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사연 철원 부사공파 묘역 및 유적지 탐방 1. 글=김윤만. 사진=김발용 (대종회 홈페이지)
- 민통선에서 과거와 미래를 잇다 -
===안동김씨역사연구회(안사연)는 지난 7월부터 2개월간의 홍보 및 준비기간을 거쳐
‘민통선에서 과거와 미래를 잇다.’라는 주제를 가지고
2014. 9.20.(토)~9.21.(일) 1박 2일 일정으로 강원도 철원군 철원읍 화지리 및
동송읍 하갈리·양지리·동막리 등 민통선 일대에 산재해 있는
안동김씨 부사공파 선조님 묘역과 유적지를 탐방하였다.
===부사공파 철원문중은 이 지역에서 500년 동안 세거·세장하고 있는 철원지역의 대성이다.
조선시대의 무벌 가문이라면 충무공 이순신(李舜臣)장군의 덕수이씨를 들 수 있는데
우리 안동김씨에도 이에 버금가는 무벌 가문이 있는데
바로 충무공 김응하(金應河) 장군의 철원 부사공파 가문이다.
===조선조에서 충무공의 시호를 받은 분은 모두 9분인데
전장에서 순국하시어 충무공의 시호를 받으신 분은
이순신 장군, 진주대첩의 김시민(金時敏) 목사,
그리고 후금과의 심하 부차령 전투에서 순국하신 김응하 장군 이렇게 세분이시다.
이 세분은 또한 나란히 영의정에 추증되시기도 하였다.
===우리 안동김씨 부사공파 무관반열이 조선후기 정치·군사·외교에 남긴 족적은
너무나도 뚜렷하지만 정작 역사학계와
우리 안동김씨 종인들조차도 이를 이해하고 평가하는 사람이 많지 않은 것이 현실이다.
따라서 이번 학술대회를 계기로 부사공파 무인가계에 대한 새로운 조명과 함께
많은 사람들이 관심을 갖을 수 있는 계기를 마련하기 위하여 이번 안사연의 역사탐방을 기획한 것이다.
===9월 27일 08:00 잠실종합운동장역 ①번 출구에는
‘철원 역사탐방 안사연’이라 명찰을 붙인 뉴신명관광버스가 대기하고 있었다.
봉회(鳳會)대종회장을 비롯하여 강진·대구 등 경향각지에서 40여 종인이 탑승하였다.
우리 일행을 태운 버스가 서울을 벗어나기까지에는 상습 교통체증으로 인하여
많은 시간이 지체되었으나 다행히 포천 영중에서부터는 풀려
10:20 예정시간보다 다소 빨리 철원읍 화지리 산1-1 포충사(褒忠祠)에 도착하였다.
포충사에는 철원향교 전교와 포충사 원장을 역임하신 규장 전 부사공파 회장 등
철원 일가 분들이 커피와 음료수를 준비하시고 우리 일행을 반갑게 맞이해 주셨다.
포충사는 고종 5년(1868)대원군의 서원철폐령에 따라 전국의 서원이 일제히 훼철될 때도
훼철되지 않은 47서원 중 한 곳인데 지금은 동재와 서재, 관리사 공사가 한창 진행 중이었다.
경내에는 시도유형문화재 제105호로 지정된 묘정비가 있는데
우람한 거북 좌대에 가첨석까지의 크기가 무려 397呝吝cm인데
숙종 9년(1683) 송시열(宋時烈)이 비문을 짓고,
박세당(朴世堂)의 아들 박태유(朴泰裕)가 글씨를 썼으며,
김수항(金壽恒)이 전액을 하여 건립한 것이다.
▲ 포충사
▲ 충무공 영정
▲ 충무공 위패
▲ 포충사 묘정비
▲ 묘정비 음기 일부
일행은 요동백 충무공 김응하[金應河, 선조 13년(1580~광해군 11년(1619)] 장군 불천위가 모셔져 있는
사우 앞에 도열하여 간소하지만 정갈하게 마련한 주과포로 고유제를 올렸다.
고유문은 다음과 같다.
===요동백 충무공 참배 고유문 -방후손 영환(榮煥) 지음-
단기 4347년 9월 20일 안동김씨역사연구회 회원 일동은 요동백 충무공 할아버님께 아뢰옵니다.
충무공께서는 중국 명/청 교체기의 혼란한 중국 정세에서 광해군의 파병 명령으로 요동 심하 전투에서 순국하셨습니다.
광해군의 복심이 어떠했는지는 모를 일이지만
충무공께서는 신하된 도리로 임금의 명령에 충실하고자 죽음을 무릅쓰고 전투에 임하여
심하의 버드나무 아래에서 장렬히 돌아가셨습니다.
그 때의 상황은 뒤에 청나라가 된 후금이나 명나라에서도 두고두고 회자되는 충신의 길이었습니다.
