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주-고죽 최경창(孤竹 崔慶昌), 최경창과 홍랑(洪娘)
고죽 최경창(孤竹 崔慶昌) 묘소
경기도 파주시 다율동 360-5번지
崔慶昌 최경창
본관은 해주(海州)이며, 字는 가운(嘉運), 號는 고죽(孤竹).
아버지는 평안도 병마절도사, 영변대도호부사(寧邊大都護府使)를 역임한 최수인(崔守仁).
아들은 충청도 병마절도사를 지낸 최운서(崔雲瑞), 최구서(崔龜瑞), 최인서(崔麟瑞).
최경창(崔慶昌)[1539년~1583년]은 학문과 문장에 능하여
백광훈(白光勳)[1537~1582], 이달(李達)[1539~1618]과 더불어 삼당시인(三唐詩人)으로 불리었는데,
그 중 최경창은 좌장이라 할 수 있는 인물이었다.
최경창은 1568년(선조 1)에 증광시 문과에 을과로 급제하여 북평사(北評事)가 되었으며, 예조·병조의 원외랑(員外郎)을 거쳐 1575년(선조 8)에 사간원 정언(司諫院正言)에 올랐으나 1576년(선조 9) 영광 군수로 좌천됐다. 이때 뜻밖의 발령에 충격을 받고 사직한 뒤 가난에 시달렸다. 1582년(선조 16) 종성 부사에 특수(特授)되었으나 북평사의 참소로 성균관 직강(成均館直講)으로 좌천되었다. 1583년 발령을 받고 한양으로 향하다 경성 객관(鏡城客館)에서 객사하였다.
최경창의 시 세계는 청경(淸勁)·한경(悍剄)하다는 평을 받았다. 율곡(栗谷) 이이(李珥)는 최경창의 시를 청신준일(淸新俊逸)[새롭고 산뜻하여 재능이 뛰어남]로 평한 바 있다. 대표적인 저서로 『고죽 유고(孤竹遺稿)』가 있다. 또한 조선조 여인의 한(恨)을 전형적으로 표출한 「이소부사(李少婦詞)」, 사랑하는 여인의 정감의 세계를 그려낸 「번방곡(飜方曲)」이 전해져 오고 있다. 이외에도 「영월루(映月樓)」, 「대은암(大隱巖)」, 「증승(贈僧)」 등이 대표작으로 꼽힌다.
이산해(李山海) 등이 최경창을 최선(崔仙)이라고 표현한 것을 보면 신비스런 면모를 많이 지니고 있었던 듯한데, 을묘왜란 때 최경창이 퉁소 한 곡조를 구슬피 불어 영암에 침입한 왜구를 향수에 젖게 하여 물리쳤다는 일화도 전한다. 뿐만 아니라 무예에도 뛰어나 “활 솜씨는 이의 심장을 나누고 새의 왼쪽을 맞출 정도”였다고 한다.
최경창은 학문과 문장에 능하여 문장에 뛰어나
李珥이이, 宋翼弼송익필, 李達이달, 崔岦최립, 백광훈, 이산해, 하응림 등과 함께 팔문장계로 불이었으며, 정철(鄭澈)·서익(徐益) 등과도 교류하였다.1583년 방어사의 종사관에 임명되어 서울로 올라오던 도중 사망하였다.최경창의 묘는 경기도 파주군 다율동에 있는데 부부 합장묘이며, 묘 앞에는 명기 홍랑(洪娘)의 묘가 위치하고 있다.숙종 때 청백리에 녹선(錄選)되고 1723년에 전라남도 강진군의 서봉 서원에 배향되었다.
贈吏曹判書行鍾城府使 孤竹先生海州崔公諱慶昌之墓 贈貞夫人善山林氏祔左
증이조판서행종성부사 고죽선생해주최공휘경창지묘 증정부인선산임씨부좌
고죽최경창선생영정
孤竹詩碑고죽시비
洪娘歌碑홍랑가비
함경도 태생의 기생 홍랑
홍랑은 함경도 홍원 태생의 기생으로, 정확한 생몰 연대는 전하지 않는다.
홍랑은 일찍 아버지를 여의고 홀어머니와 함께 살았다.
둘도 없는 효녀라는 칭찬을 들었고 어려서부터 미모와 시재가 뛰어났다.
최경창은 문장과 학문 뿐만 아니라 서화에도 뛰어났고, 악기에도 능했다.
약관의 나이 때 송강 정철, 구봉 송익필 등 당대의 대가 시인들과 시회(詩會)를 하면서 그의 문재가 널리 알려지기 시작했고,
‘조선 팔문장(八文章)’에 들어갈 정도로 인정받았다.
