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름에 달

화성-의산군 충무공 남이 장군(宜山君 忠武公 南怡 將軍)

碧巖 2021. 5. 22. 23:01

의산군 충무공 남이 장군(宜山君 忠武公 南怡 將軍)

경기도 화성시 비봉면 남전리 산 145

 

의산군 충무공 남이 장군(宜山君 忠武公 南怡 將軍)

1441(세종23)~1468(예종즉위년)

본관은 의령(宜寧)

할아버지는 영의정부사 남재(南在), 할아버지는 의산군 남휘(南暉)이며,

아버지는 군수 남빈(南份)이며, 어머니는 정선공주(태종의 4녀)이고,

좌의정 익평공 소한당 권람(翼平公 所閑堂 權擥)의 사위이다.

 

1457년(세조3) 무과에 장원급제하고, 세조의 총애 속에서 여러 무직을 역임하고

1466년 발영시에 급제한 뒤 1467년 포천, 영평 등지에서 도적을 토벌했다.

1467년 5월 이시애(李施愛)가 반란을 일으키자

함길도,강원도,평안도,황해도의 4도병마도총사에 임명된 구성군(龜城君) 이준(李浚)과

부총사 충간공 조석문(忠簡公 曺錫文)의 휘하에서

충정공 상우당 허종(忠貞公 尙友堂 許琮), 장민공 강순(莊敏公 康純), 정장공 어유소(貞壯公 魚有沼) 등과

토벌에 참가했으며, 군중에서 당상관에 초계(超階)되어 행부호군(行副護軍)을 거쳐 행호군이 되었다.

이시애의 난을 토벌한 공으로 적개공신(敵愾功臣) 1등에 책록되고 의산군(宜山君)에 봉해졌다.

이어 서북변(西北邊)의 건주위(建州衛) 여진을 토벌하자

평안도선위사(平安道宣慰使) 윤필상(尹弼商)의 지휘 하에 우상대장(右廂大將)이 되어

주장(主將) 강순(康純), 좌상대장(左廂大將) 어유소(魚有沼)와 함께

만포(滿浦)로부터 파저강(波猪江)을 공격해 이만주(李滿住)를 참살했다.

이러한 공로로 이등군공(二等軍功)을 받았으며, 그 뒤 공조판서에 임명되었다.

1468년에는 오위도총부도총관(五衛都摠府都摠管)을 겸했으며, 이어 27세로 병조판서에 발탁됐다.

그러나 그 해 보한재 신숙주(保閑齋 申叔舟), 압구정 한명회(狎鷗亭 韓明澮) 등 원상(院相) 세력에 의해

구성군과 강순 등 이시애의 난 평정으로 등장한 신 세력이 제거될 때

형조판서 사숙재 강희맹(私淑齋 姜希孟)이 지중추부사(知中樞府事) 한계희(韓繼禧)에게

남이의 사람됨이 군사를 장악하기에는 마땅치 않다고 말한 것을,

한계희가 예종에게 아룀으로써 병조판서에서 해직되어 겸사복장(兼司僕將)으로 밀려났다.

이때 궁궐 안에서 숙직을 하고 있던 중 혜성(彗星)이 나타나자

“혜성이 나타남은 묵은 것을 없애고 새 것을 나타나게 하려는 징조다.”라고 말했는데,

이를 엿들은 병조참지(兵曹參知) 유자광(柳子光)이 역모를 꾀한다고 모함함으로써

국문 끝에 능지처참을 당했다.

그 뒤 1818년(순조 18)

우의정인 문헌공 금릉 남공철(文獻公 金陵 南公轍)의 주청으로 강순(康純)과 함께 관작이 복구되었다.

어릴 때 권람(權擥)의 딸이 귀신의 장난으로 죽게된 것을

남이가 귀신을 물리치고 살려준 것이 인연이 되어 그녀를 아내로 맞았다는 일화가 있다.

창녕의 구봉서원(龜峯書院),

서울 용산구의 용문사(龍門祠) 및

서울 성동구의 충민사(忠愍祠)에 배향되었다. 시호는 충무(忠武)이다.

 

兵曹判書忠武公南怡將軍之墓

병조판서충무공남이장군지묘

 

 

//의령남씨 의산군 충무공 남이 장군(宜山君 忠武公 南怡 將軍) 가계//

    6대조 지영광군사 남천로(南天老)

    5대조 검교시중 증 영의정 경열공 남을번(敬烈公 南乙蕃)

   고조부 영의정부사 충경공 귀정 남재(忠景公 龜亭 南在)

   증조부 병조의랑 남경문(南景文)

할아버지 의산군 소간공 남휘(宜山君 昭簡公 南暉)

   할머니 정선공주(貞善公主,태종의 4녀)

   아버지 군수 남빈(南份)

   어머니 남양홍씨, 현감 홍여공(洪汝恭)의 따님

             의산군 충무공 남이 장군(宜山君 忠武公 南怡 將軍)

            초배위 안동권씨,  좌의정 익평공 소한당 권람(翼平公 所閑堂 權擥1416~1465)의 따님

            후배위 고성이씨, 서윤 이호연(李浩然)의 따님

                      따님 남구을금(南求乙金, 한명회(韓明澮)의 노비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