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흥-충의공 평원군 송운 원성모(忠義公 平原君 松耘 元成模),원릉군 남계 원승길(元陵君 南溪 元升吉),증 호조좌랑 원이길(元頤吉),원주원씨

원주원씨 충의공 평원군 송운 원성모(忠義公 平原君 松耘 元成模)
경기도 시흥시 정왕동 826-1

원주원씨 시중공파 종친회 숭모당



嘉善大夫工曹參判兼同知義禁府事 五衛都摠府副摠管 行通訓大夫兼
가선대부공조참판겸동지의금부사 오위도총부부총관 행통훈대부겸
居山道察訪元公神道碑 貞夫人長水黃氏祔左
거산도찰방원공신도비 정부인장수황씨부좌

충의공 평원군 송운 원성모(忠義公 平原君 松耘 元成模,1569~1637)
본관은 원주(原州), 자는 경범(景範), 호는 송운(松耘)이다.
할아버지는 이조판서 원계검(元繼儉), 아버지는 선교랑 원호영(元虎英)이다.
1603년(선조 36) 무과에 급제한 후 거산도찰방(居山道察訪)이 되었다.
병자호란이 일어나자 근왕병을 모집하여
안산군 마유면(지금의 시흥시 정왕동)에 있는 정왕산에 진을 치고 청군과 치열한 전투를 벌였다.
3일간의 혈전 끝에 큰아들 원승길(元升吉),
막내아들 원이길(元頤吉)과 함께 삼부자가 같은 날 순절하였다.
공조참판에 추증되었다가 숙종 대에 다시 영의정으로 증직되고 평원군(平原君)에 봉해졌다.
시호는 충의(忠毅)이다.

시흥시 정왕동 아랫평안촌마을의 남쪽 언덕에 있는
원주원씨(原州元氏) 세장지(世葬地) 맨 위에 남향으로 자리하고 있다.
원성모 묘는 처음에 경기도 시흥시 정왕본동 배나루마을에 있다가
1990년 무렵 본래 위치에서 서남쪽으로 300m 떨어진 지금의 위치로 이장하였다.
이장할 때 수염까지 그대로 남아 있을 정도의 미라(mirra)로 발견되었는데,
전투 당시 입었던 옷이 변색되지 않은 채 청군의 칼에 찔린 혈흔이 남아 있었다고 전하여지며
부인 장수황씨(長水黃氏)와 합장한 단분(單墳)이다.
묘역에는 상석·향로석·망주석 등의 석물이 갖추어져 있고, 봉분의 촤측에 신도비가 건립되어 있다.
신도비는
1699년 성주인 이조판서 정헌공 은암 이광적(靖憲公 隱巖 李光迪,1628~1717) 찬하였다고 한다.
바로 입석을 못하고 성주인 대사간 이교인(李敎寅)의 글씨로 세웠는데 마모가 심하여
시대로 보아 철종재위 기간에(1849~1863) 세워진 것으로 추측하고 있다.
비신의 높이는 1.34m로 비문의 앞면에
'증가선대부 공조참판 겸 동지의금부사 오위도총부부총관 행통훈대부 겸 거산도찰방 원공신도비 증정부인 장수 황씨 부좌(贈嘉善大夫工曹參判兼同知義禁府事五衛都摠府副摠管行通訓大夫兼居山道察訪元公神道碑贈貞夫人長水黃氏祔左)'라고 새겨 있어 신도비인 것을 알 수 있다.
비신의 전면에 신도비라고 밝힌 예가 드물어 조선 후기 신도비 연구에 중요한 자료로 평가된다고 한다..

贈嘉善大夫工曹參判兼同知義禁府事五衛都摠府副摠管行通訓大夫兼
居山道察訪元公神道碑 贈貞夫人長水黃氏祔左
증가선대부공조참판겸동지의금부사오위도총부부총관행통훈대부겸
거산도찰방원공신도비 증정부인장수황씨부좌


