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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2014.9.20~21. 안사연 철원 부사공파 묘역 및 유적지 탐방 2.

구름에 달

by 碧巖 2015. 5. 8. 20: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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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동김씨역사연구회 철원 부사공파 묘역 및 유적지 탐방

안사연은

지난 7월부터 2개월간의 홍보 및 준비기간을 거쳐서 ‘민통선에서 과거와 미래를 잇다.’라는

주제를 가지고 2014. 9.20.(토)~9.21.(일) 1박 2일 일정으로

강원도 철원군 철원읍 화지리 및 동송읍 하갈리·양지리·동막리 등

민통선 일대에 산재해 있는 안동김씨 부사공파 선조님 묘역과 유적지를 탐방하였다.

 

===부사공파 철원문중은 이 지역에서 500년 동안 세거·세장하고 있는 철원지역의 대성이다.

조선시대의 무벌 가문이라면 충무공 이순신(李舜臣) 장군의 덕수이씨를 들 수 있는데

우리 안동김씨에도 이에 버금가는 무벌 가문이 있는데 바로 충무공 김응하(金應河) 장군의 철원 부사공파 가문이다.

===조선조에서 충무공의 시호를 받은 분은 모두 9분인데 전장에서 순국하시어

충무공의 시호를 받으신 분은 이순신 장군, 진주대첩의 김시민(金時敏) 목사,

그리고 후금과의 심하 부차령 전투에서 순국하신 김응하 장군 이렇게 세분이시다.

이 세분은 또한 나란히 영의정에 추증되시기도 하였다.

우리 안동김씨 부사공파 무관반열이 조선후기 정치·군사·외교에 남긴 족적은

너무나도 뚜렷하지만 정작 역사학계는 물론,

우리 안동김씨 종인들조차도 이를 이해하고 평가하는 사람이 많지 않은 것이 현실이다.

따라서 이번 학술대회를 계기로 부사공파 무인가계에 대한 새로운 조명과 함께

많은 사람들이 관심을 갖을 수 있는 계기를 마련하기 위하여 이번 안사연의 역사탐방을 기획한 것이다.

 

 

=== 하갈리(여우산)에 모셔있는 김응하 장군의 배위 증 정경부인 파평윤씨의 묘소로 이동하였다.

철원은 평야지대로 농로와 수로가 잘 발달되어 있는 곳이다.

그래서 버스로 묘역까지는 못가더라도 인근까지는 갈 수가 있다.

묘역에는 호석을 두른 봉분과 혼유석·상석·향로석이 있고,

좌측으로 묘표, 좌·우측에 망주석 한 쌍이 서있다.

묘역 앞으로 바라다 보이는 철원평야는 파란 가을 하늘에 흰 뭉게구름이 걸려 있고,

들녘에는 출렁이는 황금물결이 장관을 이루고 있다.

김응하 장군의 배위 증 정경부인 파평윤씨의 묘비석

 

 

김응하 장군의 배위 증 정경부인 파평윤씨의 묘소

 

===16:20 하갈리(연주현)에 있는 김응하 장군 증조부이시며,

부사공파 철원 입향조이신 예조정랑 김인상(金麟祥, 배위 증 숙인 풍천임씨) 선조님의 묘소에 도착하였다.

파평윤씨 할머니 묘소에서 20분 거리인데 버스로 이동하는 시간보다 걷는 시간이 더 길다.

그러나 황금 들판을 바라보면서 삼삼오오 짝을 이루면서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며 걷는 길이 그렇게 지루하게 느껴지지는 않는다.

산길 소로로 약간 오르니 상단에 입향조 김인상 선조님 호석없는 쌍분 묘소가 있고,

하단에는 공의 장인 묘소가 역시 호석없는  쌍분으로 조성되어 있다.

봉분 전면에 혼유석·상석·향로석이 있고, 좌측에 묘표, 좌·우측에 망주석 한 쌍이 세워져 있다.

묘표는 비신 상부, 허리부분, 하단부에 총탄 상흔이 있고,

우측 망주석은 총탄의 상흔의 정도가 아주 극심하였다.

부사공파 철원 입향조이신 예조정랑 김인상(金麟祥, 배위 증 숙인 풍천임씨) 선조님의 묘비석

 

부사공파 철원 입향조이신 예조정랑 김인상(金麟祥, 배위 증 숙인 풍천임씨) 선조님의 묘역

 

 

===들어왔던 도로로 나와 5분정도 더 걸어서 들어가면 좌측에 두 분 선조님의 묘역이 있다.

