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산-공세곶고지貢稅串庫址, 삼도해운판관비三道海雲判官碑, 이명래李明來고약
아산공세곶고지牙山貢稅串庫址
충청남도 기념물 제21호
충남 아산시 인주면 공세리193
고려시대 곡식을 운반하기 전에 쌓아두던 창고의 하나로서
조선시대 ‘공진창’이 처음 명칭이다.
성종 9년(1478) 『경국대전』에 의하여 모든 제도가 정비되면서
충청도에서 세금으로 거둔 곡식은 모두 이곳으로 모았다가 일정한 시기에 서울의 창고로 운송하도록 하였다.
지금은 창고터 주변에 만든 성지(城地)가 약 680m 정도 남아 있는데, 겨우 터만을 알아 볼 정도이다.
처음에는 창고가 없어 한데 쌓아 두었으나, 중종 18년(1523)에 비로소 창고 80칸을 건축하였다고 한다.
이곳에는 공주목 이하 임천,한산,정산,회덕,진잠,연산,이산(노성),부여,석성,연기 등 12군현의 세미와
홍주목 이하 서천,서산,태안,면천,온양,평택,홍산,덕산,청양,대흥,비인,남포,결성,보령,
아산,신창,예산,해미,당진 등 19군현의 세미를,
그 외 청주목 이하 천안,옥천,문의,직산,회인 등 6개 현의 공세미 등
합계 39개 목,군,현의 조세로 바친 쌀 등을 납고시키고 다시 수도까지 수로 500리 길을 선박으로 조운하였다.
공세리 성당과 이어진 둑을 정비하여 공세곶고지를 복구,정비할 계획이라고 한다.
삼도해운판관비 三道海雲判官碑
충청남도 문화재자료 제238호
삼도해운판관비三道海雲判官碑
충청남도 문화재자료 제238호
충청남도 아산시 인주면 공세리에 있는 조선시대의 비석
모두 9기의 비로, 그동안 마을 도로가에 흩어져 있던 것을 한자리에 모아놓은 것이다.
3기는 현감의 어진 정치를 기념하기 위한 선정비이고,
6기는 해운판관비이다.
정 5품의 해운판관이란 조세를 거두어 충청·전라·경상 3도에 창고를 지어 보관하거나,
서울로 옮기는 조운업무를 담당하는 관리를 말한다.
이 비는 조선 중종 18년(1523) 이곳에 창고를 짓고,
보관과 서울로의 운송을 맡아보던 관리들의 청렴한 덕을 기념하기 위해 세운 것이다.
비의 앞면에는 모두 ‘삼도해운판관비’라는 명칭을 새겨 놓았다.
9기의 비 가운데 가장 오래된 것은 인조 27년(1649)에 세운 비이고,
가장 최근 것은 숙종 34년(1708)에 세운 비이다.
이명래(李明來)고약 본포
공감마을 공세리이야기
고 약
최초의 신약인 공약이 만들어진 공세리
이명래李明來고약, 성일론成一論고약
1900년 초부터 6.25 동란이 끝나고 나서 피부병과 부스럼이 많았다.
영양 결핍이 되고 대부분의 어린이 피부가 노리끼리하고 탄력이 없으며, 각종 부스럼이 만연했다.
얼굴에는 도장 부스럼이 둥근 지도를 그리고 있고 목뒤에는 발찌가,
앞 이마에는 뾰루지가 달라붙고 눈가에는 눈다락지가 생겨서 눈두덩이가 부어있었다.
이때 등장한 것이 이명래란 이름을 붙인 고약이었다.
창호지 안에 까만 염소똥처럼 생긴 고약을 발근고(拔根膏)와 함께 붙여두면
이틀 후 누런 고름과 함께 고름의 뿌리가 빠져 완쾌된다.
당시의 고약으로는 이명래고약, 됴고약 등이 유명한데, 이명래고약은 전통적인 고약과 좀 다르다.
파리 외방전교회의 드비즈 신부가 1895년에 아산 공세리에 부임해 공세창을 헐고 성당을 지었다.
중국을 통해 입국했던 드비즈 신부는 라틴어로 된 약용식물학 책의 지식과 한의학 지식을 응용해
고약 만드는 비법을 창안해 냈고 느릅나무 다린 물로 상처를 치료하면서
이를 환으로 만들어 사용하기 편하게 고약을 제조하여 신지들에게 사용케 하였으며
이후 프랑스 본국으로 돌아갈 때 이 비법을 공세리성당 신도였던 요한 이명래에게 전수했다.
이 고약은 처음에 드비즈 신부의 한국 이름을 따서 ‘성일론(成一論) 고약’ 이라고 불렸다.
이후 이명래가 이 고약에 민간요법을 더해 1906년 아산에서 이명래 고약집을 개업했다.
성한 살은 다치지 않고 굳어진 고름만 골라 뿌리를 뽑는 발근고(拔根膏)가 이명래고약의 핵심인데,
소나무뿌리를 태워 만드는 기름에다 약재를 녹여 만들었다.
발근고가 종기를 터뜨리면 고약이 고름을 빨아낸다.
우리나라 신약 제1호라고 할 수 있는
이명래고약의 비법은 100년이 넘도록 의원 이명래의 사위에서 사위로 전수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