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창 도암서원(道巖書院)
고창군 향토문화유산 제7호
전북 고창군 공음면 갑촌길 20, (칠암리 819-1)
고창 도암서원(道巖書院)
1613년(광해군 5)에 향중 유림이 김질(金質, 1496∼1555)의 효성과 학문을 기리어
그가 살던 집터인 영모당(永慕堂)에 사우를 세우고 배향하였는데, 후에 서원으로 발전하였다.
1613년(광해군 5)에 영모당(永慕堂) 김질(金質)을 기리어 사우를 세우고 존향해 오다가,
1835년(헌종 1)에 정유재란과 이괄의 난 때에 의병을 일으킨 증손 은송당(蘟松堂) 김경철(金景哲)을 추배하였으며,
1857년(철종8)에는 김경철의 아우로 병자호란 때에 의병을 일으킨 현무재(賢武齋) 김익철(金益哲)을 추배하였다.
1868년(고종 5)에 서원 철폐령으로 훼철되었다가 1946년에 후손들이 복원하여 현재에 이르고 있다.
김질(金質)은 조선 전기의 학자로 본관은 안동이며 호는 영모당(永慕堂)이다.
효심이 지극하여 조부모와 양친을 지성으로 섬겼으며 상중에 치성을 다하였다.
문헌공 고봉 기대승(文憲公 高峯 奇大升)과 송천 양응정(松川 楊應鼎)이 매번 김질을 추중(推重)하여
“김공을 보지 않았으면 누가 50세에도 부모를 사모했음을 알았으리요.
공(公)같은 분은 진실로 당(堂) 이름에 부끄럽지 않다.”라고 했다.
김질(金質)은 48세에 모친상을 당하여서 부친상과 조모부상처럼 한결같이 치성을 드렸고, 후에 효자 정려(旌閭)를 받았다.
서원 초입에는 하마비와 홍살문이 있고, 강당인 영모당, 정려각, 김질의 사우인 도암사(道巖祠)가 있다.
도암사 뒤 현충문 안에 김질의 6대조인
익원공 낙포 김사형(翼元公 洛圃 金士衡, 1341∼1407)의 부조묘(不祧廟)가 배치되어 있으며
도암서원의 제향일은 음력 2월 14일이다.
김질(金質)은 조정 및 중국에 잘 알려진 대효(大孝)일 뿐만 아니라
충(忠)을 겸하여 녹권(錄券)을 보관한 봉안각(奉安閣)이 세워졌다.
영모당, 정려, 봉안각 모두 역사가 오래되었으며,
봉안각의 녹권함과 하마비는 고창지역에서 유일한 유물로 문화재적 가치가 높다.
孝忠門효충문
奉安閣봉안각
旌閭閣정려각
孝子進士金質之閭 嘉靖丙午天朝旌閭
효자진사김질지려 가정병오천조정려 (1546년)
道巖書院廟庭碑
도암서원묘정비
後學達城裵聖洙謹譔 後學全州李學庸謹書
후학달성배성수근선 후학전주이학용근서
賢忠門현충문
道巖書院 翼元公不祧廟
도암서원 익원공부조묘
∎영모당 김질(永慕堂 金質, 1496~1555)
선생의 휘는 질(質)이요 자는 문소(文素)이며 연산군 2년(1496년)에 공음면 개가리에서 출생하니 어려서부터 효성이 근천(根天)하여 부모봉양에 정성과 공경을 다하고 어머님의 환저(患疽)를 입으로 빨아냈으며 부모 전후상과 승중상(承重喪)에 12년 여묘집상(廬墓執喪)을 한결같이 하였다. 묘정(墓庭)에 장부(醬瓿, 간장 항아리)를 상시 정결히 하는데도 밤이면 山쥐가 와서 더럽히매 한번은 선생이 장항아리를 붙들고 통곡하면서 정성이 미물에도 미치지 못함은 나의 허물이라 자책을 하니 그날 밤에 모든 쥐가 장항아리 밑에 와서 죽었고, 아버님이 일찍이 꿩고기를 좋아했기 때문에 매양 제사에 꿩고기를 반드시 제수로 쓰는데 하루는 저자에 나가 구하지 못하여 선생이 종일 체읍자탄(涕泣自嘆)을 하니 그날 석양에 꿩 한 마리가 저절로 부엌에 날아들었다。중종 23년(1518년)에 어머님의 명에 따라 사마시에 진사 급제하고는 학문에 힘써 소학, 가례, 효경 등 공부에 전심했으며 말년에 주림(竹林)에 一室을 일으켜 학자들과 예경과 제의을 강론하니 문풍이 크게 떨쳤다. 문정공 하서 김인후(文正公 河西 金麟厚)는 당호로 영모(永慕)라 편액(扁額)하고 명종 1년(1546년)에 효자로 정문이 내리고 선조 38년(1605년)에 중국에서 우리나라의 행의(行誼)를 뽑아 알리라는 명이 있어서 본도 안찰사 졸당 민성휘(拙堂 閔聖徽, 1582~1648)가 선생의 효를 으뜸으로 천거하여 명나라에서 정표를 하고 본조에서는 예관을 보내어 치존(致尊)하였다.
