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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시-충숙공 동천 이상길(忠肅公 東川 李尙吉),이희선,이상철, 이경,이감,이전,이우면

구름에 달

by 碧巖 2015. 9. 2. 23:03

본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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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숙공 李尙吉초상화

지정번호 : 보물 792

지정연도 : 198482

소      장 : 이정봉

소 재 지 : 전북 남원시 덕과면 사곡리 30 (국립전주박물관 보관)

시     대 : 조선 인조

수     량 : 1(인조때의 대화가 김명국 의 그림)

분      류: 초상화

본문 출처 : 문화제청

 

 

 

 

충숙공 동천 이상길(忠肅公 東川 李尙吉)(15561637)은 조선의 문신(文臣)으로

()는 사우(士祐), ()는 동천(東川), 본관(本貫)은 벽진(碧珍)이다.

벼슬은 공조판서에 이르렀으며, 인조(仁祖), 14(1636) 병자호란이 일어나자

묘사(廟社)를 따라 강화(江華)에 들어갔다가 이듬해 청군(淸軍)이 강화에 육박하자 자결했다.

이 영정은 낮은 사모(紗帽)에 담홍색(淡紅色) 단령(團領)을 입고 공수자세(拱手姿勢)를 취하고

의자에 앉은 좌안7분면(左顔七分面)의 전신상(全身像)이다.

상용형식면에서 단령의 양쪽 트임새로 살짝 내비치는 과()와 첩리(帖裏),

양쪽 어깨의 경사진 각도를 달리함으로써 앉음새를 매우 안정되게 나타내어

조선 중기 초상화의 전형적인 특색을 보여준다.

그러나 안면(顔面)의 세부(細部) 묘사에 있어서는

이미 골상학(骨相學)에서 말하는 삼양(三陽), 삼음(三陰), 누당(淚堂), 와잠(臥蠶)을 경계로하여

선염기(渲染氣)를 짙게 안배함으로써 안면의 고심세(高深勢)를 나타내려는 도식화된 의도가 강하게 나타나 있어,

이상길 재세시(在世時)의 묘법보다는 좀 더 후기의 초상화법을 보여준다.

따라서 이 영정은 원본을 충실히 그려낸 이모본(移模本)으로서,

 안면처리에만 이모시(移模時)의 시대색(時代色)이 반영된 것이라 하겠다

 

 

 

 

 

 

 

 

 

 

충숙공 이상길 묘역(서울 유형문화재 70)

신도비란 임금이나 고관의 평생업적을 기록하여 그의 묘앞에 세워두는 것으로,

이 비는 조선 중기의 문신인 이상길 선생의 공적을 기리고 있다.

이상길 선생은 선조 18(1585) 문과에 급제하여 벼슬길에 올랐다.

인조 때에는 공조판서를 지내기도 하였으며인조 14(1636) 병자호란이 일어나자

조정의 명을 받아 영위사가 되어 80세의 노령에도 불구하고 강화도에 들어갔다.

이듬해 청나라 군대가 강화도로 몰려오자 아들에게 뒷일을 부탁한 뒤 스스로 목을 매어 생을 마쳤다.

이러한 그의 충절을 기려 충숙공(忠肅公)’이라는 시호가 내려졌고 좌의정에 추증되었다.

비는 사각의 받침돌 위로 비몸을 세우고, 지붕돌을 얹은 모습으로, 조선 중기의 양식이 그대로 나타나 있다.

비문은 성균관제주였던 송시열이 짓고, 글씨는 송준길이 썼다.

충숙 이공 영정(忠肅 李公 影幀)은 충숙공 이상길(15561637) 선생의 초상화로

영정은 공이 80세 때에 화가 김명국이 두 폭을 그려

한 폭은 보물 792(이상길초상)로 지정되어 국립전주박물관에 보관되어 있으며,

이 곳에 있는 한 폭은 서울시 시도유형문화재 69호로 지정되어 충영각에 봉안되어 있다.

