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은정(四隱亭)
경기도 용인시 기흥구 사은로 161, (지곡동 615)
용인시 향토유적 제50호
사은정 사적비(四隱亭 四蹟碑)
이 정자는 조선 중종조의 명현이며 성리학의 대가이자
동방사현(東方四賢) 중의 한 사람인 정암 조광조(靜菴 趙光祖)선생을 비롯하여
중종때 유학자로 식견이 높기로 유명하였던 방은 조광보(方隱 趙廣輔),
기묘 명현의 회곡 조광좌(晦谷 趙廣佐),
그리고 목은 이색(牧隱 李穡)의 후손으로 기묘사화에 연루되어
정암 조광조와 같이 옥에 갇혔다가 화를 당한 음애 이자(陰崖 李耔) 선생들께서
도의로 친우를 맺고 은거하여 노년의 생활을 즐기기 위하여 건립하였다.
사은(四隱)이라는 이름은
밭 갈고 나무하고 낚시질하고 나물캐는 네가지 경(耕), 신(新), 조(釣), 채(菜)의 즐거운 뜻을 취한 것이라 한다.
1796년(정조20) 정암(靜菴)과 음애(陰崖), 회곡(晦谷) 선생의 후손들이 힘을 합하여 정자를 중건하였는데
서재(書齋)를 다시 짓고 방도 만들었으며 단청도 다시 하였다.
1876년(고종13)에는 중건된지 오래되어 훼손된 정자 후손들이 중창(重創)하였으며,
1925년 다시 중건하였다. 이후 1988년 후손들이 현재의 건물을 중건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사은정 사적비(四隱亭 四蹟碑)
한양인 정암 조광조(靜菴 趙光祖,1482년, 성종13~1519년,중종14)
한산인 음애 이자(陰崖 李耔, 1480년, 성종11~1533년,중종28)
한양인 방은 조광보(方隱 趙廣輔, ? ~ ? )
한양인 회곡 조광좌(晦谷 趙廣佐, 1483년, 성종14~1521년,중종16)
한양인 정암 조광조(靜菴 趙光祖,
본관은 한양(漢陽). 자는 효직(孝直), 호는 정암(靜庵).
증조할아버지는 조육(趙育)이고, 할아버지는 사예(司藝) 조충손(趙衷孫)이며, 아버지는 감찰(監察) 조원강(趙元綱)이다. 부인은 첨사(僉使) 이윤동(李允洞)의 딸이다. 아들은 조용(趙容)이다.
1498년 희천(熙川)에 유배 중이던 한훤당 김굉필(寒暄堂 金宏弼)에게 수학하였고, 이후 성리학 연구에 힘을 쏟아 점필재 김종직(佔畢齋 金宗直)의 학통을 이은 사림파(士林派)의 영수(領袖)가 되었다. 1510년 29세에 진사시에 장원하였고, 1515년 34세에 알성문과 을과에 급제하였다. 이후 전적, 감찰, 정언 등을 역임하며 왕도정치(王道政治)를 주장하였다.1518년 부제학이 되어 소격서(昭格署)의 폐지를 주청하여 관철시켰고, 1519년 38세에 대사헌에 올라 현량과(賢良科)를 실시하여 사서 김식(沙西 金湜) 등 28인의 신진사류를 등용시키는 한편 훈구파의 훈작을 삭탈하였다. 정치적 타격을 입은 지족당 남곤(知足堂 南袞)·, 소요정 심정(逍遙亭 沈貞) 등 훈구파의 반격으로 능주(綾州)에 유배되었다가 사사(賜死)되었다.선조 초에 신원되어 영의정에 추증되고, 광해군 때 문묘(文廟)에 배향(配享)되었다. 능주(綾州)의 죽수서원(竹樹書院), 용인(龍仁)의 심곡서원(深谷書院), 희천(熙川)의 양현사(養賢祠) 등에 봉안되었다. 저서로 ≪정암집 靜庵集≫이 있으며, 시호는 문정(文正).
증조부 조육(趙育)
할아버지 사예 조충손(趙衷孫)
아버지 감찰 조원강(趙元綱), 증 이조참판
어머니 증 정부인 여흥민씨,
형님 감찰 조영조(趙榮祖)
정암 조광조(靜菴 趙光祖, 1482~1519)
배위 증 정경부인 한산이씨, 첨사 이윤동(李允洞)의 따님
아들 군수 조용(趙容)
동생 조숭조(趙崇祖, 1486~1559), 숙천 평산부사, 원주목사
문의공 음애 이자(文懿公 陰崖 李耔)
조선 중기의 문신이자 학자로 본관은 한산(韓山).
자는 차야(次野), 호는 음애(陰崖), 몽옹(夢翁), 계옹(溪翁).
1494년 15세 때 한훤당 김굉필(寒暄堂 金宏弼)의 문인이며 태종의 현손인 주계군 이심원(朱溪君 李深源)에게 나아가
안분당 이희보(安分堂 李希輔), 김공량(金公諒), 송세충(宋世忠)등과 함께 수학했다.
1501년 21세에 사마시에 합격하여 함께 합격한 모재 김안국(慕齋 金安國), 돈재 성세창(遯齋 成世昌)등과 교유했다. 1502년 연산군 8년 22세에 생원진사시에 간중 이수정(幹仲 李守貞), 모재 김안국(慕齋 金安國)에 이어
각각 열두 명 중 2등, 열여덟 명 중 2등으로 합격했다.
1504년 24세 때인 연산군 10년 식년 문과에서 장원으로 급제하여 사헌부 감찰에 제수되었고,
이후 이조의 정랑과 좌랑 등 요직을 두루 역임하는 등 일찍부터 능력을 발휘했다.
