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산-청문당(淸聞堂), 안산 청문당(安山 淸聞堂)
안산 청문당(淸聞堂)
경기도 문화재자료 제94호
기부 진주유씨 성산공파(晉州柳氏 星山公派)
경기도 안산시 상록구 청곡길 77, (부곡동 261-15)
안산 청문당(安山 淸聞堂)
진주 유씨 16세손 성산 유시회(星山 柳時會,1562∼1635)가 지었다고 전하는 가옥이다.
원래 유시회(柳時會)는 충북 괴산에 살았는데
조카 유적(柳頔,1595~1629)이
선조의 사위(배위 정정옹주,1595~1666)로 정해진 후
아버지 기정 유시행(朞丁 柳時行,1566~1607)이 세상을 뜨자
선조의 명으로 이곳 안산에 묘자리를 정하고 정착하여 살기 시작하였다.
이후 나라에서 넓은 땅과 안산 바닷가의 어염권을 받아 대대로 살아오면서 많은 인물들을 배출하였다.
청문당은 조선 후기에 와서 정치권력에서 소외된 문인들의 교류장으로 쓰였으며,
특히 조선시대 4대 서고의 하나인 청문당(淸聞堂)은
만권의 서적이 있어서 만권루(萬券樓)라 하였으며,
이들의 학문적인 기반이 되었다고 한다.
당쟁에서 물러난 남인들의 활동하던 곳으로
성산 유시회(星山 柳時會,1562~1635)의 4대손인 해암 유경종(海巖 柳慶種,1714~1784)이
매부인 표암 강세황(豹菴 姜世晃,1713~1791)과
지기인 순암 안정복(安鼎福,1712-1791)과 함께
성호 이익(星湖 李瀷,1681~1763)의 문하 생활을 하며
수많은 문인 화가들이 활동하던 곳으로
특히, 단원 김홍도(檀園 金弘道,1745~1806,1818 ?)의 스승인 표암 강세황이
안산 처가로 내려와 기거하여
김홍도가 어릴적 표암에게 그림을 배우던 곳이라 한다.
기부 진주유씨 성산공파(晉州柳氏 星山公派)
개멸(元釜谷)
옹기마을 동쪽으로 마을 남쪽에 있는 산이 풍수로 보아 가마(釜)를 엎어 놓은 형국(伏釜形局)이므로 가마산(伏釜山)이라 했고, 그 후 취락이 형성되자 산명에 취해 가마골이라 불렀는데 후대에 내려오면서 개멸(元釜谷)로 통칭되었다. 이 마을은 진주유씨 누대의 세거지로 다음과 같은 사연이 있다.
조선왕조 제14대 임금인 선조와 정빈홍씨(貞嬪洪氏)의 소생인 정정옹주(貞正翁主,1595~1666)가 동갑인 유적(柳頔,1595~ ?)과 혼인하기로 약정되었으나 12세때에 시아버지가 될 유시행(柳時行,1566~ ?,교리)이 별세하자 3년상을 치르었고, 14세 때 뜻밖에 선조가 돌아가자 다시 3년상을 치른 후에 17세에 이르러 결혼을 하였다거 한다. 그러나 부군인 유적이 몸이 허약해 25세 때 죽자 청상이 되었다. 한편 유시행은 본래 선산인 충북 괴산군 몽촌에 예장을 치를 계획이었으나 서울에서 3백리 이상이나 되는 원거리인 데다가 왕가의 장지는 1백리를 넘을 수 없다는 법도에 따리 이곳에 사패지를 하사받아 진주유씨의 세장지가 되면서 후손들이 묘하에 모여 살기 시작했다.
조선 시대에는 안산군 군내면 부곡리라 불렀던 개멸은 마을 북쪽지역은 나무가 많고 숲이 우거진 곳이라 하여 만수동(萬樹洞)이라 부르고, 동쪽 지역은 골짜기 안에 위치한 마을이므로 안골 또는 유석(유석.1595~1655,관찰사)의 묘가 능같이 크다 하여 능안이라 칭하였다. 개멸이라고 하면 보통 능안을 지칭한다. 매년 10월 1일과 3일 사이에 길일을 택해 마을 뒷산인 곤우봉(昆牛峯)에서 산신제를 지내는데, 이곳에는 유석(柳碩)등의 묘소가 있다.
청문당(淸聞堂)
안산 청문당(淸聞堂) 건물 후면에 위치한 안산시 보호수 모과나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