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름에 달

망우리묘지/소파방정환 小波方定煥 , 만해한용운 萬海韓龍雲, 죽산조봉암 竹山曺奉岩

碧巖 2018. 2. 15. 21: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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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파 방정환 小波 方定煥 18991931

 

소파방정환小波方定煥

18991931.

아동문학가.

아동문제연구단체인 색동회를 조직, 어린이의 날을 제정

는 소파(小波). 서울 출신. 아버지는 방경수(方慶洙)이다. 

첫째, 상인집안의 매우 유복한 가정에서 출생하였으나 9살 무렵 가세가 몰락하여 어려운 생활을 영위하였다.

할아버지로부터 천자문을 배우며 보성소학교에 입학하였다가 매동보통학교를 거쳐 미동보통학교를 졸업하였다. 손병희의 사위가 된 이후에 일본으로 유학하였다 

둘째, 그는 시천교 계통의 소년입지회의 회장으로 활동하였고,

1918년에는 경성구락부를 조직하여 주도적으로 활동하였다.

 3·1운동 이후에는

 천도교청년교리강연부, 천도교청년회, 천도교청년당, 천도교청우당 등 천도교의 청년운동에 참여하였으며,

이 과정에서 일본 유학과 잡지 개벽의 기자로서도 활동하면서 전국을 돌아다니며

각종 강연회의 연사로서 참여하여 민족정신을 고취하였다 

셋째, 경성청년구락부 활동하며 3·1운동 때 민족대표를 뒷받침하여

독립신문을 출판하여 시민에게 돌리는 활동을 전개하다 조선총독부 경찰에 체포되기도 하였다.

넷째, 그는 소춘 김기전과 함께 1921년 천도교소년회를 조직하였고,

1923년에는 잡지 어린이를 창간하고 어린이날을 제정하는 등 소년운동을 주도하였다.

특히 어린이날은 그가 일본에서 색동회를 조직함과 동시에 추진한 일이었다 

1931710여년에 걸쳐 소년운동 뿐만 아니라 청년운동 등의 민족운동에도 적극적으로 참여였던 그는

무리한 활동으로 신장염과 고혈압으로 만 31세의 짧은 삶을 마감 하였고,

대한민국정부는 1990년 방정환에게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하였다.

 

 

 

 

 

 

 

 

 

 

 

만해 한용운 萬海 韓龍雲 묘소

 

만해 한용운 萬海韓龍雲 (1879(고종 16)8.29~1944.6.29)

승려·시인·독립운동가.

본관은 청주(淸州). 본명은 정옥(貞玉), 아명은 유천(裕天).

법명은 용운, 법호는 만해(萬海, 卍海). 충청남도 홍성 출신.

아버지는 한응준(韓應俊) 

189416세 되던 해 동학란(東學亂)과 갑오경장이 일어났다.

나는 왜 중이 되었나.’라는 그 자신의 술회대로 넓은 세계에 대한 관심과 생활의 방편으로 집을 떠나

1896년 설악산 오세암(五歲庵)에 입산하여 처음에는 절의 일을 거들다가, 출가하여 승려가 되었다.

 출가 직후에는 오세암에 머무르면서 불교의 기초지식을 섭렵하면서 선()을 닦았다.

이후 다른 세계에 대한 관심이 깊은 나머지 블라디보스톡 등 시베리아와 만주 등을 여행하였다.

 

1905년 재입산하여 설악산 백담사(百潭寺)에서 연곡(連谷)을 은사로 하여 정식으로 득도(得度)하였으며,

불교에 입문하여 대장경을 열람하며, 특히 한문으로 된 불경을 우리말로 옮기는 일,

즉 불교의 대중화 작업에 주력하였다.

1910년에는 불교의 유신을 주장하는 논저 조선불교유신론을 저술하였다.

1914불교대전 佛敎大典과 함께

청나라 승려 내림(來琳)의 증보본에 의거하여 채근담 菜根譚주해본을 저술하였다.

