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름에 달

인천-정간공 곡구 정수기(貞簡公 谷口 鄭壽期),문충공 학남 정우량(文忠公 鶴南 鄭羽良), 문헌공 남애 정휘량(文憲公 南崖 鄭翬良)

碧巖 2020. 8. 8. 23: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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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간공 곡구 정수기(貞簡公 谷口 鄭壽期)

인천광역시 연수구 동춘동 177

 

정간공 곡구 정수기(貞簡公 谷口 鄭壽期)

1664(현종 5)~1752(영조28)

본관은 영일(迎日). 는 순년(舜年), 는 곡구(谷口).

증 의정부 좌참찬 정용(鄭涌)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강원도관찰사 정시성(鄭始成)이고,

아버지는 첨지중추부사 정인빈(鄭寅賓)이며, 어머니는 평양조씨로 조문망(趙門望)의 딸이다.

1699(숙종 25) 증광문과에 병과로 급제,

1713년 세자시강원사서에 임용되었으며, 사간원정언을 거쳐

1716년 서명균(徐命均이진망(李眞望) 16인과 함께 홍문록에 올랐다.

1722(경종 2) 사간원정언으로서 경종이 병약하고 후사(後嗣)가 없음을 이유로

왕세제(王世弟:영조)의 대리청정을 주청한 김춘택(金春澤) 등을 탄핵하였다.

그해 7월 홍문관수찬으로 전보되어

이후 사간원사간·홍문관수찬·사헌부집의, 홍문관의 부교리·부응교 등을 지냈다.

1725(영조 1) 경종의 즉위와 더불어 발생한 왕세제의 대리청정문제로 야기된 신임사화의

주동인물로 탄핵되어 강현(姜鋧이조(李肇) 등과 함께 삭탈관작되고 문외출송(門外黜送)되었다.

이 때 사간원에서는 그를 극변(極邊)으로 유배시킬 것을 청하였으나 허락되지 않았다.

172710월 대사간으로 복직된 이후 승정원승지·대사성·대사간·공조참판 등을 역임하고,

1734년 개성유수로 전보되었다.

1736년 대사헌에 임용되어

서울로 올라와 지돈녕부사·우참찬·예조판서 등을 역임하고 기로당상(耆老堂上)이 되었다.

1753년 영의정에 추증되었다. 시호는 정간(貞簡)이다.

朝鮮國贈領議政 行崇政大夫判敦寜府事 鄭公壽期之墓 贈貞敬夫人坡平尹氏祔左

조선국증영의정 행숭정대부판돈녕부사 정공수기지묘 증정경부인파평윤씨부좌

 

정간공 곡구 정수기(貞簡公 谷口 鄭壽期)의

초배위  정경부인 안정나씨(安定羅氏), 장령 나양좌(羅良佐)의 따님

 

有明朝鮮國 贈貞敬夫人安定羅氏之墓

유명조선국 증정경부인안정나씨지묘

 

문헌공 남애 정휘량(文憲公 南崖 鄭翬良),  이조참판 정원달(鄭遠達),  문충공 우의정 정우량(文忠公 鶴南 鄭羽良)

 

 

문충공 학남 정우량(文忠公 鶴南 鄭羽良)

 

大匡輔國崇祿大夫 議政府右議政 贈諡文忠 迎日鄭公諱羽良之墓

대광보국숭록대부 의정부우의정 증시문충 영일정공휘우량지묘

貞敬夫人龍仁李氏祔左   貞敬夫人全州李氏祔右   貞敬夫人淸風金氏祔左

정경부인용인이씨부좌   정경부인전주이씨부우   정경부인청풍김씨부좌

 

 

문충공 학남 정우량文忠公 鶴南 鄭羽良

1692(숙종18)~1754(영조30)

본관은 영일(迎日). 는 자휘(子翬), 는 학남(鶴南).

강원도관찰사 정시성(鄭始成)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첨지중추부사 정인빈(鄭寅賓)이고,

아버지는 판서 정수기(鄭壽期)이며,

어머니는 정경부인 파평윤씨로 통덕랑 윤희수(尹希壽)의 따님이다.

좌의정을 지낸 문헌공 남애 정휘량(文憲公 南崖 鄭翬良)의 형이며,

둘째 아들 일성위 정치달(日城尉 鄭致達)

영조(英祖)의 아홉째 딸인 화원옹주(花緩翁主)의 부마이다.

1723(경종3) 증광문과에 병과로 급제한 뒤  1727(영조3) 정언이 되어

당시 백성들을 효유(曉諭)하는 왕의 교서를 한글로 번역하여 각도에 반포하였다.

부수찬으로 시독관(侍讀官)을 겸임할 때

왕에게 이황(李滉)과 이이(李珥)의 문집을 인판(印版)하기를 주청하여 간행하게 하였다.