 

 

 

 

 

충숙공 묘역(1556~1637)

 

 

 

忠臣資憲大夫工曹判書 贈大匡輔國崇祿大夫議政府左議政兼領經筵事監 春秋館事諡忠肅李公尙吉之墓

충신자헌대부공조판서 증대광보국숭록대부의정부좌의정겸영경연사감 춘추관사시충숙이공상길지묘

贈貞敬夫人慶州李氏祔左    증정경부인경주이씨부좌

 

 

 

 

 

 

 

 

                      <충숙공의 부모묘소>

贈崇政大夫議政府左贊成兼判義禁府事行童蒙敎官宣敎郞李公之墓

증숭정대부의정부좌찬성겸판의금부사행동몽교관선교랑이공지묘

증정경부인창원정씨 부

 

 

 

<충숙공의 형 묘소>

 

 

 

秉節校尉 行平安道兵馬評事 碧珍李公尙哲之墓

병절교위 행평안도병마평사 벽진이공상철지묘

配宜人陽川許氏祔左

배의인양천허씨부좌

 

충숙공의 아들      자헌대부지중추부사이공휘경지묘

                                      정부인파평윤씨부좌

                                   증정부인창령성씨부좌

 

 

자헌대부 지중추부사 오수 이경(聱叟 李坰)   1580(선조 13)1670(현종 11).

본관은 벽진(碧珍). 자는 동야(東野), 호는 오수().

이석명(李碩明)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이희선(李喜善)이고,

아버지는 공조판서 이상길(李尙吉)이며, 어머니는 이개윤(李愷胤)의 딸이다.

1621(광해군 13) 유학으로 있을 때 이이첨(李爾瞻)

구경록(仇景祿)의 옥사에 자기 아들이 관련되어 역옥을 늦추자 이를 논박하는 소를 올렸다.

 

1623(인조 1) 진사로서 개시문과에 병과로 급제, 1624년 예문관검열이 되었고,

그 해 8월 장령으로 있으면서 집의 김세렴(金世濂), 장령 박안제(朴安悌) 등과 함께

이조판서 이귀(李貴)가 추숭(追崇)을 주장하고 자천한 것을 논박하다가

중신을 모함하였다는 죄목으로 당진현감에 좌천되었다.

 

그 뒤 1626년에 정언·지평을 거쳤다.   16283월 사서로 있으면서

국역(鞫逆)의 날에 병을 칭탁하여 불사(不仕)하였다는 사헌부의 탄핵을 받아 파직되었다.

같은 해 6월에 정언에 임명된 뒤 강진현감·장령 등을 두루 거쳤다.

 

병자호란이 일어나 강화천도가 이루어질 때 아버지 상길이 적군이 상륙하였다는 소문을 듣고

그를 불러 소모사(召募使)가 되어 직분을 다할 것을 부탁하고 강도(江都)에 입성하여 자결하였는데

그는 포구를 지키던 그의 임무를 저버리고 아버지의 시신을 가지고 고향으로 돌아갔다.

이로 인해 그가 비록 의병에 종사하였다고 하나 자처(自處)의 도가 어긋났다고 하여 파직당하였다

 

증통훈대부사헌부집의 벽진이공감(堪)지묘

증숙인해주오씨부좌

 

증정부인 임천조씨지묘

 

벽진이공장사랑행경릉참봉지?지묘     배공인전의이씨부좌

 

 

 

 

자헌대부장예원경겸 홍문관학사 이공우면지묘

정부인김해김씨부좌   증정부인 안동김씨부좌

홍문관학사 유석 이우면(維石 李愚冕)

1850(철종 1)-1937

조선의 문신. ()는 성원(聖源). 호는 유석(維石). 참판 용지(龍知)의 아들.

1881(고종 18) 정시문과(庭試文科)에 병과(丙科)로 급제하여

호조.병조.예조의 참판(參判) .한성좌우윤(漢城左右尹)을 역임.