묘역 상단에는 김정(金瀞, 배위 공인 함평이씨) 선조님 묘소가 있고,

하단에는 공의 5대손이신 가산군수 겸 가산진병마첨절제사 김필구(金弼求, 배위 숙부인 해풍김씨) 선조님의 묘소가 있다.

김정(金瀞, 배위 공인 함평이씨) 묘역

 

가산군수 겸 가산진병마첨절제사 김필구(金弼求, 배위 숙부인 해풍김씨) 묘역

 

 

 

===이곳 묘역에서 좌측으로 조금가면

김응하 장군의 조부이신 병조정랑 김인(金軔, 배위 증 숙부인 순흥안씨) 선조님의 묘소가 있다.

묘는 호석을 두른 쌍분이고, 상석과 향로석이 있으며, 혼유석은 없다,

좌측에 묘표, 좌·우측에 망주석 한 쌍이 서 있다.

이곳 묘표 역시 총탄에 비몸의 옆부분이 떨어져 나가고 많은 총탄의 상흔을 간직하고 있다.

김응하 장군의 조부이신 병조정랑 김인(金軔, 배위 증 숙부인 순흥안씨) 선조님의 묘비석

 

김응하 장군의 조부이신 병조정랑 김인(金軔, 배위 증 숙부인 순흥안씨) 묘역

 

 

===17:00분 하갈리 소재 묘소 탐방을 마치고 버스로 이동,

양지리 군 통제소에서 다시 신원 및 인원 확인을 한 다음 17:20 토교저수지에 도착하였다.

토교저수지는 기러기를 비롯한 철새들의 낙원으로 철원평야에 물을 공급하는 젖줄이라 할 수 있는 곳이다.

버스에서 내려 20분정도 걸어서 토교저수지 상류를 돌아 들어가면

남향한 산록에 김응해 장군의 증손자이신 삼도통제사 김중원(金重元, 배위 정부인 평양조씨)의 묘소가 있다.

묘역 상단이 김중원 선조님의 묘역인데 호석이 없는 합장묘로 전면에 혼유석·상석·향로석·족석이 있고,

좌측에 묘표가 있으며, 좌·우측에 동자석과 망주석이 각 한 쌍씩 세워져 있다.

묘하에도 부사공 후손의 묘가 있다.

▲ 토교 저수지

 

 

 

 

이렇게 하여 18:00 오늘의 탐방일정을 모두 마쳤다.

 

===저녁식사와 숙소는 고석정 근처의 드림파크인데 안내를 잘못하여 시간을 많이 허비하였다.

20:00경 드림파크에 여정을 풀고 식당으로 내려와 버섯전골에 소주 한잔씩 곁들여 먹는 식사가 푸짐한 잔치가 부럽지 않았다.

===9월 21일 황태콩나물 해장국으로 아침식사를 하고 08:00부터 오늘 일정을 시작하였다.

시작은 숙소 바로 앞에 있는 철원팔경 고석정이다.

지층의 단절로 협곡을 이룬 강 한가운데에 10m나 되는 고석암이라는 바위와

강과 계곡이 어우러져 절경을 이루고 있는 곳으로

조선 명종 때 의적 임꺽정의 전설이 깃든 곳으로 널리 알려진 명승지이다.

 

 

 

 

 

 

 

 

 

 

 

===다음은  훈련대장 김중기(金重器) 선조님 묘소를 탐방하러 가는 도중,

철원팔경의 하나인 동송읍 양지리의 칠만암을 탐방하기로 하였다.

칠만암은 한탄강 지류인 칠만강 바닥에 현무암과 화강암으로 칠만가지 형상으로 빗어진 기암괴석으로 이루어져 있다.

깎아지른 절벽과 울창한 숲, 그리고 옥같이 흐르는 물이 함께 조화를 이루고 있는 곳이다.

우리가 이곳을 탐방하고자 하는 까닭은 김응하, 김응해 두 형제분이 함께 무예를 닦으시고,

화살보다 빨리 달린 말을, 화살보다 늦게 도착한 것으로 착각하여 애마를 베어버린 전설이 깃든 유서 깊은 곳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칠만암을 찾아내려가는 길은 멀고도 험난했다.

