랑공주 (고려)(樂浪公主) 왕씨와 부인(夫人)왕씨를 경순왕에게 시집보냈는데,

낙랑공주(樂浪公主)는 신명순성왕태후 소생이고,

부인(夫人)왕씨는 평주 호족 박수경의 딸 성무부인 소생으로, 공주를 낳아 작위를 받지 못했다.

 

 

경순왕은 후궁(後宮) 낙랑공주(樂浪公主) 왕씨 사이에

김은열(金殷說),

김석(金錫),

김건(金鍵),

김선(金鐥),

김추(金錘)등  다섯 왕자와 황경(黃瓊)에게 출가한 공주를 두었고,

또 후궁(後宮) 부인(夫人)왕씨 사이에 이금서(李金書)에게 출가한 공주를 두었다.

 

 

 

이후 정승공(政承公)에 봉작된 뒤 경주(慶州)를 식읍(食邑)으로 받았으며,

태조로부터 유화궁(柳花宮)을 하사받고 지금의 개성과 가까운 곳에 거주했다.

한편 경주의 사심관(事審官)에 임명됨으로써 고려시대 사심관 제도의 시초가 되었다.

한편 그는 태조 왕건의 사후 혜종, 정종, 광종을 거치는 동안

일체의 정치적 활동에 개입하지 않음으로써 숙청을 모면하고 경종대에까지 살아남았다.

 

 

 

그의 딸인 헌숙왕후는 경종의 정비가 되었는데,

경종은 특별히 장인을 배려하여 그를 정승공으로 봉하고 식읍과 녹봉을 더해 주었다.

97844일에 사망하였다(경순왕 84).

 

그의 묘는 경기도 장단군 장단면(현 연천군 장남면)에 안장되었다.

 

 

 

고려에서 경순왕의 시호를 올렸다.

 

왕으로 예우해서 장단 남쪽 고랑포 8리 계좌 언덕에 장사지냈다.

그가 죽자 그의 시신을 다른 신라의 왕릉이 있는 경주로 이장하려 하였으나,

고려왕실에서 왕의 영구는 도성 밖 100리를 넘을수 없다고 하며 반대함으로써

임진강을 건너지 못하고 현재의 묘자리에 안장되었다.

이후 그의 묘소는 임진왜란 이후 실전되었다가 1747(영조 23) 다시 되찾아 정비하게 되었다.

경북 경주 황남동의 숭혜전(崇惠殿), 하동 청암면의 경천묘(敬天廟) 등에 제향되었다.

 

 

 

현재의 경순왕릉비는 영조 23(1747)에 다시 세웠다.

<조선왕조실록>에 보면 17461014

장단에서 경순왕의 지석과 신도비가 나왔음을 아뢰는 동지 김응호의 상소가 있고,

그 후속 조치로 1747420일 경순왕의 묘를 새로이 보수하였다.

그리고 1748 왕릉의 예에 준하여 경순왕릉에도 수총군(守塚軍) 5명을 두어 지키게 한다.

 

 

 

 

 

 

 

 

 

 

 

 

 

 

 

 

 

 

 

 

 

 

 

 

 

 

 

 

 

 

 

 

 

 

 

 

 

 

 

 

 

 

 

 

 

 

 

 

벽암 두릉연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