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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인-문의공 음애 이자(文懿公 陰崖 李耔), 몽옹 이자(夢翁 李耔), 계옹 이자(溪翁 李耔), 한산이씨

구름에 달

by 碧巖 2022. 3. 4. 22: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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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의공 음애 이자(文懿公 陰崖 李耔)

경기도 용인시 기흥구 지곡동 산 11-17,

경기도 기념물 제172호

 

朝鮮國贈崇政大夫議政府左贊成兼判義禁府事世子貳師知經筵春秋館事成均館事弘文館大提學

조선국증숭정대부의정부좌찬성겸  판의금부사세자이사  지경연춘추관사  성균관사홍문관대제학

藝文館大提學 行資憲大夫議政府右參贊兼 知春秋館事諡 文懿公陰崖李先生神道碑銘 幷序

예문관대제학 행자헌대부의정부우참찬겸 지춘추관사시   문의공음애이선생신도비명 병서

문의공 음애 이자(文懿公 陰崖 李耔), 몽옹 이자(夢翁 李耔), 계옹 이자(溪翁 李耔)

이자(李耔, 1480년성종11~1533년중종28)

조선 중기의 문신이자 학자로 본관은 한산(韓山).

자는 차야(次野), 호는 음애(陰崖), 몽옹(夢翁), 계옹(溪翁).

고려말 대표적 성리학자인 목은 이색(牧隱 李穡)의 5대손이며,

아버지는 대사간 이예견(李禮堅)이고 어머니는 증 정경부인 선산김씨로 종사랑 김관안(金寬安)의 따님이다.

1501년(연산군7) 진사가 되었고,

1504년 식년문과에 장원급제해 사헌부감찰을 지냈다.

천추사(千秋使)의 서장관으로 북경에 다녀온 뒤 이조좌랑에 승진했지만,

연산군 난정 아래에서의 관직 생활에 환멸을 느껴 술로 세월을 보내다가 자청해 의성현령으로 나갔다

한산이씨는 고려 말 신흥 사대부 가문의 하나로,

이색이 조선 왕조의 건국에 지지 입장을 표명함으로써 가문의 안정적 지위가 확보될 수 있었다.

 

어려서부터 아버지 이예견(李禮堅)의 부임지를 따라 관동과 영남 등지에서 살았다.

1494년 15세 때인 성종 25년에 삼척의 두타산 중대사에 올라 《송사》를 읽고 개연히 발분하여

〈만언소〉를 지어 상소하고자 했으나 아버지의 반대로 거두기도 했다.

어려서부터 시정에 대한 명철한 혜안과 비판 의식을 가지고 있었던 것이다.

15세 때는 한훤당 김굉필(寒暄堂 金宏弼)의 문인이며 태종의 현손인 주계군 이심원(朱溪君 李深源)에게 나아가

안분당 이희보(安分堂 李希輔), 김공량(金公諒), 송세충(宋世忠)등과 함께 수학했다.

1501년 22세에 사마시에 합격 이때 함께 합격한 모재 김안국(慕齋 金安國), 돈재 성세창(遯齋 成世昌)등과 교유했다.

1502년 23세인 연산군 8년 생원진사시에

간중 이수정(幹仲 李守貞), 모재 김안국(慕齋 金安國)에 이어 각각 열두 명 중 2등, 열여덟 명 중 2등으로 합격했다.

1504년 24세 때인 연산군 10년 식년 문과에서 장원으로 급제하여 사헌부 감찰에 제수되었고,

이후 이조의 정랑과 좌랑 등 요직을 두루 역임하는 등 일찍부터 능력을 발휘했다.

그러나 연산군의 폭정에 환멸을 느끼고 스스로 외직(의성 현령)으로 나갔다.

1506년 중종반정으로 발탁되어 수찬, 교리, 사간 등을 지냈으며 1517년 부제학과 우부승지에 올랐다.

당시 정암 조광조(靜庵 趙光祖) 등 신진 세력들과 어울리며 개혁을 추진했으나

이들의 정치 노선을 따르지 않고 사림파와 훈구파 사이의 중도 정치노선을 택했다.

그는 훈구파 주도의 정국에서 야기된 여러 가지 문제점을  지적하고, 이를 극복하고자 구체적인 대안을 제시했다.

다만 사림파의 이념과 사상에 완전히 경도되지 않고,

지정 남곤(止亭 南袞)과 희락당 김안로(希樂堂 金安老) 등 훈구 세력과도 원만하게 지냈다.