원래 이곳 사람들이 칠만암을 찾아가려면 절벽을 피해 하류로 내려갔다가

다시 칠만암으로 올라왔다고 하는데 그렇게 하기에는 시간이 너무 촉박하다.

그래서 칠만암이 내려다보이는 절벽 쪽에서 내려가는 길을 찾아 한참을 헤맨 끝에

간신히 내려갈 수 있는 길을 발견하고,

급경사 길을 한발 한발 조심스럽게 디디며 내려가 보니

금강산을 삽으로 똑 떼어다 수반 위에 얹어 놓은 듯한 모습으로 우리 앞에 다가왔다.

오늘 아니면 언제다시 이 칠만암에 올 수 있을까 하는 마음으로 일행은 한동안 칠만강 속에 빠져 있었다.

 

 

 

 

 

 

===일행은 드넓은 철원평야 벌판을 지나 10:00 갈말읍 동막리(능내) 군부대에 도착하였다.

그러나 요즘같은 엄중한 시기에 민통선과 연해있는 군부대를 방문하는 것이 어디 그리 쉬운 일이던가.

아무리 묘소를 참배하려는 후손들이지만 다수인의 출입이 쉬울 수만은 없다.

30분 이상 지체된 가운데 가까스로 허가를 얻어 부대요원들의 안내를 받았다.

 

증 좌승지 김시련(金時鍊, 배위 증 숙부인 청해이씨) 선조님의 묘비석

 

먼저 김응하 장군의 둘째 아들 증 좌승지 김시련(金時鍊, 배위 증 숙부인 청해이씨) 선조님의 묘소였다.

좌승지공의 묘소는 호석이 없는 합장분에 전면에는 혼유석·상석·향로석·족석이 배치되어 있고,

우측에 묘표, 좌·우측에 망주석 한쌍이 배치되어 있다. 묘표는 손자인 김중기가 비문을 지었다.

김응하 장군의 둘째 아들 증 좌승지 김시련(金時鍊, 배위 증 숙부인 청해이씨) 선조님의 묘소

 

 

그 다음 찾아간 곳은 같은 영내에 있는 훈련대장 김중기(金重器, 배위 정부인 연안이씨) 선조님의 묘소이다.

공께서는 숙종 2년(1676) 무과에 급제하시어 삼도수군통제사·훈련대장·총융사를 역임하셨다.

짧은 언덕길이지만 급경사라 숨을 몰아쉬며 올라가니

묘역에는 호석이 없는 합장분과 전면에 혼유석·상석·향로석이 배치되어 있고,

우측에 묘표가 있는데 옥개석이 없이 좌대에 비신만이 올려져 있는 모습이다.

묘표의 글씨는 공의 8세손 김영수(金榮壽) 공이 썼다.

공의 묘역은 주둔하고 있는 군부대에서 사초도 하면서 묘역을 돌본다고 한다.

아마도 부대장이 같은 무인으로서 동병상련의 정을 느끼고

공의 묘소를 돌봐주는 것이 아닌가 생각하니 참으로 감사하고 감사한 마음이다.

 훈련대장 김중기(金重器, 배위 정부인 연안이씨) 선조님의 묘표석

 

  훈련대장 김중기(金重器, 배위 정부인 연안이씨) 선조님의 묘소

 

이렇게 두 분 선조님 묘소를 탐방하고 나서 11:00경

인근 군부대 영내에 있는 김중기 선조님의 아버지

첨지중추부사 김세성(金世聲, 배위 정부인 밀양박씨) 선조님의 묘소를 탐방하였다.

이곳은 앞의 군부대에서 보다 더 까다로운 절차로 겨우 허가를 얻어 위병소를 통과하여 영내를 들어갈 수 있었다. 

군 막사 뒤쪽의 길이 없는 산록을 가시나무에 찔리면서 고생한 끝에 찾아 올라간 곳에 깨끗하게 단장된 묘소가 하나 나타났다.

묘소는 호석이 없는 합장분으로 전면에는 혼유석·상석·향로석이 배치되어 있고, 우측에 묘표가 있다.

김세성 묘표는 총고 239吼吔cm의 크기로 공의 손자인 김숙(金潚)이 비문을 짓고,

전면은 박태유의 글씨이고, 뒷면 글씨는 박태유의 아들 박필모(朴弼謨)가 써서 숙종 44년(1718)에 세운 것이다.

