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李允濯한글靈碑 이윤탁 한글 영비(보물 1524호)
이 비석은 묵재(黙齋) 이문건(李文楗)이 조선 중종 때 승문원 부정자를 지낸 부친인 이윤탁(李允濯)의 묘를
모친인 고령(高靈) 신씨(申氏)의 묘와 합장하면서 1536년에 묘 앞에 세운 묘비이다.
이 묘비에는 앞면과 뒷면에 각각 묘주의 이름과 그 일대기가 새겨져 있고,
왼쪽과 오른쪽에도 한글과 한문으로 묘의 훼손을 경계하는 내용이 새겨져 있다.
비는 사각의 받침돌 위에 비몸만을 세워둔 간결한 구조로,
비몸의 윗변 양쪽을 비스듬하게 다듬었다. 서쪽면에는 한글 30자가 기록되어 있는데,
이윤탁의 셋째 아들인 이문건이 글을 짓고 글씨를 새긴 것이다.
비 뒷면에 새겨진 기록으로 미루어 중종 31년(1536)에 비를 세운 것으로 보이는데,
이는 세종대왕이 훈민정음을 반포한 지 90년이 지난 후의 글씨체로
글씨는 한글창제 당시와 똑같은 글씨에 서민적인 문체로 쓰여져 있다.
남아있는 ‘한글비’중에서 가장 오래된 것으로 평가되고 있으며,
아직 한글이 널리 사용되지 못했던 시기에 과감히 ‘한글묘비’를 세웠다는 점에서 그 가치는 더욱 돋보인다.
이 비석의 특징적 가치는 비석 왼쪽 면에 쓰여진 한글 경고문인데,
우리나라 비문으로서는 한글로 쓰인 최초의 묘비문으로 알려져 있어
그 역사적 가치가 높으며 국어사에 중요한 자료가 된다.
이 ‘한글영비’는 국어생활사에서 다음과 같은 중요한 가치를 지닌다.
첫째, 중종 31년(1536) 당시 한글이 얼마나 널리 알려져 있는가를 증명해주는 자료이다.
둘째, ‘한글영비’에 새겨진 한글의 서체는 훈민정음이 창제된 직후의 서체,
즉 <훈민정음 해례본>의 서체와 <용비어천가> 서체의 중간형의 성격을 지닌다.
셋째, 이 비석의 글은 비석의 이름인 ‘영비(靈碑)’를 제외하고는 국한 혼용이 아닌 순 국문으로 쓰여 있다.
본격적으로 한글로만 쓴 문헌은 18세기에나 등장하나
이 ‘한글영비’는 16세기에 이미 순국문으로만 쓰인 문장이라 할 수 있다.
넷째, ‘한글영비’는 언해문이 아닌 원 국문 문장이다.
15세기 이후 한문 원문을 번역한 언해문이 한글자료의 주종을 이루었으나
이 ‘한글영비’는 짧은 문장이긴 하나 처음부터 우리말로 쓰인 문장으로,
한글이 한문 번역도구가 아닌 우리의 생각과 느낌을 직접 전달하는 도구로 변화하였음을 증명하는 것이다.
다섯째, ‘한글영비’에 쓰인 국어 현상은 이 당시의 언어를 잘 반영하여 당시 국어를 이해하는 데 도움을 준다.
權知承文院副正字李公諱允濯 安人申氏籍高靈合葬之墓
권지승문원부정자이공휘윤탁 안인신씨적고령합장지묘
이 비석은 신령한 비석이다.
비석을 깨뜨리거나 해치는 사람은 재화를 입을 것이다.'라는 한글 경고문은
우리나라 비문으로 한글로 쓰인 최고의 묘비문으로 그 역사적 가치와 국어학적 의미가 크다.
조선 전기에 세워진 이 비석에는 한글이 쓰여 있는데 그것도 저주의 내용이다.
양반가의 비석에 남겨진 저주의 비문. 과연 이 비가 안고 있는 이야기는 무엇일까.
비석의 정식명칭은 "이윤탁 한글영비.
"이윤탁은 조선 중종 때 인물로, 외교문서를 관리하던 벼슬을 지냈다고 알려져 있다.
그의 무덤 앞에 비석을 세우고 비문을 쓴 사람은 이윤탁의 셋째 아들인 이문건.
그런데 대대로 양반가인 그가 쓴 비문이 범상치 않다.
"신령한 비석이므로 이를 훼손하는 사람은 재앙을 입으리라."
그는 왜 저주의 비문을 썼을까.
한글묘비명을 쓴 이문건은 특히 효성이 지극했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우암 송시열이 지은 '이문건 행장'에는 그의 어머니가 자주 병환을 앓았는데
스스로 의술을 익혀 어머니를 봉양했다고 전한다.
그런 이문건이 불경스럽게도 부모의 비석에 저주를 운운하는 글을 쓴 이유는 무엇일까.
그 배경에는 시대의 정치사가 담겨 있었다.
이문건은 문정왕후, 그리고 그의 동생 윤원형과 왕권계승을 두고 정치적 대립관계에 있었다.
실제로 명종 즉위 반대 사건에 연루되어 23년간 유배를 가기도 했다.
그런데 현재 태릉 자리에 있던 아버지 이윤탁의 묘가
문정왕후의 묘를 조성한다는 이유로 나라에 강제수용 당하자 그 분함은 극에 달한다.
결국 외압에 의해 아버지의 묘를 이장하게 된 이문건.
그는 분을 삭이며
두 번 다시 묘를 옮기는 일이 일어나지 않도록 파격적인 경고문을 남기게 된 것이다.