1869(건양 1)에 특진관(特進官).비서원승(秘書院承)을 지내고

을사조약이 체결되자 오적신(五賊臣)의 처형을 상소했지만 뜻을 이루지 못했다.

그후 봉상사제조(奉尙司提調)를 거쳐 회계원경(會計院卿).홍릉제조(洪陵提調)를 지내고

1902(광무 6)에 장례원경(掌令院卿) 및 홍문관학사(弘文館學士)를 역임하였다.

 

 

 

 

 

충숙공 동천 이상길(忠肅公 東川 李尙吉)

본관은 벽진(碧珍)[성주]. 자는 사우(士祐), 호는 동천(東川만사(晩沙).

 선조인 이총언(李悤言)이 고려 태조를 도와 공을 세워 장군으로서 성주에 정착한 이후

대대로 성주(星州) 지역에 뿌리를 내린 집안이다.

고조할아버지 이소원(李紹元)은 문과 급제 후 형조좌랑을 지냈고,

증조할아버지는 전옥서 참봉을 지낸 이유번(李有蕃)이며,

할아버지는 덕천군수(德川郡守) 이석명(李碩明)이다.

아버지 이희선(李喜善)은 동몽교관을 지냈는데,

이상길(李尙吉)의 공으로 인해 증조할아버지는 좌승지,

 할아버지는 병조참판에, 부친은 좌찬성에 각각 추증되었다.

 

어머니는 정경부인(貞敬夫人) 창원정씨(昌原丁氏)로서 경상도도사 정환(丁煥)의 따님이다.

형은 이상철(李尙哲)이며 아우는 이상적(李尙迪)과 이상학(李尙學)이다.

이상길의 부인 경주이씨는 판관을 지낸 이개윤(李愷胤)의 딸이다.

슬하에 3남을 두었는데,

그 중 첫째와 둘째 이계(李堦)는 일찍 죽고

남은 아들 이경(李坰)은 과거에 급제하여 참판이 되었다.

이밖에 측실 소생으로 21녀를 두었는데,

이감(李堪)은 생원시에 합격하였고 다른 아들은 이름이 전하지 않는다.

딸은 생원인 이안방(李安邦)에게 출가하였다.

 

[활동 사항]

이상길은 155612월에 성주(星州)에서 태어났다.

1579(선조 12) 진사시에 급제하였고,

1585년에 문과에 급제하여 풍저창 직장에 제수되었다가

3년 후 감찰(監察)로서 호조좌랑에 제수되었다.

1590(선조 23)에는 사간원의 정언 겸 지제교에 제수되었는데,

정여립(鄭汝立)의 모반 사건과 관련하여 최영경(崔永慶)의 국문을 주청하였다가

최영경의 도당에 의해 모함을 받아 이듬해에 고산찰방(高山察訪)으로 좌천되었다.

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예조좌랑으로서 어가(御駕)를 호종하여

그 공으로 강원감사종사관에 제수되었으며,

이후로 병조정랑, 익산군수, 겸예빈부정을 거쳤다.

 

1597(선조 30)에 정유재란이 일어나자 직접 군사를 거느리고 남원으로 달려가 공을 세웠다.

이듬해에 광주부윤에 임명되었는데 고을을 다스리는 것이 제일이라고 통정대부로 승진하였다.

그러나 1602(선조 35)에 조정에서 최영경의 일이 다시 논의되면서 풍천(豊川)으로 유배되었다.

6년 후에 사면되어 회양부사, 안주목사, 호조참의를 거쳤다.

그러나 1615년에 또다시 최영경의 일이 거론되면서 파직되었다.

이에 이상길은 노원(蘆原)의 촌사(村舍)로 물러나 머물렀는데,

도성 안으로는 좀처럼 들어가지 않았으며, 당시의 집권 세력과는 야합하지 않고 곧은 뜻을 지켰다.