상황에 따라 사림파와 훈구파의 완충 역할을 했던 것이다.

 

1519년 40세에 형조판서와 우참찬이 되었으나

기묘사화(己卯士禍)가 일어나 정암 조광조(靜庵 趙光祖)등의 사림파의 무리로 지목되어 옥에 갇혔다가

1519년 충재 최숙생(忠齋 崔淑生)과 함께 관직을 삭탈당하고 이후에 퇴거하여

십청헌 김세필(十淸軒 金世弼), 탄수 이연경(灘叟 李延慶), 준암 이약빙(樽巖 李若氷) 등

당시 명망있는 학자들과 학문을 토론하며 여생을 보내고 1533년 54세에 졸 하였다.  

문의(文懿)라는 시호를 제수받았다.

문의공 음애 이자(文懿公 陰崖 李耔)는『기묘명현록』에 올랐고,

충주의 팔봉서원(八峰書院)에

문간공 십청헌 김세필(文簡公 十淸軒 金世弼),

정효공 탄수 이연경(貞孝公 灘叟 李延慶),

문간공 소재 노수신(文簡公 蘇齋 盧守愼)과 함께 배향되었으며

저서로는 《음애일기》는 1509년(중종4) 윤9월부터 1516년(중종11) 12월까지의 기록으로

당시의 정치상황은 물론이고, 왜구와 교섭한 일, 농사에 관한 옛 풍속, 유자광(柳子光) 공훈 삭제의 전말,

여말의 유종(儒宗) 인재 이종학(麟齋 李種學)의 행적 등을 싣고 있는 사료적 가치가 높은 자료로 평가되며,

시문집인《음애집》 등이 있고 문간공 소재 노수신(文簡公 蘇齋 盧守愼)이 행장을 썼다

朝鮮資憲大夫議政府右參贊贈崇政大夫議政府左贊成諡文懿李公耔之墓

조선자헌대부의정부우참찬  증숭정대부의정부좌찬성  시문의이공자지묘

配贈貞敬夫人宜寧南氏 后配贈貞敬夫人仁川蔡氏祔

배증정경부인의령남씨   후배증정경부인인천채씨부

崇禎紀元後五丙子四月日立

1876년, 고종13년

朝鮮資憲大夫議政府右參贊贈崇政大夫議政府左贊成諡文懿李公耔之墓

조선자헌대부의정부우참찬  증숭정대부의정부좌찬성  시문의이공자지묘

配贈貞敬夫人宜寧南氏 后配贈貞敬夫人仁川蔡氏祔

배증정경부인의령남씨   후배증정경부인인천채씨부

 

문의공 음애 이자(文懿公 陰崖 李耔) 묘역후경

 

 

 

 

 

 

문의공 음애 이자 고택(文懿公 陰崖 李耔 古宅)

경기도 용인시 기흥구 지삼로 198번길 26, (지곡동 297-2)

 

陰崖文懿公李耔先生文學碑

음애문의공이자선생문학비

咨歎자탄

浮生五十尙遑遑

부생오십상황황   뜬 구름 오십에 호히려 허둥대니

自笑無良更自傷

자소무량경자상   어질지 못함을 스스로 웃고 상처입네

文似侏儒唯戱劇

문사주유유희극   글은 난쟁이 같아 오직 웃음거리요

學知모升轉荒凉

학지모승전황량   학문을 쓸데없는 물건처럼 황량할 뿐이네

幽明永負趨庭訓

유명영부추정훈   이승과 저승을 영원히 짊어지고 정훈을 따랐더니

終始難遁覆速암

종시난둔복속암   처음부터 끝까지 머뭇거리며 재앙을 뒤집기 어려웠네

點檢心身還不屬

점검심신환불속   몸과 마음을 점검하며 돌아와도 속하지 못하고

可能康濟鑄虞唐

가능강제주우당   백성을 편안히 구제할 수 있다면 요순(堯舜)을 만들겠네.    역자 : 서울대 국사학과 정옥자 교수

 

秋月추월

秋月十分好
추월십분호  가을이 무척 좋아서
淸光此夜寄
청광차야기  맑은 빛의 이 밤이 기이하네
映江波動盪
영강파동탕  강에 비추워 물결이 움직이고
臨峀影參蚩
임수영참치  메 뿌리에 닿으니 그림자가 들쑥날쑥하네
髮白知無忝
발백지무첨  터럭이 희니 더럽힘이 없음을 알겠고
心眞要不斯
심진용불사  마음이 참되려면 속이지 않는 것이 필요하네
旅魂老易感
여혼노이감  나그네의 넋은 늙을수록 느끼기 쉬우니
吟簫自多時
음소자다시  시 읊고 휘파람 부는 것이 스스로 많을 때이네
                      역자 : 이필구(李弼求) 민족문화 추진위원
卽事즉사

