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창-취석정(醉石亭), 노계 김경희(蘆溪 金景熹), 화산리 고인돌
취석정(醉石亭)
전북특별자치도 고창군 고창읍 노동로 191-9
전북특별자치도 고창군 고창읍 화산리 249
전북특별자치도 유형문화유산
취석정(醉石亭)--전북특별자치도 유형문화유산
조선 중기의 문신이며 조광조(趙光祖)의 제자였던
노계 김경희(蘆溪 金景熹,1515~1575)가 건립한 것으로,
김경희(金景熹)는 1534년(중종 29) 식년시에 생원 3등 34위로 합격하였다.
이어서 문과에 합격하였으나 김안로(金安老) 등의 농간으로 낙방하자
중종이 금장(金粧) 두시전질(杜詩全帙)을 하사하여 위로하였다고 한다.
그는 정암 조광조(靜庵 趙光祖,1482~1520)와
외삼촌인 학포 양팽손(學圃 梁彭孫,1488~1545)의 문인으로 학문이 높았고 시와 문장에 능하였으나,
1545년 을사사화에 연루되어 벼슬길에 오르지 못했다. 중종 때 동국필원(東國筆苑)에 오른 명필이었다.
김경희(金景熹)의 아버지는
효행으로 광릉참봉을 제수받은 돈목재 김기서(敦睦齋 金麒瑞)이며
어머니는 제주양씨로 증 승지 양이하(梁以河)의 따님이다.
노계 김경희(蘆溪 金景熹)는 사화(士禍)를 겪으면서
이곳 고향으로 낙향하여 취석정을 짓고, 시문과 산수를 즐겼다.
취석정(醉石亭)은 조선 명종 1년(1546)에
고창의 선비 광산인 노계 김경희(金景熹,1515~ 1575)가 지은 정자이다.
‘취석(醉石)'이란 중국 시인 도연명(陶淵明) 이
술에 취하면 눕곤 하여 파인 혼적이 남았다는 바위에서 딴 이름으로,
욕심 없이 한가롭게 살아가겠다는 뜻이 담겼으며,
정자를 세운 후 규암 송인수(圭庵 宋麟壽,1499~1547), 둔암 심광언(鈍庵 沈光彦,1490~1568),
죽음 이만영(竹陰 李萬榮,1510~1547), 송천 양응정(松川 梁應鼎,1519~1581) 등과 함께
더불어 정자에 올라 시를 짓고 문학을 강론하였다고 한다.
담장 내에는 훼손되지 않은 지석묘 7기가 있으며 담장 밖으로는 3기의 지석묘가 있다.
현재의 건물은 1871년(고종 8) 후손들이 중건한 것이다.
‘취석’이라는 이름은 중국 도연명(陶淵明)의 시에서 인용한 것으로,
바위의 모습 또한 자연스러워 마치 취한 듯한 모습을 보여 주고 있다.
화산리 고인돌 바위의 한쪽에는 ‘취석정(醉石亭)’이라는 글자를 새겼다.
홑처마 팔작지붕으로 정면 3칸, 측면 3칸의 2고주 5량집 구조이다.
정면과 측면을 각각 3칸으로 만들어 모두 9칸인데,
가운데 1칸을 방으로 꾸미고, 주변은 마루를 둘렀다.
출입은 양 측면에 섬돌을 하나씩 두고 이를 통해 오르도록 하였는데,
마룻바닥 주위에는 4면으로 연잎을 조각한 계자난간(鷄子欄干)을 설치하였다.
취석정(醉石亭)
취석정(醉石亭)
취석정기(醉石亭記)
행주인 문간공 노사 기정진(文簡公 蘆沙 奇正鎭,1798~1879)
취석정기(醉石亭記)
광산인 무장현감 하정 김영수(荷亭 金永壽,1829~1899)
근차취석정운(謹次醉石亭韻)
하음인 봉기종(河陰 奉奇鍾)
근차취석정운(謹次醉石亭韻)
거창인 경당 신사범(絅堂 慎思範,1925~2010)
근차취석정운(謹次醉石亭韻)
황주인 산암 변시연(汕巖 邊時淵,1922~2006)
경차원운(敬次原韻) 후손 김종현(金宗鉉)
후손 김기순(金箕淳)
근차원운(漌次原韻) 후손 인암 김훈석(忍庵 金勳錫,1884~1953)
고창 취석정(醉石亭)과 화산리 고인돌
화산리 고인돌
화산리 고인돌 11 ‘취석정(醉石亭)’
화산리 고인돌1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