19085월부터 약 6개월간 일본을 방문, 주로 토쿄(東京)와 교토(京都)를 중심으로 새로운 문물을 익히고,

일본의 풍물을 몸소 체험하였다. 일본 여행 중에 3·1독립운동 때의 동지가 된 최린(崔麟) 등과 교유하였다.

1910년 한일합방이 되면서 국권은 물론, 한국어마저 쓸 수 없는 피압박 민족이 되자,

그는 국치의 슬픔을 안은 채 중국 동북삼성(東北三省)으로 갔다.

이곳에서 만주지방 여러 곳에 있던 우리 독립군의 훈련장을 순방하면서

그들에게 독립정신과 민족혼을 심어주는 일에 전력하였다.

1918년 월간 유심 惟心이라는 불교잡지를 간행하였다.

19193·1독립운동 때 백용성(白龍城) 등과 함께 불교계를 대표하여 참여하여

독립선언문의 내용을 둘러싸고 최남선(崔南善)과 의견 충돌을 하였다.

만해는 내용이 좀더 과감하고 혁신적이어야 하겠다고 생각하였으나,

결국 마지막의 행동강령인 공약 3장만을 삽입시키는 데 그쳤다.

1920년 만세사건의 주동자로 지목되어 재판을 받아 3년 동안 옥살이를 하고,

출옥 후에도 일본 경찰의 감시 아래에서 강연 등 여러 방법으로 조국독립의 정당성을 설파하였다.  1925년 오세암에서 선서(禪書) 십현담주해 十玄談註解를 탈고하였다.

 

1926년 한국 근대시의 기념비적 작품으로 인정받는 대표적 시집 님의 침묵을 발간하였다.

이곳에 수록된 88편의 시는 대체로 민족의 독립에 대한 신념과 희망을 사랑의 노래로서 풀이하였다.

1927년 일제에 대항하는 단체였던 신간회(新幹會)를 결성하는 주도적 소임을 맡아,

그는 중앙집행위원과 경성지회장(京城支會長)의 자리를 겸직하였다.

1935조선일보에 장편소설 흑풍 黑風을 연재하였고,

이듬해에는 조선중앙일보에 장편 후회 後悔를 연재하였다 

1938년 그가 직접 지도해오던 불교계통의 민족투쟁비밀결사단체인 만당사건(卍黨事件)이 일어났고,

많은 후배 동지들이 검거되고 자신도 고초를 겪었다.

 이 시기에 조선일보박명 薄命이라는 소설을 연재하였다.

1939년 회갑을 맞으면서 경상남도 사천군다솔사(多率寺)에서 몇몇 동지들과 함께 자축연을 가졌다.

다솔사는 당시 민족독립운동을 주도하던 본거지였다.

 

1944629일 성북동의 심우장(尋牛莊)에서 중풍으로 별세하였다.

동지들에 의하여 미아리 사설 화장장에서 다비된 뒤 망우리 공동묘지에 유골이 안치되었다.

 친하던 벗으로는 이시영(李始榮김동삼(金東三신채호(申采浩정인보(鄭寅普박광(朴珖

홍명희(洪命熹송월면(宋月面최범술(崔凡述) 등이 있었으며,

신채호의 비문은 바로 그가 쓴 것이다. 1962년에 대한민국장이 추서되었다.

 

            萬海韓龍雲先生墓 夫人兪氏在右

             만해한용운선생묘 부인유씨재우

 

 

 

 

죽산조봉암竹山曺奉岩

 

죽산조봉암竹山曺奉岩 1898.9.25~1959.7.31

조봉암은 사회주의 독립운동을 했으며,

해방 후에는 조선공산당을 탈당하고 제헌국회의원과 초대 농림부장관을 역임했다.

1952년과 1956년 대통령 선거에 출마해 낙선한 후 국가보안법 위반으로 사형되었다.

