壯節公 申崇謙(장절공 신숭겸)
본관 평산(平山). 초명 능산(能山). 평산신씨(平山申氏) 始祖
『신증동국여지승람』에는 전라도 곡성현(谷城縣) 출신으로
태조王建이 평산에서 사성(賜姓)하였다고 하고,
『고려사』열전(列傳)에는 광해주(光海州: 지금의 강원도 춘천) 사람이라 하였다.
그런데 『신증동국여지승람』춘천도호부(春川都護府) 인물조(人物條)에 그의 이름이 실려 있으며,
그의 묘가 춘천에 있는 것으로 보아, 본래 곡성 출신으로 춘천에 옮겨와서 살게 된 것으로 보인다.
▲高麗太師壯節公申崇謙將軍墓域入口
▲申崇謙路
몸집이 장대하고 무용(武勇)이 뛰어나 궁예(弓裔) 말년에
홍유(洪儒)·배현경(裵玄慶)·복지겸(卜智謙)과 함께 혁명을 일으켜 궁예를 몰아내고
왕건(王建)을 추대해 개국일등공신(開國一等功臣)에 봉해졌다.
▲高麗太師壯節公申崇謙將軍像
▲忠烈圖 충렬도
서기 927년 9월 신라를 침략하고 돌아가는 후백제 왕 견훤을 대구 동수에서 맞아 싸울 때
고려군이 전세가 불리하매 장절공(壯節公)이 고려 태조를 피신케한 뒤
어가에 올라 적진에 나아가 분전하는 장면이다.
장절공은 마침내 이 싸움에서 태조를 대신하여 순절하였다.
▲射雁圖 사안도
고려 태조가 평주 삼탄으로 사냥을 나갔을 때 기러기 세 마리가 날아가는 것을 보고
태조가 "누가 저 기러기를 쏘겠는가" 라고 하자
장절공(壯節公)이 선뜻 나서
태조가 명한대로 셋째 기러기 왼쪽 날개를 맞혀 떨어뜨리는 장면이다
이리하여 장절공은 평산신씨로 사적(賜籍)되었다.
태조 王建 즉위 후 7, 8년 동안 소강상태였던 후백제와의 긴장관계는
견훤(甄萱)이 신라를 공격함으로써 악화되었다.
927년견훤이 고울부(高鬱府: 지금의 경상북도 영천)를 습격하고,
신라를 공격해 경애왕(景哀王)을 죽이고 갖은 만행과 약탈을 하였다.
이 소식을 들은 태조는 크게 분개해 사신을 신라에 보내어 조제(弔祭)하는 동시에
친히 정기(精騎) 5천을 거느리고 대구의 공산(公山) 동수(桐藪)에서 견훤을 맞아 싸우게 되었다.
그러나 후백제군에게 포위되어 태조가 위급하게 되었을 때,
태조 王建의 갑옷을 입고 싸우며
대장(大將)이 되어 원보(元甫)김락(金樂)과 더불어 힘써 싸우다가 전사하였다
간신히 위기를 벗어난 태조 王建은 그의 죽음을 매우 슬퍼해 시호를 장절(壯節)이라 하였다.
또한 아우 능길(能吉)과 아들 보(甫)를 모두 원윤(元尹)으로 삼고,
지묘사(智妙寺)를 창건해 그들의 복을 빌게 하였다.
994년(성종 13) 4월에 태사(太師)로 추증되어
태사 개국장절공(太師開國壯節公)으로 태묘(太廟)의 태조 사당에 배향(配享)되었다.
신숭겸의 행적을 기록한 『평산신씨장절공유사(平山申氏壯節公遺事』에는
1120년 예종이 그와 김락을 추도하며 지었다는 「도이장가(悼二將歌)」라는 향가가 전한다.
▲飛龍池
▲飛龍池
▲紅一門홍살문
▲光仁門
▲怡和堂
▲尙忠齋
▲典祀廳 전사청
전사청은 일반적으로 나라의 제사 등을 맡아 보는 관아로서
국가에서 제사를 지내는 종묘나 문묘,
기타 전각이 있는 곳에는 제례 때 전사관(典祀官)이 집무하면서
제사준비에 소홀함이 없도록 점검하며 제사의 비품을 보관
▲忠烈門
▲壯節公申崇謙神道碑
▲壯節祀
▲高麗太師壯節公申崇謙將軍墓域
신장절공 묘역 (申壯節公 墓域)
(강원도 기념물 제 21호)
고려 개국에 큰 공을 세운 장절공 신숭겸의 묘역
신숭겸은 평산신씨의 시조로서 고려사에 춘천 사람이라고 쓰여있다.