 

1621(광해군 13)에 용천부사(龍川府使)가 되자마자

청나라 군사가 대거 몰려오자 이상길은 청군에 맞서 성을 끝까지 지켰으며,

이에 용천의 백성들이 그의 공을 기리기 위해 송덕비를 세웠다.

1623년 인조(仁祖)의 반정(反正) 후 동부승지와 병조참의에 잇따라 제수되고

청나라 사신을 맞기 위해 접반사로 차임되면서 가선대부로 승진되었다.

1624년 이괄(李适)이 반란을 일으켰을 때는 역적을 토멸한 공이 있다 하여 가의대부에 봉해졌다.

이후로도 평안도 관찰사, 호조참판, 전주부윤, 병조참판, 대사간과 대사헌 등 주요직을 두루 거쳤으며,

나이 80세에는 특별히 자헌대부가 가자(加資)되고 공조판서에 제수되었으며, 기로소에 참여하였다.

 

1636(인조 14) 병자호란이 일어나자 묘사(廟社)를 받들고 강화도로 들어갔으나

이듬해에 정월에 요새가 함락되자, “종묘사직이 망하였는데 어찌 차마 구차하게 살겠는가.

나는 성중(城中)으로 달려가서 여러 재신들과 함께 죽을 것이다라고 하고

빈 창고로 들어가 허리띠로 목을 매어 자결하였다.

 

[학문과 저술]

문집인 동천집(東川集)이 서울대학교 규장각에 소장되어 있다.

이상길의 9세손 이두화(李斗和)10세손 이상서(李尙書) 등이 유고를 수집하여 1911년에 간행한 것으로,

((() 등은 탁월한 치세가(治世家)로서의 면모를 잘 보여 주며,

특히 권3천조 일기(朝天日記)는 연행 기록으로서 좋은 자료가 된다.

 

[묘소]

기록에는 이상길이 자결하자 청군이 뒤쫓아와 활을 쏘았는데, 아들 이경이 그 시신을 찾아 돌아왔으며,

그 해 4월에 양주(楊州) 불암산(佛巖山) 서쪽 기슭에 있는 선영(先塋)에 장사지냈다고 하였다.

당시의 양주는 현재의 서울특별시 도봉구 지역을 포함한 일대로서,

묘소는 현재 서울특별시 노원구 하계동에 위치하고 있다.

묘소에는 묘표·혼유석·상석·향로석·문인석 등을 갖추고 있다.

본래 이상길의 신도비만 문화재로 지정되어 있다가

20081030일 충숙 이공 신도비에서 충숙공 이상길 묘역으로 문화재 지정 명칭이 변경되었다.

[서울특별시 유형 문화재 제70].

 

[상훈과 추모]

1642(인조 20) 강화군 선원면에 충렬사(忠烈祠)가 건립되어

강화도에서 순절한 김상용(金尙容이시직(李時稷심현(?) 등과 더불어 재향되었으며,

大匡輔國崇祿大夫議政府左議政兼領經筵事監春秋館事 추증.

1661(현종 2)에는 묘소 앞에 신도비가 건립되었다.

아들 이경의 부탁으로 당시 의정부 우찬성 겸 성균관 제주(議政府右贊成兼成均館祭酒)로 있었던

송시열(宋時烈)이 비명을 짓고

의정부 좌참찬 겸 성균관 제주(議政府左參贊兼成均館祭酒) 송준길(宋浚吉)이 썼으며,

이조참판(吏曹參判) 김수항(金壽恒)이 전액(篆額)을 썼다.

현재는 비각을 세워서 보존하고 있다.

또한 1786(정조 10)에는 후손 이해보(李海普)의 청에 의하여

강화도에서 순절한 김상용(金尙容송시영(宋時榮) 등의 전례에 따라

이상길의 신주(神主)를 영구히 제사지내도록 하였다.                     시호는 충숙(忠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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