19193·1운동에 가담한 혐의로 1년간 복역했고,

1921년 무정부주의에 심취해 비밀결사 조직인 흑도회에 가입했으나, 곧 회의를 느끼고 사회주의자가 되었다.

19254월 조선청년동맹, 조선공산당 등을 결성하는 데 크게 기여했다.

1932년 상해에서 일본경찰에 검거되어 7년간 복역했고, 출옥 후 다시 검거되었으나 해방이 되어 석방되었다.

1952년 대통령후보로 출마해 낙선했으나 높은 득표를 기록했다.

1956년 진보당을 창당하여 활동하다가 19581월 국가보안법 위반으로 체포되어 사형되었다.

2011년 대한민국 법원에서 무죄판결을 내려 복권되었다.

 

는 죽산(竹山). 강화에서 공립보통학교와 농업보습학교(農業補習學校)를 졸업하고,

1915년 강화군청 급사로 일하다가 상경해 기독교청년회(YMCA) 중학부에서 1년간 수학하고

19193·1운동에 가담한 혐의로 1년간 복역했고,

1920년 출옥 후 일본도쿄[東京] 주오대학[中央大學]에서 1년간 정치학을 공부했다.

1922년 국내에서 독립운동을 하기 위해 귀국해

10월 코민테른의 지령에 따라 소련에서 열린 베르흐네우딘스크 대회에 조선 대표로 참가했다.

1923년초 모스크바의 동방노력자공산대학(東方勞力者共産大學) 속성과에 입학해 수료했고,

같은 해 9월 조선 공산청년동맹과 조선공산당을 조직하라는 임무를 부여받고 국내에 잠입했다.

 

19254월 노동자·농민 운동의 총집결체인 조선노동총동맹,

청년운동을 주도한 조선청년동맹·조선공산당·고려공산청년동맹 등을 결성하는 데 핵심적인 역할을 수행했다.

19262월 상하이[上海]에 조선공산당 해외부를 설치하고,

 4월에 조선공산당 만주총국(滿洲總局)을 조직해 책임비서가 되었다.

같은 해 7월 코민테른 극동국 조선위원으로 임명되었고,

19274월 이동녕·홍진·조완구 등의 독립운동지도자 24명과 함께

상하이에서 한국유일독립당 촉성회를 조직하고 집행위원직을 맡았다.

1927년 5월 중국공산당 한인지부를 조직하여 책임자로 활동했고,

6월 국제적색노동조합 주최의 범태평양노동자대회에 조선 대표로 참석해 조선의 노동운동 방침을 밝혔다.

192910월 조선독립운동자동맹을 조직해 독립정신을 고양시키는 데 앞장섰으며,

193112월 만주사변 발발을 계기로 상하이 한인반제동맹을 결성했다.

193211월 상하이에서 일본 경찰에 피검되어 신의주 형무소에서 7년간 복역했고,

출옥 후 인천에서 지하운동을 하다 19451월 다시 검거되었으나 해방이 되어 석방되었다.

 

해방직후 인천에서 치안유지회·건국준비위원회·노동조합·실업자대책위원회 등을 조직했고,

조선공산당 중앙간부 겸 민주주의민주전선 인천지구 위원장에 취임했다.

1946년 반박헌영 공개 서한을 발표하고 조선공산당을 탈당해 반좌익 성향의 정치노선을 견지했다.

1948년 제헌국회의원과 초대 농림부장관, 1950년 제2대 민의원 부의장을 지냈다. 

1952년 제2대 대통령후보로 출마해 차점으로 낙선하고,

1956년 제3대 대통령후보로 다시 출마했으나 낙선했다.

그해 11월 진보당을 창당, 위원장이 되어 정당활동을 하다가

19581월 이른바 진보당사건으로 체포(국가보안법 위반)되어 1959년 사형당했다

한편 대법원 전원합의체는 지난 20111월 죽산의 국가변란과 간첩혐의에 대해 전원 일치로 무죄를 선고,

 신원이 복권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