신도비 1699년 성주인 이조판서 정헌공 은암 이광적(靖憲公 隱巖 李光迪,1628~1717) 찬


충의공 평원군 송운 원성모(忠義公 平原君 松耘 元成模)와 형님 경재 원성해(敬齋 元成楷) 묘역후경

松耘 元成模將軍 殉國碑
송운 원성모장군 순국비
경기도 시흥시 정왕동 산119-45




松耘元成模將軍殉國碑
송운원성모장군순국비

충의공 평원군 송운 원성모(忠義公 平原君 松耘 元成模,1589~1603) 1603년 35세에 무과에 급제해 선교랑으로 거산도 찰방과 현령을 지냈다. 청렴결백하여 지방관 시절 백성들에게 많은 선정을 펼쳤고 이를 잊지 못한 백성들이 선정비까지 세울 정도로 존경을 받았다. 안산(현 시흥시)에서 말년을 보내다 1636년(인조 14) 병자호란이 일어나자 강화도까지 점령한 청군은 안산으로 진군해 왔고 원성모는 의병을 모아 정왕산으로 올라가 봉수 산성에서 적과 전투를 벌였다. 옛날 정왕산에는 봉수대가 있었고 현재도 인근 마을 이름엔 ‘봉우재’라는 명칭이 남아 있다. 원성모는 첫재 아들 원승길(元升吉)과 막내아들 원이길(元頤吉)과 더불어 의병을 모아 봉수산성 전투를 벌였다. 청군의 기세가 만만치 않아 의병을 이끌고 옥구도로 들어간 원성모는 적과 전투를 벌여 많은 적을 섬멸했다. 그러나 중과부적으로 시간이 지날수록 기력이 떨어지고 무기가 떨어져 정왕역 뒤편 ‘배나루’ 마을을 향해 유언장이 담긴 활시위를 당겼다. 원성모(元成模)가 유언장을 담아 보낸 화살을 정왕역 뒤 ‘배나루’ 마을 정왕산 중턱에 꽂혔고 유언장을 실은 화살은 원성모(元成模)를 찾아 나선 가족들에게 발견됐다. 이후 원성모(元成模)는 오이도 전투 끝에 적의 화공(火功)에 밀려 두 아들과 함께 전장에서 순절했다. 가족들은 화살이 떨어진 ‘배나루’ 마을 산 중턱에 삼부자의 시신을 묻고 장례를 치렀다. 묘는 경기도 시흥시 정왕동 배나루에 있었으나, 이곳 일대가 시화 지구 토취장에 편입되자 1990년경 본래의 위치에서 서남쪽으로 약 300m 떨어진 원주 원씨 선영으로 이장하였으며, 이장할 때 원성모(元成模)의 미이라가 발견되었는데 원성모(元成模)의 시신이 수염까지도 온전한 채로 속옷과 겉옷은 물론, 관복까지도 변색되지 않은 채 청나라 군사의 칼에 옆구리 두 곳을 맞아 순절하면서 흘린 혈흔이 관복에 벌겋게 스며있었다고 한다.
영조 때 순충장의형난일등공신에 책록하고 영의정으로 추증하였다. 충의(忠義)라는 시호를 받았다. 함께 전사한 첫째 아들 원승길(元升吉)은 후에 좌찬성 원릉군(元陵君)으로, 막내아들 원이길(元頤吉)은 호조 좌랑으로 추증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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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의공 평원군 송운 원성모(忠義公 平原君 松耘 元成模)장군의 장남 원릉군 남계 원승길(元陵君 南溪 元升吉)

贈宣武功臣崇祿大夫左贊成 原陵君行宣傳官訓鍊副正 原州元公之墓
증선무공신숭록대부좌찬성 원릉군행선전관훈련부정 원주원공지묘


宣武功臣崇祿大夫左贊成原陵君 原州元公升吉殉節碑
선무공신숭록대부좌찬성원릉군 원주원공승길순절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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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의공 평원군 송운 원성모(忠義公 平原君 松耘 元成模)장군의 차남 증 호조좌랑 원이길(元頤吉)

贈通政大夫戶曹佐郞原州元公頤吉 配贈淑人陜川李氏之墓
증통정대부호조좌랑원주원공이길 배증숙인합천이씨지묘



//원주원씨 충의공 송운 원성모(忠義公 松耘 元成模) 가계//
5대조 음성현감 원효이(元孝而)
고조부 병조판서 원중거(元仲秬)
증조부 부사직 보공장군 원순조(元順祖)
조부 이조판서 검재 원계검(儉齋 元繼儉,1506~1566)
백부 세자익위사 증 좌승지 원호무(元虎武)
조카 현감 원종전(元宗槇)
숙부 감찰 원호준(元虎俊)
조카 동지중추부사 원성집(元成集)
부친 참찬 증 좌승지 경운 원호영(耕雲 元虎英,1548~1592) 무신~임진
모친 성주이씨, 대사헌 이언충(李彦忠)의 따님
형님 사헌부집의 경재 원성해(敬齋 元成楷,1562~1635) 임술 을해
조카 중추부첨지사 원장길(元長吉,1591~1637)--원세장(元世章)
조카 원향길(元享吉), 원석길(元碩吉),원후길(元厚吉), 원의길(元懿吉)
충의공 평원군 송운 원성모(忠義公 平原君 松耘 元成模,1569~1637.1.13)
배위 증 정부인 장수황씨, 군수 황언(黃彦)의 따님
장남 증 좌찬성 원릉군 남계 원승길(元陵君 南溪元升吉,1595~1637.1.13)
손자 원광옥(元光玉)
차남 증 호조좌랑 원이길(元頤吉,1605~1637.1.13) 3인 병자호란순절
손자 원세철(元世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