명나라 마지막 황제인 숭정제는 할아버님께 요동백이라는 백작의 작위를 내려주시었고,
조선에서는 영의정을 추증하고, 충무공의 시호를 내려 그 공을 치하하였으며,
충렬록을 간행하여 조선과 중국에 배포하였습니다.
조선시대 9명의 충무공 중 장렬히 최후를 마치신 세분에게만 영의정이 추증되었습니다.
충무공 이순신 장군, 충무공 김시민 장군, 그리고 요동백 충무공 김응하 할아버님이십니다.
===오늘 이곳 할아버님 사당에 와서 보니 남북으로 갈린 우리 조국의 쓰라린 아픔을 감출 수 없습니다.
할아버님의 신도비는 마치 사격장의 표적같이 되었으며,
군부대의 허가를 받아야만 성묘할 수 있는 묘소도 여러 곳입니다.
근래에 충무공 이순신 장군의 업적을 기리는 영화가 신기록을 갈아 치우는 관심속에서
요동백 충무공 할아버님의 충절이 묻혀져 가는 아쉬움에 안사연의 2014년 가을답사를
이곳 부사공파 후손 묘역으로 정한 이유도 여기에 있습니다.
부사공파 후손들이 남북분단의 역사속에 부단한 노력으로 묘소를 찾고 단장하여 왔습니다만,
아직도 할아버님의 위상과 업적이 현양되지 못하는 아쉬움을 지울 수 없습니다.
이에 저희 안사연 회원들은 부사공파 후손들의 연혁과 업적을 조사·정리하고 발굴하여
무려 300여 쪽의 책자로 발간하였습니다.
모든 자료를 싣게 되면 천 쪽도 모자라지만 예산 관계상 목록만 추리고 중요한 자료만 수록하였습니다.
후일에 좀 더 자금이 모아지면 수 천 쪽의 장대한 책으로 만들어질 수 있으리라 사료됩니다.
하루 빨리 남북통일이 되어 분묘와 비석을 찾아 다시 사초단장하며
그 기록을 새로이 쓰는 날이 오기를 할아버님 영전에 기원합니다.
저희 안사연 회원들은 앞으로도 묻혀져 있는 안동김씨의 훌륭한 역사를 찾아 갈고닦아 기록하는 작업을 계속할 것입니다.
요동백 충무공 할아버님께서도 이러한 저희들의 충심을 갸륵히 여기시어
안동김씨역사연구회가 좀 더 발전하고 영속적으로 유지되도록 도와주시옵기를 빌면서
간단한 주과포를 올리오니 흠향하시옵소서.
고유제를 올린 다음 11:00 동송읍 하갈리에 있는 김응하 장군의 묘소를 탐방하기 위하여 출발하였다.
가는 도중 국보 제63호인 철조 비로자나불좌상이 모셔져 있는 동송읍 관우리 450
도피안사에 들려 30분간 경내를 둘러본 다음
동송읍 내에 있는 갈비집 ‘금학’에서 명품 갈비탕으로 점심식사를 하였다.
===점심식사를 마친 후 차창 밖으로 드넓게 펼쳐진 철원평야의 황금벌판을 바라보면서 군 통제소에 도착하였다.
김응하·김응해 장군 묘역이 민통선 안에 있기 때문에 군 통제소에서 신원과 인원을 확인받은 다음
부대요원의 인솔 하에 출입을 할 수 있는 곳이기 때문이다.
14:00 하갈리(군량동) 김응하 장군과
아우 어영대장 김응해[金應海, 선조 21년(1588)~현종 7년(1666)] 장군 묘역에 도착하여
먼저 좀 더 떨어진 곳에 모셔져 있는 김응하 장군의 묘소를 탐방하기로 하였다.
김응해 장군 묘역으로부터 오른쪽으로 500m쯤 떨어진 거리에 있다.
장군의 묘역으로 가는 길가에는 유하장군(柳下將軍)을 상징하는 듯
오늘도 버드나무가 무성하여 우리 후손들을 열병하여 맞이해 주고 있다.
▲ 충무공 묘역 전경
===선천부사를 역임하신 김응하 장군은 도원수 강홍립(姜弘立)의 좌영장으로
명나라 파병군으로 출정하셨다가 사르후 전투에서 3천의 병력으로 6만의 후금 대병을 맞아 싸우시다가
중과부적으로 순국하시어 명나라 신종으로부터 요동백이라는 작호와 함께 백금을 하사 받으시고,
우리 조정으로 부터는 충무공의 시호와 함께 영의정에 증직되신 선조님이시다.
===이곳 묘역은 4단으로 조성되었는데 가장 상단에 김응하 장군의 의관장묘,
2단에는 아버지 증 호조참판 김지사(金地四, 배위 선산김씨) 합장묘와
우측[돌아가신 분을 기준으로 표기함. 이하 동일함]으로는 요절한 둘째 아우 김응락(金應洛)의 묘,
3단에는 아들 전라우도수군절도사 김익련(金益鍊, 초배 및 계배 완산이씨)의 전·후분 묘,
4단에는 12세손 시종원 우시어(右侍御) 김문환(金文煥, 전의이씨)의 합장묘가 있고,
묘역 입구에는 6.25 전쟁의 상흔을 고스란이 비신(碑身)에 담고 있는 장군의 신도비가 세워져 있다.
