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천-인천 도호부관아(仁川 都護府官衙)
인천도호부관아
인천시 미추홀구 문학동 349-2
인천 도호부관아(仁川 都護府官衙)
조선시대의 지방행정조직은 1413년(태종 13년)에 전국을 8도(道)로 나누었고
도밑에는 대도호부(大都護府)·목(牧)·도호부(都護府)·군(郡)·현(縣) 등이 있었으며,
인천도호부내에는 10개의 면(面)과 그 밑에 다수의 동(洞)·리(理)·촌(村)이 있었고,
동·리의 밑에는 매 5호(戶)를 한 개의 통(統)으로 하는 5가작통제(五家作統制)가 시행되었다.
도호부는 중앙에서 파견된 도호부사(都護府使) 아래에
이(吏)·호(戶)·예(禮)·병(兵)·형(刑)·공방(工房)의 6방(房)을 두어 사무를 분담하게 하였는데
이를 담당하는 자는 지방의 향리(鄕吏)였으며,
1485년(성종16년) 경국대전(經國大典)에 규정된 당시 도호부 향리의 수는 26인이나 그 수는 점차 증가되었다.
인천부읍지(仁川府邑誌)에 의하면 관할구역은
1748년(영조24년) 당시에는 강화도·영종도·덕적도 등이 인천에 속했으며
인구는 2천 6백여가구에 8천여명이 거주하였다고 기록되어 있다.
인천 도호부관아 아문(衙門)
아문(衙門)
아문은 관아의 정문으로 2층으로 된 누대(樓臺)에 위풍당당한 팔작지붕의 형태를 취하고 있다.
아문은 세 칸으로 나누어져 있어 외삼문이라 하는데,
가운데 문은 주로 수령만이 출입하고 좌우문은 일반인이 이용하였다.
아문에 이르면 수령 이하 모든 사람이 말에서 내려 걸어서 출입하는 것이 통례였으며,
좌우에 건장한 문지기들이 지키고 있어 함부로 드나드는 것을 막았다.
또한 대문의 공간 일부를 이용하여 민원인들의 임시 대기실로 쓰기도 하였다.
외삼문
중문(中門)
중문(中門)은 수령이 집무실인 동헌으로 들어가기 위한 문으로 6방관속들의 집무처이기도 하였다.
동헌(東軒)
동헌(東軒)
동헌은 부사(府使)의 집무실로서 객사(客舍)의 동쪽에 있다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건물의 격식은 객사보다 한 단계 떨어졌으나
그 지역 최고 실력자의 지위에 합당하게끔 위엄을 느낄 수 있도록 설계되었다.
중앙은 마루로 된 대청으로 지방의 일반행정업무와 재판이 여기서 행하여졌고,
좌우의 온돌방은 숙식공간이라기 보다는 사무공간이나 응접공간이었다.
수령의 가족이 머무는 내아(內衙)는 따로 배치되었다.
사주문(四柱門)
동헌의 부속 건물로써,
수령의 개인비서와 자제가 머무르는 책방 외에 가족이 머무는 내아(內衙)가 따로 배치되었는데,
사주문은 내아에서 동헌으로 왕래할 때 사용되는 문이다.
인천도호부 역대부사 충의비
인천도호부 객사
객사(客舍)
객사는 임금의 위패(位牌)를 모시고 있는 건물로서
수령의 집무실인 동헌(東軒)보다도 격이 높았으며
그런 만큼 관아 시설 중에서 규모가 제일 크고 화려하며 전망이 가장 좋은 곳에 자리 잡고 있다.
객사는 신성한 건물로서의 위엄을 드러내기 위해 설계되었는데,
가운데 채가 좌우 채보다 한 단 높은 솟을대문 형식의 독특한 지붕이다.
전패(殿牌)를 모시고 있는 가운데 채가 전청(殿廳)이며,
부사(府使)가 정기적으로 예(禮)를 올리면서 임금에 대한 충성을 다짐하는 곳이었다.
좌우의 익사(翼舍)는 중앙에서 내려온 사신의 접대와 숙소로 이용되었다.
공수(公須)
공수는 객사(客舍)의 부속건물로써 부엌·곳간·온돌방 등으로 구성되어있으며
기능으로는 객사를 관리하는 인원과 중앙 사신을 수행한 수행 인력들이 유숙하고,
객사에 필요한 물품을 보관하던 곳이다.
이들 업무를 주관하는 곳이 공수청(公須廳)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