신숭겸 장군은 918년 신하들과 함께 궁예를 몰아내고
왕건을 추대하여 고려 건국에 결정적인 역할을 하였다.
927년(태조 10) 대구 팔공산에서 후백제 견훤의 군대와 전투 중 태조 왕건이 포위되어 위급해졌을때
신숭겸 장군이 태조 왕건의 옷을 입고 왕 대신 싸우다가 전사하였다
신도비에 의하면 후백제군이 왕의 옷을 입은 신숭겸을 태조로 알고 그의 목을 베어가자
왕건이 그의 죽음을 슬퍼하며 금으로 머리를 만들어 장례식을 치렀다고 한다.
금으로 만든 머리 때문에 도굴될 것을 염려하여 봉분을 세 개로 만들었다고 하며
풍수지리가들은 이 묘역을 명당중의 명당이라 한다.
壯節公 申崇謙 將軍 略傳 (장절공 신숭겸 장군 약전)
장절공 신숭겸 장군은 고려 개국공신이시며 평산신씨(平山申氏)의 시조(始祖)이시다
서기 918년 배현경(裵鉉慶), 홍유(洪儒), 복지겸(卜智謙) 장군 등과 더불어 의기(義旗)를 들어
포악한 태봉왕(泰封王) 궁예(弓裔)를 폐하고,
왕건태조(王建太祖)를 받들어 고려를 개국하셨다.
장군은 삼국통일을 위한 여러 전투에서 크게 전공을 세우셨고
서기 927년 9월에 후백제 견훤(甄萱)이 기울어져가는 신라의 왕을 시해하고 도읍을 유린하였다는 급보를 받고
태조 왕건은 신라를 돕고자 장절공 신숭겸 장군과 군사 5천을 거느리고 황급히 출전을 하셨다
대구 공산 동수에 이르러 견훤군과 접전하게 되었으나
매복한 적군에 포위되었고 전세는 극히 불리하여 위급을 피할 수 없게 되었다
이에 장군께서는 위왕대사(爲王代死) 하실 것을 결심하시고 왕건 태조를 피신케 한 후
태조의 갑옷으로 갈아입고 어가(御駕)에 올라 왕으로 위장, 군사들을 이끌고 진격을 하셨다
고려왕으로 착각한 적의 집중적인 공격으로 인하여 급기야 비장하게 순절(殉節) 하셨고
두상(頭像)은 견훤군이 취해갔다
구사일생으로 살아남은 왕건 태조께서는 장군의 시신을 찾아내어 통곡하고
잃어버린 두상을 만들어 예장(禮葬)하셨으니 이곳이 소양강이 굽어보이는 춘천 방동 묘소 이다
이 묘소는 원래 도선국사(道詵國師)가 태조의 묘소로 잡은 터였는데
태조께서 생명을 대신한 장군의 예장지(禮葬地)로 하고 봉분을 셋으로 만들고 원당(願當)을 세우도록 하셨다
전적지 대구 공산 동수에는 순절지(殉節地)에 단(壇)을 축조하고
지묘사(智妙寺)를 세워 공의 영정(靈幀)을 모시고 명복을 빌게 하였다
지묘동과 팔공로 파군재는 공의 전적지로 유래되어 부쳐진 지명이며
표충재(表忠齋)와 공의 영정을 모신 사우(祠宇)가 있다
곡성(谷城) 목사동은 공의 출생지로서 소년시절 무예를 연마하신 유적이 허다하고
구룡리(九龍里)에는 용산단(龍山壇)과 용산재(龍山齋)가 있다
▲高麗太師壯節公申崇謙將軍墓域
▲예감(瘞坎)
▲高麗太師壯節公墓域造景記念碑
▲記念館
충장공 한백록(忠壯公 韓百祿),부호군 한몽룡(韓夢龍),중추부사 한옥(韓沃),수문장 한백영(韓百英),봉직랑 한근(韓瑾),첨지중추부사 한백붕(韓百朋),절충장군 한우건(韓佑乾) (0) | 2015.11.09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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