그런데 양반이었던 그는 왜 한문이 아니라 한글로 비문을 썼을까.
비문이 새겨졌던 16세기... 한글은 홀대받는 문자였다.
특히 양반과 사대부들은 한글은 글이 아니라고 여겼다.
그런데 당대의 대표적 문인이었던 이문건은
왜 글이라 취급도 못 받는 한글을 묘비명에 썼을까.
한글로 쓰인 이유는 비문에 드러나 있다.
'글을 모르는 사람',
즉, 평민들이 혹시나 비를 해칠까 우려했던 것이다.
그가 '글'이라 생각했던 한문도 다른 쪽에 새겨져 있다.
그런데 아이러니하게도 현대에 이 비석이 주목받는 것은 바로 그 '글 아닌 글' 때문이다.
현존하는 한글비석은 전국을 통틀어 모두 3건뿐인데
한글 영비는 그 중에서도 건립 연대가 가장 확실하고 가장 오래된 것이다.
특히 15세기 훈민정음 이후초창기 한글의 흔적을 볼 수 있다는 점에서
우리나라 한글사의 중요한 유물로 간주되고 있다.
그 가치를 인정받아 지난 2007년 보물 제1524호로 지정되었다.
부모의 묘를 지키기 위해 새겼던 저주의 비문.
그러나 비석은 현대에 또 한 번 자리를 옮긴다.
도로확장 공사로 원래 자리에서 15m뒤로 옮겨진 것.
비문의 내용 때문이었을까.
비석을 옮길 때 인부들이 서로 꺼려했다고 사람들은 전한다.
성주이씨문경공파정자공문중
※ 한글고비와 풍수쟁이 뉴시스 2006.10.08.
서울시 유형문화재 27호인 '한글고비(古碑)'가 문화재청 보물 지정 대상에 올랐다.(보물 1524호)
'영비(靈碑)-이 비석은 신령한 비석이다.
비석을 깨뜨리거나 해치는 사람은 재화를 입을 것이다'고 새겨져 있는 비석이다
'불인갈(不忍碣)-부모를 위해 이 비석을 세운다.
부모 없는 사람이 어디 있어 이 비석을 훼손할 것인가.
비를 차마 깨지 못하리니 묘 또한 능멸당하지 않을 것이 분명하다. 만세를 내려가도 화를 면할진저
(爲父母立此誰父母何忍毁之石不忍 不忍碣 犯則墓不忍凌明矣 萬世之下可知免夫).'
이같은 묘비명 덕분에 묘지는 470년째 서울 노원구 하계동 산 12번지에서 원형을 보존하고 있다.
오래 됐다고 해서 고비(古碑)라 불릴 뿐 실제로는 조선 중종 때인 1536년
명필 이문건(1494∼1567)이 선친 이윤탁과 어머니 고령 신씨를 합장한 묘 앞에 세운 비석이다.
훈민정음 창제 이래 한글이 새겨진 현존 최고의 금석문 비다.
15세기 고어의 모습을 그대로 보여주는 국어학 학술자료로서 가치가 매우 크다.
그러나 일반인은 한글 고비의 위협성 문구에 더 관심이 많다.
묘비 양측면 중 한쪽에는 한문으로, 다른 편에는 한글로 훼손을 금하는 글을 각인해 놓았기 때문이다.
우리말 경고문은 한자를 모르는 사람이 멋모르고 손대는 것을 막기 위한 '장치'로 풀이된다.
하지만 잦은 탁본 탓인 듯 한문에 비해 상태는 선명하지 못하다.
1974년 서울시가
유형문화재로 지정하기 훨씬 전부터 주민들은 비석에 금줄을 치고 치성을 드렸던 것으로 알려졌다.
한글고비는 '반풍수'도 조롱한다. 풍수지리 '도사' 중에는 사이비가 수두룩하다.
자손 잘되라고 골라 쓰는 것이 묏자리라 그렇다.
후손이 할아버지나 아버지의 음택 덕을 보려들 때쯤이면,
해당 산소를 잡아준 도사는 대부분 사망했다. 살아 있는 동안 책임질 일이 없다.
'당대발복'이라는 미끼를 던진다. 후대가 아니라 의뢰인 생전에 복을 주겠다며 유혹한다.
짝퉁 지관도 정통 풍수사처럼 '동기 감응'을 강조한다.
조상의 기가 후손과 교감한다는 전제에서 출발한 이론이다.
후손에게 좋은 기를 전달한다는 숨겨둔 혈처를 들먹인다.
이 정치인도, 저 기업가도 묘를 잘못 쓰는 바람에 좌절했다고 운을 띄우면 십중팔구 혹한다.
어느 분야에서든 정점을 맛 본 파워맨 가운데는 신비에 기대는 케이스가 많다.
노력해서 얻을 수 있는 것의 한계를 경험했기 때문이다.
막강한 힘은 하늘이 내린다는 체험에 근거한 믿음으로 불가시 존재에 의지한다.
못 되면 조상을 탓하면 그만이므로, 편리하다.
자기만 잘 먹고 잘 살겠다는 의도라면 그나마 낫다.
김유신 장군 태실에 구리 호랑이를 파묻는 따위의 요망이 문제다.
호랑이더러 김유신의 태반을 먹어치우라는 주술이다.
남의 불행은 나의 행복이다. 떠난 조상을 기리는 효심에게는 명당보다 경고 문구의 효험이 더 클 수있다.
한글고비가 보기다. 사람은 호모 사피엔스, 즉 생각하는 인간이다. 마음 따라 몸도 가는 법이다.
뉴시스 2006.10.08./ 신동립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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