지평·대사성을 역임하고 좌승지 때에는 공종수(孔宗洙)를 선성(先聖)의 후예로 추대하고

반궁(泮宮)에 두어 녹(祿)을 지급할 것을 소청하여 시행하기도 하였다.

이조참판 당시 민통수(閔通洙)와 사이가 좋지 못하여 이천부사로 좌천되었으나,

이어 우참찬이 된 뒤에는 한성부에 있는 서북인을 등용하여 인심을 수습할 것을 주청하였다.

1749(영조25) 병조판서를 거쳐 우의정에 올랐으며 그 뒤 판중추부사에 전임되었다.

글씨에 능하여 작품으로 개성계성사비문(開城啓聖祠碑文)을 남겼다. 시호는 문충(文忠)이다.

 

 

문헌공 남애 정휘량(文憲公 南崖 鄭翬良)

문헌공 남애 정휘량(文憲公 南崖 鄭翬良)

1706(숙종32)~1762(영조38)

본관은 영일(迎日). 는 자우(子羽) 또는 사서(士瑞), 는 남애(南崖).

강원도 관찰사를 지낸 정시성(鄭始成)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첨지중추부사 정인빈(鄭寅賓)이고,

아버지는 판돈녕부사 정간공 정수기(鄭壽期)이며,

어머니는 정경부인 파평윤씨로 통덕랑 윤희수(尹希壽)의 따님이다.

당시 우의정을 지낸 문충공 학남 정우량(文忠公 鶴南 鄭羽良)의 동생이다.

1733(영조 9) 사마시에 합격하여 생원이 되고,

1737년 별시문과에 을과로 급제한 뒤, 시독관(侍讀官응교를 지냈다.

1755천의소감(闡義昭鑑)의 찬집당상(纂輯堂上)이 되었으며,

이듬해 제학을 거쳐 대제학에 올랐다.

그 뒤 호조·공조·이조·병조의 판서를 지내고 평안도관찰사로 나갔다가,

1761년 우의정이 되고 곧 좌의정에 올랐다.

1755년 나주괘서사건[乙亥獄事]

정휘량을 비롯한 소론계 온건파 대부분이

소헌 조태구(素軒 趙泰耉)와 만암 유봉휘(晩菴 柳鳳輝) 등의 죄를 탄핵하여,

조태구와 유봉휘를 노적(奴籍)으로 떨어뜨리고

운곡 이광좌(雲谷 李光佐)와 손와 최석항(損窩 崔錫恒)도 추탈(追奪)되게 하였다.

이후 사도세자의 평양서행사건을 수습하며

자청해서 정승의 직위를 내려놓고 판중추부사(判中樞府事)로 전직하였다.

일성위 정치달(日城尉 鄭致達)의 숙부로서

안으로 정치달의 처인 화완옹주(和緩翁主)의 도움을 많이 받았으며,

하계 김상로(霞溪 金尙魯)와 담와 홍계희(澹窩 洪啓禧)등과 무진·기사 연간에 사설(辭說)을 일으켰다.

이들 형제는 모두 귀록 조현명(歸鹿 趙顯命)의 후원으로 대신의 지위에 올랐으며,

또 대제학을 역임하여 문명이 높았다. 시호는 문헌(文憲)이다.

저서로는 남애집(南崖集)·견사록(見思錄)등이 있다.

大匡輔國崇祿大夫議政府左議政 弘文館藝文館大提學知成均館事 贈諡文憲迎日鄭公諱翬良之墓

貞敬夫人楊州趙氏祔左

대광보국숭록대부의정부좌의정 홍문관예문관대제학지성균관사 증시문헌영일정공휘휘량지묘

정경부인양주조씨부좌

 

 

//증 영의정 정간공 곡구 정수기(貞簡公 谷口 鄭壽期) 가계//

      5대조 정제(鄭濟) 효릉 참봉, 증 좌통례

    고조부 정여온(鄭汝溫) 증 승정원 좌승지

    증조부 정용(鄭涌) 증 의정부 좌참찬

할아버지 정시성(鄭始成) 강원도관찰사

    아버지 정인빈(鄭寅賓) 첨지중추부사

                  증 영의정 정간공 곡구 정수기(貞簡公 谷口 鄭壽期)

                  배위 정경부인 안정나씨, 장령 나양좌(羅良佐)의 따님

                  계배 증 정경부인 파평윤씨, 통덕랑 윤희수(尹希壽)의 따님

                           장남 문충공 학남 정우량(文忠公 鶴南 鄭羽良)

                                        손자 이조참판 정원달(鄭遠達)

                                        손자 일성위 정치달(日城尉 鄭致達), 화완옹주(和緩翁主)

                            차남 문헌공 남애 정휘량(文憲公 南崖 鄭翬良)

                 동생  정수구(鄭壽龜) 통덕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