관악구-효민공 석민 이경직(孝敏公 石門 李景稷), 전주이씨 덕천군파
전주이씨 효민공 석민 이경직(孝敏公 石門 李景稷)
서울시 유형문화재 제105호
서울시 관악구 남현동 산57-48
효민공 석민 이경직(孝敏公 石門 李景稷)
1577년(선조10)~1640년(인조18)
본관은 전주(全州). 字는 상고(尙古), 號는 석문(石門).
함풍도정(咸豊都正) 이계수(李繼壽)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증 이조참판 이수광(李秀光)이다.
아버지는 동지중추부사 이유간(李惟侃)이며,
어머니는 개성고씨(開城高氏)로 대호군(大護軍) 고한량(高漢良)의 딸이다.
이항복(李恒福)과 김장생(金長生)의 문하에서 수학하였다.
1601년(선조34) 25세에 사마시에 합격해 진사가 되고,
1606년 증광 문과에 병과로 급제해 승문원권지부정자에 올랐다.
1609년(광해군1) 승문원주서 겸 시강원설서,
1610년 홍문관정자·봉교, 이듬해 전적·호조좌랑·수찬·병조좌랑 겸 지제교 등을 역임하였다.
1613년 병조정랑으로 승진했으나 이이첨(李爾瞻)이 득세해 이른바 계축옥사를 도모하자,
이에 연루된 개성유수 약봉(藥峯) 서성(徐渻)과 친분이 있다는 이유로 수성찰방(輸城察訪)으로 나갔다가 파직되었다.
그 뒤 황해도도사로 복직되고,
다시 병조정랑이 되어 접반관(接伴官)·진휼종사관(賑恤從事官)·평안도경차관(平安道敬差官) 등을 겸하였다.
1617년에는 회답사(回答使) 추탄(楸灘) 오윤겸(吳允謙)을 따라 종사관(從事官)으로 일본에 다녀오기도 하였다.
1618년 폐모론에 반대해 사직하고, 약 5년여를 고향에 내려가 지냈다.
1621년 후금의 요동공격으로 조선으로 도망쳐온 모문룡(毛文龍)이 후금의 배후에서 싸운다는 명분으로
1622년 평안도 철산 앞 바다의 가도(椵島)에 주둔하자 백의종군했으며,
이어 철산부사가 되어 모문룡의 신임을 얻었고, 인조반정 이후 형조참의·의주부윤이 되었다.
또한, 이괄(李适)의 난이 일어나자 전라도절도사로 여산(礪山)으로 가, 병사들을 모으고 난군 진압에 힘썼다.
그 공으로 가선대부(嘉善大夫)로 품계가 오르면서 수원부사가 되었다.
1626년(인조4) 부총관, 장례원판결사를 거쳐
병조참판 겸 동지의금부사, 도체찰찬획사(都體察贊畫使), 비변사유사당상이 되었다.
1627년 정묘호란 때는 병조참판으로 仁祖를 강화도에서 호종하고 강화가 성립될 때 접반사로 활약, 환도 이후 호조참판이 되었다.
1629년 도체찰부사(都體察副事)로서 모문룡 병사의 동향을 파악하기에 노력했으며,
호조참판·경기도관찰사를 거쳐 1634년 도승지가 되었다.
1636년 병자호란 때는 부호군으로 비변사당상을 겸해 남한산성으로 왕을 호종했고, 화의가 성립된 뒤 호조판서가 되었다.
그러나 영의정 북저(北渚) 김류(金瑬)와의 불화로 일시 정직되었다가 다시 도승지·강릉부사·동지중추부사 겸 경도총관을 지냈다.
1640년 강화유수로 있다가 병으로 64세에 졸하였다.
관료로서 재주가 있고 품위가 준수했으며, 특히 사부(詞賦)와 글씨가 뛰어났다.
좌의정에 추증되었으며, 시호는 효민(孝敏)이다.
贈議政府領議政諡孝敏 行資憲大夫戶曹判書李公之墓 貞敬夫人固城李氏祔左 贈貞敬夫人寶城吳氏合葬
증의정부영의정시효민 행자헌대부호조판서이공지묘 정경부인고성이씨부좌 증정경부인보성오씨합장
이경직신도비 李景稷神道碑
서울특별시 유형문화재 제105호
1668년(현종 9) 건립. 총높이 161㎝, 비신 높이 146㎝, 너비 56㎝, 두께 17㎝.
효민공 석민 이경직(孝敏公 石門 李景稷)은 전주이씨 덕천군파의 후손으로
백사(白沙) 이항복(李恒福)과 사계(沙溪) 김장생(金長生)의 제자이다.
1601년(선조34) 생원·진사 양시에 합격하고
1605년 식년시와 증광별시에 잇달아 합격하는 등 뛰어난 자질을 보였으며,
승정원·시강원·홍문관·병조 등 여러 관직을 역임했다.
광해군의 폐모(廢母)에 참여하지 않아 5년간 관직에 나가지 못했다가
명군(明軍) 모문룡(毛文龍)이 평안도 철산군의 가도(椵島)에 주둔하는 문제가 일어났을 때 철산부사로 나아가 활약했고,
인조 때에는 의주부윤이 되어 선정을 베풀었다.
1624년 이괄(李适)의 난 때에 전라도절도사로서 仁祖를 호종했고 정묘호란과 병자호란 때에도 많은 공을 세웠다.
말년에 병중의 몸으로 강화유수(江華留守)로 나아갔다가 임소에서 세상을 떠났다.
사망 후 우의정에 추증되었고 시호는 효민(孝敏)이다.
비문에는 이러한 그의 생애가 기록되어 있는데,
비문은 영의정 북저(北渚) 김류(金瑬)가 찬하고
셋째아들 영의정 효간공 서곡 이정영(孝簡公 西谷 李正英)이 쓰고
“贈右議政行戶曹判書諡孝敏李公神道碑銘”
“증우의정행호조판서시효민이공신도비명” 이라 전액하였으며, 북저(北渚) 김류(金瑬)의 사망 이후의 행적을 추기하였다.
//효민공 석민 이경직(孝敏公 石門 李景稷)가계 //
7대조 조선2대 정종(定宗 이방과)
6대조 덕천군 이후생(德泉君 李厚生)
5대조 신종군 이효백(神宗君 李孝伯)
고조부 완성군 이귀정(莞城君 李貴丁)
증조부 함풍군 이계수(咸豊君 李繼壽)
할아버지 이수광(李秀光), 충의위, 증 의정부좌찬성
할머니 증 정경부인 안동김씨, 행 충좌위부사과 김언정(金彦禎)의 따님.
아버지 우곡 이유간(愚谷 李惟侃), 동지중추부사
어머니 증 정경부인 개성고씨, 대호군 고한량(高漢良)의 따님
동생 문충공 백헌 이경석(文忠公 白軒 李景奭)
효민공 석민 이경직(孝敏公 石門 李景稷), 호조판서
배위 정경부인 보성오씨, 첨지중추부사 오경지(吳景智)의 따님
장남 이장영(李長英), 상주목사 (1610~1677)
배위 숙인 영일정씨, 송강 정철의 증손녀
손자 이집성(李集成) 함양군수,
이민성(李敏成)
이구성(李九成) 사헌부감찰,
이관성(李觀成) 현감,
이노성(李老成) 현령,
이현성(李玄成) 군수
손녀사위 우의정 동강 조상우
대사헌 풍계 조태동
차남 이후영(李後英), 예조판서
삼남 효간공 서곡 이정영(孝簡公 西谷 李正英), 예조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