시 중에서도 당시(唐詩)에 뛰어나 조선 팔문장 중 옥봉 백광훈, 손곡 이달과 함께 ‘3당시인(三唐詩人)’으로 꼽혔다.
이런 최경창이 머나먼 변방지역에서 정신적으로 강력하게 이끌리는 여인을 만나리라고는 생각하지도 못했을 것이다.
이날 기생 점고에 이어 최경창의 부임 축하 연회가 열렸다. 연회가 무르익어가는 가운데,
기생으로서 재능과 미모에다 문학적 소양까지 겸비한 홍랑이 시 한 수를 음률에 맞춰 읊었다.
그런데 홍랑이 읊은 시는 놀랍게도 바로 최경창의 작품이었다.
최경창은 시창을 다 듣고는 내심 놀라워하면서 홍랑에게 넌지시 읊은 시를 좋아하는지, 그리고 누구의 시를 좋아하는지 물었다.
홍랑은 “고죽 선생의 시인데 그 분의 시를 제일 좋아한다”고 대답했다. 최경창은 자신이 그 시를 지은 주인공임을 밝혔다.
홍랑의 마음이 어떠했을지는 두말 할 필요도 없을 것이다. 이렇게 두 사람의 각별한 인연이 시작되었다.
최경창과 홍랑은 정신적으로 잘 맞는 도반이 될 수 있음을 알게 되고,
또 사랑도 나눌 수 있는 처지가 되었기에 날이 갈수록 두 사람의 사랑은 더욱 뜨거워졌다.
홍랑이 최경창의 군막에까지 드나들 정도로 두 사람은 잠시도 서로 떨어져 있으면 안 되는 존재가 되었다.
그러는 사이 최경창이 직무가 변하여 한양으로 옮기었다..
詩人洪娘之墓
사랑하는 임을 떠나보낸 뒤 오매불망 연인을 생각하며 지내던 홍랑에게 어느 날 최경창이 아파 몸져누웠다는 비보가 날아든다.
최경창이 함경도 경성에서 한양으로 돌아온 뒤 그 이듬해 초부터 시름시름 앓더니 결국 병석에 눕고 만 것이다.
홍랑과의 이별이 너무 아팠던 것일까. 병명도 정확히 알 수 없는 병에 걸려 자리에 누운 그는 그 해 겨울까지 일어나지 못하고 있었다.
이 소식이 머나 먼 함경도에 있는 홍랑의 귀에까지 흘러들게 되었다. 소식을 접한 홍랑은 곧바로 여장을 챙겼다.
사랑하는 사람으로 위독하다는 최경창을 하루 빨리 보고 싶은 마음에 정신없이 밤낮으로 걸어 7일 만에 한양에 도착했다.
최경창과의 만남은 실로 감격스러운 재회였다. 홍랑은 감격적인 재회 이후 최경창의 병수발을 들면서 함께 지냈다.
홍랑의 지극정성이 더해져 최경창은 조금씩 회복되어 건강을 되찾게 되었다.
최경창은 당시의 상황을 이렇게 적고 있다. ‘을해년(1575)에 내가 병이 들어 오랫동안 낫지 않아 봄부터 겨울까지 자리에서 일어나지 못했다.
홍랑이 이 소식을 듣고 바로 출발해 7일 밤낮을 걸어 한양에 도착했다.’ 그러나 두 사람의 재회는 뜻밖의 파란을 몰고 온다.
홍랑과 최경창이 함께 산다는 소문은 최경창이 홍랑을 첩으로 삼았다는 이야기로 비화된 것이다.
동인과 서인의 당파싸움이 한창이던 1576년 봄, 사헌부는 최경창의 파직을 요구하는 상소를 올렸다.
홍랑이 관기의 신분으로 지역을 이탈, 함경도와 평안도 사람의 도성 출입을 금지하는 제도인 ‘양계의 금(兩界之禁)’을 어겼다는 것이다.
당시 정치상황도 안 좋은 시기였다. 홍랑이 최경창을 찾아온 때는 명종의 비 인순왕후가 죽은 지 1년이 안된 국상기간이었던 것이다.
이러한 상황에서 동인들이 서인에 속한 최경창의 기생 사랑 이야기를 들어 공격한 것이다.
사헌부의 상소로 결국 최경창은 파직을 당했고, 홍랑도 함경도 경성으로 돌아갈 수밖에 없었다.
최경창은 관직을 박탈당한 것보다도 홍랑을 다시 돌려보낸다는 게 너무도 힘들었다.
최경창은 자신의 절절한 당시 마음을 한편의 시 ‘송별(送別)’에 담아 경성으로 돌아가는 홍랑에게 주었다.