∎은송당 김경철(隱松堂 金景哲, 1573~1640)
선생의 휘는 경철(景哲)이요 자는 윤보(允甫)이며 영모당선생의 증손으로 선조 6년 (1573년)에 출생하니
기우(氣宇)가 응중(凝重)하고 의용(儀容)이 단정하며 어려서부터 학문을 좋아하고 효성이 지극하였다.
어머님 병환에 선묘(先廟)에 빌고 하늘에 호읍(號泣)했으며 병세 위중함에 열지주혈(裂指注血)하여 효차(效差)를 얻었다. 부모전후상(父母前後喪)에 6년 여묘 집상(執喪)을 하고 사서오경 근사록 가례에 잠심(潛心) 전력했으며 교인(敎人)에
입지(立志)를 위선(為先)하고 덕의를 숭상하며 자여질(子與姪)을 의방(義方)으로 가르치고 교우에 권선하는 도를 다하여 일동일정(一動一靜)을 법도에 따르니 행의가 크게 들어나서 원근에서 배우러 오는 문도가 많았다.
정유재란(선조 30년)에 사우들과 더불어 영광수성(靈光守城)을 하고 이괄의 난(인조 2년)에는 의여(義旅)를 모집하고
의곡을 비축하니 사실이 경의록(景義錄)에 실리고 방백이 행적을 조정에 천거하여 복호(復戶)가 내리고
이조의 장계로 남원교수을 제수했으나 사양하고 후진교육에만 전력하였다.
∎현무재 김익철(賢武齋 金益哲, 1575~1638)
선생의 휘는 익철(益哲)이요 자는 우보(友輔)이며 은송당(隱松堂)선생의 아우로 선조 8년(1575년)에 출생하니
용의(容儀)가 괴위(魁偉)하고 지기(志氣)가 강개하였다. 선조 23년(1590년) 16세에 음직으로 직장을 하고
1592년 선조 25년 18세에 무과에 올라 봉사가 되었는데 이때 도이(島夷)가 창궐하여 조야가 진탕(震蕩)되고
1593년 대가(大駕)가 의주(義州)으로 이어할 제 선생이 산직으로 호종하면서 지존을 등에 업고 팔십리를 가는데
가시덩쿨을 헤치며 험난한 길을 걷기에 신(짚신)이 벗어진 것도 몰랐다가 대가(大駕)가 안정(安靜)에 이르러서야
피가 발자국에 흐르는 것을 보고 비로소 깨달았다.
공훈을 책록함에 이르러 선무원종공신에 녹훈되고 주부에 제수되니 광영에 감복하면서도
부모봉양을 위하여 귀향할 것을 청하였다. 부모전후상(前後喪)에 애훼(哀毁)가 예에 넘치고
10年(1626년) 병자호란 때 의병을 일으키고 의곡을 비축하니 사실이 모의록(募義錄)에 실리고
세인이 선생의 곧은 충절은 백세 하에 사표가 될 만하다고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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