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름에 달

안성-언성군 김중만(彦城君 金重萬) 장군 재실

碧巖 2016. 10. 17. 22: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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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성군 김중만(彦城君 金重萬,1681 1755)>재실,  

경기도 안성시 대덕면 토현리 133

 

 

 

김중만(金重萬)은 이인좌(李麟佐)의 난을 진압하는 데 공훈을 세워

분무이등공신(奮武二等功臣)으로 녹훈되었다.

1728(영조 4) 3월에 무신난이 일어났는데,

이 난은 이인좌와 정희량(鄭希亮)이 각각 주동이 되어 일으켰기 때문에 이인좌·정희량의 난이라고도 한다.

이인좌와 정희량이 난을 일으킨 목적은 영조를 폐하고 밀풍군(密豐君)을 옹립하려는데 있었으나

난을 일으킨 지 20여 일 만에 진압되었다.

영조는 난을 평정하고 역란(逆亂)의 전말을 팔도에 반포하고 무신감난록(戊申勘亂錄)의 편찬을 명하였고,

오명항(吳命恒) 15명을 분무공신으로 책정하여 가자 및 봉군으로 녹훈하였고,

그해 715일에는 분무원종공신 9000여명에게 녹권을 하사하였다.

 

김중만은 양성인(陽城人) 출신으로 안성, 양성 등지의 사대부들이 중심이 된 취병(聚兵) 상황과

이인좌(李麟佐)의 난을 일으키기 위한 모의 사실을 소상하게 고변(告變)함으로서

난의 평정에 크게 공을 세워 녹훈되었다.   

언성군(彦城君)에 봉해졌다.

 

2016년 8월 14일 한 여름에 답사하여 동네의 아주머님께 묘소를 여쭈어보니

동네 가운데 새로 지은 집의 주인이 후손이니 거기 가서 물어보라 해서

후손을 찿아가 물어보니 알 필요 없다고 가르쳐 주질 않아 헤매이다 그냥 왔으니~~~~~~~~

 

 

17287월에 작성된 교서(敎書, 공신록)에는

1등 공신에 오명항,

2등 공신에 김중만·박찬신(朴讚新박문수(朴文秀) 7,

3등공신에 이수량(李遂良) 7, 15명의 공신명단이 적혀있다.

분무2등 공신에 책훈된 김중만에게 2계급의 품직을 올려주고 적장자(嫡長子)가 그 녹을 세습하도록 하며,

노비·전답·은자(銀子내구마(內廐馬) 등을 하사하는 것으로 되어 있다.

두루마리 형태로 가로 286cm, 세로 44cm이며

뒷면에는 李善行製崔重大書(이선행제 최중대서)’라고 쓰여 있어 글을 작성한 자와 쓴 자를 알 수 있다.

 

교지는 2장으로,

하나는 1729(영조 5) 7월에 작성된 전답사패교지(田畓賜牌敎旨)이고,

다른 하나는 동년 911일에 작성된 노비사패교지(奴婢賜牌敎旨)이다.

두 교지는 모두 전년도에 작성된 공신록의 내용과 관련있다.

그러나 교서의 내용과는 달리 전답의 경우 전 1450, 920부로 전 80결에 못 미친 반면,

노비의 경우는 노 16, 18구로   구에 비해 더 많은 수가 내려졌다.

이 문서는 경기도 안성시 대덕면의 후손이 소장하고 있고,

경기도유형문화재 제110호로 지정되어 있다

 

 

김중만장군영정 보물715호

 

 

 

 

 

 

 

 

무신으로 본관은 언양, 한성부판윤 김석창의 아들로 이지현 토현리(현 대덕면 토현리)에서 출생, 성장했다.

어려서부터 기골이 장대하고 무예에 남다른 비범함을 보였다.

숙종 38년 무과에 급제하였으나 부모님의 병간호를 위해 벼슬을 버리고 귀향했다.

영조 4년 이인좌의 난이 일어나 협박으로 거사에 가담할 것을 강요하고

청주에서 반란군이 북상하자 거짓으로 그들의 거사에 따랐다.

그들과 함께 있는 동안 이인좌의 반란군과 연합하기 위해 거사를 준비하고 있음을 간파했다.

이에 곧바로 상경하여 고변함으로 오명항을 도순무사로 파견하여 난을 평정하는데 지대한 공헌을 했다.

이 공로로 2등 공신에 녹선되었으며 영조 6년 희천군수에 임명되었다.

영조 4(1728)년 이인좌, 정희량 등의 모반을 평정한 공으로

가선대부 동지중추부사 언성군 김중만에게 내린 2등공신록권이다.

교지는 공신록권에 이어 주어진 것으로 당시 공신에게 한 노비와 전답의 수량이 기록되어 있다

 

공조판서 겸 오위도총부도총관(工曹判書兼五衛都摠府都摠管),

충청도수군절도사(忠淸道水軍節度使)를 지냈다

75세에 사망하자 왕명으로 도화원에서 공의 影幀(영정)을 그려 하사하도록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