그러나 연산군의 폭정에 환멸을 느끼고 스스로 외직(의성 현령)으로 나갔다.
1506년 중종반정으로 발탁되어 홍문관수찬, 교리, 사간 등을 지냈으며 1517년 부제학과 우부승지에 올랐다.
당시 정암 조광조(靜庵 趙光祖) 등 신진 세력들과 어울리며 개혁을 추진했으나
이들의 정치 노선을 따르지 않고 사림파와 훈구파 사이의 중도 정치노선을 택했다.
훈구파 주도의 정국에서 야기된 여러 가지 문제점을 예리하게 지적하고, 이를 극복하고자 구체적인 대안을 제시했다.
다만 사림파의 이념과 사상에 완전히 경도되지 않고,
지정 남곤(止亭 南袞)과 희락당 김안로(希樂堂 金安老) 등 훈구 세력과도 원만하게 지냈다.
상황에 따라 사림파와 훈구파의 완충 역할을 했던 것이다.
1519년 형조판서와 우참찬이 되었으나 기묘사화(己卯士禍)가 일어나
정암 조광조(靜庵 趙光祖)등의 사림파의 무리로 지목되어 옥에 갇혔다가
1519년 충재 최숙생(忠齋 崔淑生)과 함께 관직을 삭탈당하고 이후에 퇴거하여
십청헌 김세필(十淸軒 金世弼), 탄수 이연경(灘叟 李延慶), 준암 이약빙(樽巖 李若氷) 등
당시 명망있는 학자들과 학문을 토론하며 여생을 마쳤다. 시호는 문의(文懿).
증조부 형조판서 양도공 이숙묘, 이숙무(良度公 李叔畝)
조부 병조참판 첨지중추원사 이형증(李亨增)
부친 대사간 증 좌찬성 이예견(李禮堅)
형님 어모장군 당포만호 백야 이우(伯野 李藕) (1466,세조12~1513,중종8)
형님 수군절도사 공조참의 중야 이운(仲野 李耘) (1469년,예종1∼1535년,중종30)
형님 의금부도사 제주목사 계야 이누(季野 李耨)
대제학 문의공 음애 이자(文懿公 陰崖 李耔)(1480, 성종11~1533,중종28)
자 사암은사 이추(思庵隱士 李秋)
손자 모암우사 이배(慕菴憂士 李培)
한양인 방은 조광보(方隱 趙廣輔, ? ~ ? )
일명 광보(廣輔). 호는 방은(方隱).
연산군 때 임사홍(任士洪)이 권력을 장악하여 조정이 어지러워지자,
선전관으로 있던 무인인 송당 박영(松堂 朴英)에게 그를 참살(斬殺)하라고 권한 바 있으나
박영(朴英)은 “한 역적을 죽여서 나라의 근심이 풀린다면 진실로 달게 여기는 바이나,
후세 역사에 ‘임사홍을 도살(盜殺)했다.’고 쓴다면 어떻게 하겠는가.” 하자
방은 조광보(方隱 趙廣輔)는 웃고 말았다고 한다..
1507년(중종2) 참의 유숭조(柳崇祖), 호군 심정(沈貞), 전 승지 남곤(南袞) 등에 의하여
박원종(朴元宗)· 노공필(盧公弼) 등을 해치려 하였다는 죄목으로
의관(醫官) 김공저(金公著), 서얼(庶蘖) 박경(朴耕) 등과 함께 잡혀 국문을 당하였다.
대궐마당에서 국문을 당하면서 옛 글을 소리내어 외우다가
입회한 유자광(柳子光)에게 무오년에 현량(賢良)을 모함하여 죽인 소인이며 아첨하는 신하라고 매도하였고,
박원종에 대하여서도 폐주(廢主: 연산군)의 나인을 첩실로 거느리고 있음을 힐책하였다.
동석한 성희안(成希顔)을 향하여 명유(名儒)이면서 유자광을 섬긴다고 비난하였고,
사신(史臣) 강홍(姜洪), 이말(李抹) 등에게는 사관(史官)으로서 자기의 말을 특서하여 둘 것을 강조하기도 하였다.
결국 장형(杖刑)을 당하자 통곡을 그치지 않아 박원종 등으로부터 광인(狂人)으로 인정되어 석방되었다.
식견이 고명하였으나 거짓으로 미친체하여 스스로를 감추었다는 평을 들었다.
한양인 회곡 조광좌(晦谷 趙廣佐)
조선 중기의 문신으로 본관은 한양(漢陽), 자는 계량(季良), 호는 회곡(晦谷)
1507년(중종2) 정묘년 식년시 생원3등으로 합격하여 성균 유생으로
그 해에 박경(朴耕)과 김공저(金公著)의 옥사에 연루되어 투옥되었다.
1518년(중종13)에 좌랑, 1519년(중종14)에 지평에 올랐다.
1519년 그 해 기묘사화(己卯士禍)가 발발하자 조광조(趙光祖)의 붕당으로 몰려 관직을 잃었으며,
1521년(중종16) 신사무옥(辛巳誣獄)이 일어나자 이에 연루되어 장살(杖殺)당하였다.
증조부 도총제 조모(趙慕)
할아버지 조종효(趙宗孝)
아버지 군수 조훈(趙勛)
형님 방은 조광보(方隱 趙廣輔)
조욱(趙旭), 조담(趙曇), 조방(趙昉)
회곡 조광좌(晦谷 趙廣佐,1483~1521)
동생 조광임(趙廣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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