地平知守分
지평지수분  연못물이 평평함을 보고 분수지킴을 알겠고
水注待盈科
수주대영과  물대는 것을 보고 과업이 가득찰 것을 기다린다
雲影本無迹
운영본무적  구름의 그림자는 본대 자취가 없고
天容長不頗
천용장불파  하늘의 모양은 길어 기울지 않네
酒醒神散郞
주성신산랑  술깨니 정신이 한가로이 명랑하고
詩就坐婆婆
시취좌파파  시 지으며 편안히 앉아있네
此是人中景
차시인중경  이것이 사람 가운데 경치이니
聊焉滌百痾
요언척백아  문득 백병이 씻는 듯이 났네
                     역자 : 정옥자(鄭玉子) 서울대국사학과교수

 

琴書齋금서재

孝文懿公효문의공                不祧之廟부조지묘

 

//한산이씨 문의공 음애 이자(公 陰崖 李耔) 가계//

한산이씨 시조 호장(戶長) 이윤경(李允卿)

 

 6대조 찬성사 한산군 문효공 이곡(韓山君 文孝公 李穀)

 5대조 문정공 목은 이색(文靖公 牧隱 李穡)

고조부 밀직사사 인재 이종학(麟齋 李種學)

증조부 형조판서 양도공 이숙묘, 이숙무(良度公 李叔畝)

증조모 영동현주 경혜옹주, 태조의 장남 진안대군 이방우(李芳雨)의 따님

   조부 병조참판 첨지중추원사 이형증(李亨增)

   조모 증 정경부인 평양조씨 사인 조아(趙雅)의 따님

   백부 전한 이인견(李仁堅)

   백부 이의견(李義堅)

   부친 대사간 증 좌찬성 이예견(李禮堅)

   모친 증 정경부인 선산김씨, 종사랑 김관안(金寬安)의 따님

          형님 어모장군 당포만호 백야 이우(伯野 李藕)

          초배위 숙부인 여주이씨

                   자 사마 이화(李和)

                            손--- 절손絶孫

          후배위 숙부인 안동권씨

                  자 장사랑 이임(李稔), 출계 숙부 제주목사 이누(李耨)

                           손자 의금부도사 이규(李圭)

                                    증손 이인후(李仁後)

                                    증손 이유후(李裕後),  출계 음애 이자(文懿公 陰崖 李耔)의 증손

         형님 제주목사 중야 이운(仲野 李耘) 수군절제사 공조참의 중종반정원종공신, 出系 이인견(李仁堅)

         배위 숙부인 죽산안씨, 찰방 안우신(安遇臣)의 따님

         형님 의금부도사 계야 이누(季野 李耨)

         배위 의인 해주최씨, 찰방 최홍보(崔洪輔)의 따님

                  자 장사랑 이임(李稔) 生父 당포만호 이우李藕

                            손자 의금부도사 이규(李圭)

                                     증손 이인후(李仁後)

                                     증손 이유후(李裕後), 출계 음애 이자(文懿公 陰崖 李耔)의 증손

         문의공 음애 이자(公 陰崖 李耔), 몽옹 이자(夢翁 李耔), 계옹 이자(溪翁 李耔)

         초배위 증 정경부인 의령남씨 --无育

         후배위 증 정경부인 인천채씨, 대사헌 인천군 양정공 나재 채수(仁川君 襄靖公 懶齋 蔡壽)의 따님

                  자 사암은사 이추(思庵隱士 李秋)

                           손자 모암우사 이배(慕菴憂士 李培), 요수(夭壽)로 무후(無后)

                                     증손자 호조정랑 이유후(李裕後), 생부 의금부도사 이규(李圭)

                                             현손 선릉참봉 이해안(李海安)

                                                      5대손 장릉참봉 이만상(李晩祥)

                                             현손 첨정 이해관(李海寬)

                  1녀 사족 이효백(李孝伯)

                  2녀 박응성(朴應星)

                  3녀 종실 봉릉부수(鳳陵副守)

     녀 참봉 권석균(權石鈞)

     녀 별좌 어숙정(魚叔正)                         벽암 두릉연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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