첨지중추부사 김세성(金世聲, 배위 정부인 밀양박씨) 선조님의 묘비석

첨지중추부사 김세성(金世聲, 배위 정부인 밀양박씨) 선조님의 묘소

 

 ===이상으로 안동김씨 부사공파 철원지역 묘소 및 유적지 탐방을 모두 마쳤다.

모두의 가슴에는 이번 탐방을 무사히 마쳤다는 기쁨이 넘쳤고,

이렇게 훌륭한 선조님을 둔 우리 안동김문에 대한 자랑스러움, 자부심이 생겨났으며,

앞으로 어떻게 하면 우리 선조님들의 행적과 치적을 널리 현양해야 할까 하는 즐거운 고민을 하게 되었다.
===한 가지 아쉬운 부분은 국조장신록에 올라 있는 김세익·김흡·김선필 이 세분의 묘소가

동송읍 이길리 비무장장지대(DMZ) 북방한계선내에 위치하여 친견(親見)할 수 없었다.

신도비 등 석물과 묘소는 잘 보존 되어있는지 궁금한 생각을 하며

통일 이후에는 우리 안사연 후배들이 다시 한 번 답사할 수 있는 날이 올 수 있길 기대해 본다.

 

===13:00 옛날순두부 집에서 점심을 하고, 원래 예정대로라면 노동당사, 백마고지, 직탕폭포, 삼부연폭포 등을

관광하기로 되어 있었으나 일요일 교통체증을 고려하여 식사 후 바로 귀경길에 올라 승일교는 버스안에서 관람하였다. 
 

 

===서울로 향하는 길에 이번 행사에 처음 참석한 종인들을 위해

포천시 창수면 오가리에 소재한 문온공파 금수단에 들려

간공 승택(承澤), 상락군 묘(), 문온공 척약재 구용(九容) 선조님 단소에 참배한 후,

문화재자료 제138호 안동김씨 고가인 옛 백운루(白雲樓)를 둘러보고,

향토유적 제18호 금수정에 올라 아름다웠던 옛 영평천을 상상해 보며,

김구용 시비, 양사언 시비 앞에서는 돌에 새겨진 시문의 설명을 잠시 듣는 시간을 갖고 서울로 출발하였다.

▲ 경기도문화재자료 제138호 안동김씨 고가

 

▲ 향토유적 제 18호 금수정

 

 

▲ 양간공 승택(承澤), 상락군 묘(昴), 문온공 척약재 구용(九容) 선조님 단소인 금수단

 

추석명절 밑이라 그런지 교통체증없이 18:00 예상시간보다 빨리 서울에 도착하였다.

우리는 1박2일을 함께한 종인들과의 헤어짐을 아쉬워하면서

송파 방이동에 있는 이름난 맛집 남원추어탕에서 저녁식사와 함께 일정 중 마지막 뒤풀이를 하였다.

===일정을 마치면서 부사공파 철원문중을 돌이켜보면 무과 급제자가 모두 107분이나 된다.

증직으로는 요동백 충무공 김응하 장군이 영의정에 오르셨고,

32분이 2품 증직으로 판서·참판에 올랐으며,

행직으로 2품이상 오른 분은 어영대장을 지낸 김응해 장군을 포함하여 28분이며,

수사·영장·부사 등 정3품 이상 관직은 42분이다.

이 밖에도 정3품 이하의 군수 등 다수의 무관직 벼슬을 무수히 배출하였고,

국조장신록에도 5분이 올라있어 명실공히 우리나라의 대표적인 무벌 가문임을 확인 할 수 있었다.

  또한 부사공파가 무인 집안이라고 해서 문과 급제자가 없는 것은 아니다.

대과에 급제하신 분도 6분이나 계신다.

그 중에서도 안동부사와 대사간을 역임하신 김유(金濰) 선조님은

1739년에 발행한 기미보 편찬에 관여하면서 서문을 지으셨고,

또 안동부사 시절에는 영호루의 충렬공 시판을 새로 걸기도 하였다.

 

 

 

<글 윤만. 사진 발용>

 

별도편집 및 사진첨부

 

 

문온공 척약재 구용(九容) 선조님 단소인 금수단에서   춘식, 경식, 태철.

 

출처 : 안동김씨 익원공파 수원참의공종친회
글쓴이 : 김태철 碧巖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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