고운 뺨에 눈물지으며 한양을 떠날 때(玉頰雙啼出鳳城)/
새벽 꾀꼬리 저렇게 우는 것은 이별의 정 때문이네(曉鶯千爲離情)/
비단옷에 명마 타고 하관 밖에서(羅衫寶馬河關外)/
풀빛 아득한 가운데 홀로 가는 것을 전송하네(草色送獨行)
아래 시도 이때 지은 것으로 보인다.
서로 말없이 바라보며 그윽한 난초 그대에게 드리네(相看脈脈贈幽蘭)/
아득히 먼 길 이제 가면 어느 날에 돌아오리(此去天涯幾日還)/
함관령 옛날의 노래는 다시 부르지 마오(莫唱咸關舊時曲)/
지금도 궂은비 내려 푸른 산 아득하겠지(至今雲雨暗靑山)
그들은 이 이별을 마지막으로 생전에는 다시 만나지 못한다. 시간이 흘러 1582년 봄 최경창은 특별히 종성부사(鍾城府使)에 임명되었다.
그러나 얼마 후 북평사의 참소로 성균관 직강으로 좌천되고, 부임을 위해 상경하던 도중 함경도 경성의 객관에서 세상을 떠났다.
1583년 3월, 그의 나이 45세 때였다.
최경창과 이별한 후 행여 사랑하는 사람을 만날 날이 올까 기대하며 가슴 아픈 나날을 보내던 홍랑을 찾아온 것은 최경창의 부음이었다.
소식을 접한 홍랑은 바로 경성의 객관을 찾아가 염을 하는 것을 돕고, 영구를 따라 최경창이 묻힐 경기도 파주까지 따라갔다.
장례가 끝난 후에는 바로 최경창 무덤 앞에서 시묘살이에 들어갔다.
하지만 젊고 아름다운 여자가 홀로 외딴 곳에서 생활한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닐 수밖에 없었다.
생각 끝에 그녀는 다른 남자의 접근을 막기 위해 몸을 씻거나 단장하는 일을 일체 하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급기야 고운 얼굴에 자상(刺傷)을 내어 일부러 흉터까지 만들었다.
커다란 숯덩어리를 통째로 삼켜서 벙어리가 되려고 했다는 이야기도 전한다.
이렇게 무덤 앞에서 차디찬 겨울과 무더운 여름을 견디며 3년간 시묘살이를 무사히 마쳤지만, 그녀는 묘소를 떠나지 않았다.
최경창을 향한 마음이 묘소를 떠날 수 없게 한 것이다. 그 후로도 시묘살이는 몇 년간 더 계속됐다.
연인의 묘소 앞에서 살다가 죽으려는 마음이었을 것이다. 하지만 홍랑에게는 그런 소원도 허락되지 않았다.
그렇게 10여년 가까이 시묘살이를 하던 중에 임진왜란(1592년)이 터진 것이다.
홍랑은 자신이야 사랑하는 임의 곁에서 죽더라도 여한이 없었지만,
최경창이 남긴 주옥 같은 작품과 글씨들을 보존하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하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그래서 홍랑은 최경창이 남긴 유품을 챙긴 뒤 품에 품고 다시 함경도의 고향으로 돌아갔다.
그로부터 7년의 전쟁 동안 여자의 몸으로 최경창의 작품을 지키기 위해 얼마나 심한 고초를 겪어야 했을까.
홍랑이 해주최씨 문중을 찾아 최경창의 유품을 전한 것은 1599년의 일이다.
참혹한 임진왜란이 모두 끝난 이듬해였다.
무려 7년에 이르는 전란을 겪으면서도 오늘날까지 최경창의 주옥 같은 시작(詩作)들이 전해져 오는 것은
오로지 홍랑의 지극한 사랑과 정성 덕분이다
해주최씨선세제위이장비
해주최씨 선산은 본래 다율리 근처의 월롱면 영태리에 있었으나,
1969년 영태리를 군용지로 수용하면서 지금 자리로 이장하게 된 것이라 한다.
묘를 이장할 당시 홍랑의 무덤에서 옥으로 된 목걸이, 반지, 귀고리, 옷 등이 나왔다는 이야기는 전하나
최씨 집안에는 그 유물들이 없다고 하니....
해주최씨선세제위이장비와 고죽 최경창 묘소(상단) 홍랑묘소(중간)
崔慶昌 최경창 가계
조부 양구현감 최응(崔凝)
부친 평안도병마절도사 최수인(崔守仁), 영변대도호부사
모친 파평윤씨, 도사 윤필경(尹弼卿)의 따님
종성부사 고죽 최경창(孤竹 崔慶昌)
장남 충청도 병마절도사 최운서(崔雲瑞)
차남 최구서(崔龜瑞)
삼남 최인서(崔麟瑞)
벽암 두릉연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