신도비는 장군 사후 280년이 지난 고종 36년(1899)에 가서야 건립되었는데
총고 328员吗cm의 크기로 수원문중 효헌공 휘 찬 할아버님의 사위인 용주조경(趙絅)이 비문을 짓고,
이유승(李裕承)이 글씨를 썼으며, 조희일(趙熙一)이 전액을 하였다.
▲ 충무공 신도비
▲ 신도비 음기 일부분
▲ 충무공(휘 응하) 묘소
▲ 충무공 묘비
▲ 증 호조참판 휘 지사 묘소
▲ 증 호조참판 휘 지사 묘비
▲ 증 호조참판 휘 극련 묘소
▲ 충무공(휘 응하) 묘소앞에서
===온 길을 되돌아 김응해 장군 묘역으로 향한다.
길가에는 흰색 구절초 꽃이 탐스럽게도 피어있다.
어영대장 김응해 묘역은 멀리서 보아도 여러 선조님들의 묘를 합장하고
묘갈을 비롯한 석물들을 한데 모아 배치한 묘역임을 알수가 있다.
▲ 어영대장(휘 응해) 묘역 전경
===묘역 상단에는 통상 어장공이라고 불리시는 김응해 장군과 정부인 동주최씨 합장묘가 있다.
묘표를 살펴보니 사대모화사상의 표현인 ‘유명조선국’으로 시작하지 않고
‘조선국’이라고 당당하게 쓰여 있고,
배위 동주최씨의 품계를 ‘정부인’이라 하지 않고 그냥 ‘부인’으로 표현한 것이 특이하였다.
‘유명조선국’으로 시작하지 않고 ‘조선’으로 표기한 곳은 김중원(金重元)묘소·김세성(金世聲)묘소,
그리고 ‘조선국’으로 표시한 곳은 김중기(金重器) 선조님 묘소가 더 있었다.
▲ 어영대장 묘비
▲ 어영대장(휘 응해) 묘소
다음 단 좌측으로부터 어장공의 아드님 증 호조참판 김극련(金克鍊, 배위 증 정부인 청송심씨)의 묘소와
김극련 선조님의 장손계 합장묘, 그리고 묘갈문 판독이 어려운 선조님 봉분이 있다.
김극련 묘표는 총고 228吷吕cm의 크기로 공의 현손인 김영우(金榮遇)가 비문을 짓고,
윤득양(尹得養)이 글씨를 써서 영조 37년(1761)에 세운 것이다.
장손계 합장묘에는 증 병조참판 김세장(金世章, 배위 증 정부인 성주이씨와 수원백씨),
증 병조참판 김중구(金重九, 배위 증 정부인 연산서씨와 전주이씨),
진사 장릉참봉 김준(金浚, 배위 공인 여주이씨),
통덕랑 김영우(金榮遇, 공인 평산신씨)와
김극련의 4자인 만호 김세웅(金世雄)의 영령이 봉안되어 있다.
===세 번째 단에는 합장되신 선조님의 석물이 배치되어 있는데
우측으로부터 증 호조참판 김세장과 배위 증 정부인 성주이씨,
만호 김세웅, 전라도병마절도사 김중구, 진사 김준과 배위 공인 여주이씨 등의 순으로 배치되어 있고,
좌·우측에는 망주석과 문인석이 각각 배치되어 있다. 그 다음 열에는 망배단이 있고,
맨 앞 열에는 조선국 ‘어영대장 김응해장군 세장비’가 세워져 있다.
그리고 묘역 앞 좌측에 김응해 장군 신도비가 파란 가을 하늘 속으로 날렵히 날아오를 듯한 모습으로 빛나고 있었다.
신도비는 총고 360呆吓cm의 크기로 조경(趙絅)이 비문을 짓고,
박경후(朴慶後)가 글씨를 써서 숙종 10년(1684)에 세운 것이다.
이렇게 1시간동안 두 분 장군과 그 후손들의 묘역을 탐방하고
이곳에서 약간 떨어진 하갈리(여우산)에 모셔있는 김응하 장군의 배위 증 정경부인 파평윤씨의 묘소로 이동하였다.
철원은 평야지대로 농로와 수로가 잘 발달되어 있는 곳이다.
그래서 버스로 묘역까지는 못가더라도 인근까지는 갈 수가 있다.
묘역에는 호석을 두른 봉분과 혼유석·상석·향로석이 있고, 좌측으로 묘표, 좌·우측에 망주석 한 쌍이 서있다.
묘역 앞으로 바라다 보이는 철원평야는 파란 가을 하늘에 흰 뭉게구름이 걸려 있고,
들녘에는 출렁이는 황금물결이 장관을 이루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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